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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탤미 Feb 11. 2022

차가운 세상, 쓸쓸한 뒷모습.


얼마 전 뉴스를 통해 현대자동차 책임연구원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내와 두 아이만을 남겨둔 채 세상을 등진 어느 가장의 죽음이 누군가에게는 슬픔이자 비통한 일이었지만, 또 다른 이들에게는 단지 묻어야 할 주검이자, 잡음이었나보다. 그렇기에 그의 죽음은 세상에 알려지고 뉴스에 공공연히 되기까지 1년 4개월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힘 있는 기업과 고위 간부들은 그의 죽음이 개인의 문제라 치부했지만, 유가족과 직장 동료들은 과도한 업무, 상사의 성과주의로 인해 우울증, 공황장애 등을 앓았다고 했다. 그의 쓸쓸한 죽음에 진정한 가해자는 누구였을까.

한 사내의 죽음을 통해서 일 하는 직업인에 대해, 그리고 조직에 대해 고민해 본다.


일이란 대체 무엇일까. 사람이 회사에 다니고 일을 한다는 건 사회 구성원이라는 울타리에 진입했다는 안정감을 준다. 내가 그랬다, 일하지 않으면 효용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는 암묵적 무의식이 깊이 뿌리내려져 있었기에, 이직을 여러 번 하면서도 2개월 넘게 쉬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회사에 다녀야 한다는 강박감이 있었다. 무엇이 나를 그 강박으로 몰아넣은 걸까. 부모님에게는 그럴듯한 직장에 출근하는 딸이 되기 위해, 경쟁적으로는 같은 대학에 나와 디자이너란 명함을 달기 위해, 앞을 향해 내달리는 레일 선상에 벗어나지 않도록 직장을 구하고 회사에 다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무엇하나 번듯한 이유가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자신의 만족감은 증발해 버린 목적들로 직장생활을 유지했다.



드라마 속 <나의 아저씨> 박동훈이라는 캐릭터가 문득 떠오른다. 자기가 싫어했던 대학 후배가 회사 대표로 있고, 그 대표가 자신의 아내와 불륜 관계임에도 섣불리 상대에게 감정을 드러내지도, 회사를 그만두지도 않는다. 가족 구성원으로 삼 형제 중 가장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유지하고 있으나, 빛 좋은 개살구처럼 별다른 이득 없는 출근의 선택지에 스스로가 지쳐간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항상 자신을 보며 미안해하는 어머님을 위해 “성실한 무기징역수처럼 꾸역꾸역” 살아가는 그를 통해, 어떠한 기쁨이나 행복의 낯빛 없이 집을 나와 뚜벅뚜벅 지하로 내려가 대중교통으로 회사에 출근하는 한 사내의 뒷모습이 어쩐지 낯설지 않다.


그리고 지금도 성실히 일하는 누군가의 육체적, 혹은 정신적 죽음을 해제할 방법은 없는 걸까.

혹은 여전히 기업이 부추기는 직장 내 경쟁적 대립 구도, 그리고 가장으로서 짊어져야 할 책임감 등이 현대를 살아가는 인물의 쓸쓸한 퇴근길을 만들어 내는 건 아닐까. 개인의 존엄성은 바닥을 긁고, 회사생활은 '과로 자살'을 결심하게 하는 한 가장을 말이다.

이제는 다른 안목과 선택으로 일의 가치에 접근해야 할 때이다.


결론은 없이 여러 가지 의문과 공백만 남아 머리가 혼잡하다. 다만 바라는 바는 언젠가 마음도 생각도 건강한 사람들이 만든 기업이 많아져 연대와 공감으로 일할 기회가 생길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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