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탤미 Jan 27. 2022

감당할 수 있겠니?

 생명을 책임진다는  이렇게 부담스러운 일인지 몰랐다.

책임이라는 제목 자체에 익숙하지 않았던 20대 때와는 다르게 아이까지 배 속에 있는 30대 중반이 되면서 생각과 마음의 무게도 달라졌다고 해야 할까.


고양이 한 명의 무게감은 이 녀석의 뚱뚱한 몸매만큼이나 묵직하다. 일거수일투족을 바라봐야 하고, 무언가 잘못 먹어서 문제가 되지는 않는지 늘 노심초사 녀석의 행동을 주시한다.

내가 가장 편해야 만사가 형통했으며, 시간을 방해하는 요소들은 앙칼지게 반응했던 나. 귀찮은 상황이 발생하면 그 일을 회피하고 도망치며, 다시 나의 영역을 지켜나갔던 나쁜 버릇들이 잔여물처럼 남아 반려동물을 키우는 선택에서도 쉽지 않은 것 같다.


이 녀석을 키울 거면 제대로 키우고 싶어서 온갖 양육 영상을 보고 연구했지만, 막상 따라 하고 실천하는 모습은 실수투성이에, 이론처럼 되지 않은 나를 바라보면서 내가 과연 이 작은 생명도 케어 못하는데 한 아이의 엄마로서 책임감을 느끼고 성실하고 지혜롭게 키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가령 내가 안보는 사이에 배가 고파 쓰레기통을 뒤지거나 식탁에 올라와 티슈의 티슈를 찢어놓고 먹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당황하고 화가 나서 소리를 버럭 지르거나 양손을 찰싹 쳐서  소리에 고양이가 놀라게 만든다.  방법 모두 좋지 않고 오히려 문제행동을 계속하게 한다는데, 나도 모르게 나오는 자동 반응을 제어할 재간이 없다.


녀석은 마치 무언가 해로운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없는 2~3살짜리 어린아이와 같다. 한시도 눈을 뗄 수 없고, 놀아달라 보챌 때는 장난감으로 놀아주고 흥분해서 놀다가 내 손을 할퀼 때면 머리 콕 쥐어박고도 싶지만 때리면 안되니까 꾹 참고 혼잣말로 “이쉐끼 이쉐끼”를 반복할 뿐이다.

새벽에는 혼자 놀 수 있게 공이나 오뚝이 장난감 한두 개 놓고 자지만, 이마저도 불안하다.

혹여나 고양이가 장난감에 붙어있는 깃털을 먹지는 않은지, 온 집안을 휴지 난동으로 만들어 놓지는 않을지 등 자는 동안 걱정과 불안이 반복된다. 더군다나 임신 3개월 차라 새벽에는 자다가도 소변이 마려워 자주 깨는 편인데 그때마다 내가 화장실에서 나오면 아기처럼 앵앵 울고, 다시 볼일을 보고 방에 들어가 문을 닫으면 밖에서 한동안 구슬프게 운다. 물론 다행히 포기도 빨라서 금방 울음을 그치긴 하지만, 듣기에 여간 마음이 안쓰러운 게 아니다.


그런 나에게 임시보호를 맡기신 분이 다시 한번 물어본다. 입양하실 거냐고.

사실 이제는 마음 같아서 입양하는 것이 맞는가?  질문을 스스로 해본다. 올해 7월이면 아이가 태어나고, 그러다 보면, 지금처럼 고양이에게 신경을 많이 쓰지 못할 텐데, 동시에 나도 힘들고 이게 맞나? 라는 의문이 자꾸 든다. 그렇게 한달 내내 고민했음에도  고민이 끝나지 않음에 자신도 놀란다. 아이가 태어날  생각하면 나를 위해서라도  키우는  현명할  같은데, 혹은  현명한 판단만을 하는 것이 사람의 본성은 아닌데, 지금 나에게 정서적 안정감을 주고 나를 엄마처럼 따르는  녀석을 사랑할 기회가 감사한데 키울까? 여러갈래의 마음이 두서없이 왔다 갔다 한다.


한동안은 고양이의 대변 상태가 좋지 못해 걱정 근심하며 병원비에 엄청난 돈도 투자했다. 이미 나는 키우는 것처럼 이 녀석을 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막상 임보를 맡긴 분의 단 한마디, “그래서 입양하실 건가요?” 물음은 다시 한번 “내가 정말 이 생명을 책임질 수 있을까? “ 란 과도한 책임적 불안감을 가증시킨다. 이 녀석과 함께한 35일 치의 무게감이 절대 작지 않다. 다른 사람들은 동물을 키우는 시작이 나처럼 어려울까? 나는 왜 이렇게 고민할까.

그건 내가 한 번도 누군가를 위해 희생해본 적이 없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나는 진짜 어른이 되기 위해 이 친구를 키워봐야 하는 건 아닐까?

오늘도 이런 고민으로 머리가 아플 지경이지만  녀석은 마냥 태평하다. 옆으로 돌아누워  가슴팍에 기대어 곤히 잠자는 아기 같은 녀석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보호 본능이 샘솟고,  안에 충만한 안락감이 감돈다. 따뜻한  사이로 온기가 전해져 오면 함께 잠을 청하고 싶을만큼 나도 모르게 기분 좋은 감정이 몰려온다.

어쩌면 이것이 이 친구를 입양하고 싶은 이유는 아닐까. 함께 온기를 나눌 반려묘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다시 묻는다.


“입양할 이유는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니? 지금 너에게 생명을 나눠줄 온기가 있다는 거. 오늘 하루도 이 녀석 때문에 분주할 만큼 성실한 하루를 선사해 준다는 것 말이야.”

그러니 무거운 책임감은 넣어두고, 고마움으로 하루하루를 살아보자.

냐~옹.  

작가의 이전글 고영희 군에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