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탤미 Feb 04. 2022

부황 뜨는 여자

위장트러블러의 명절

나는 시집을 참 잘 왔다.

남편에 대한 칭찬이냐 묻는다면 그것보다는 오히려 우리 시어머니 때문이다.

나는 지독한 위장 트러블러로 3년 넘게 고기를 자유롭게 먹지 못하는 형편이다. 탄수화물 지방 단백질 중 단백질이 소화가 가장 잘 안 된다던데 그중 고기는 나의 몸에 상극으로 위 안에 가장 오랜 시간 동안 머물러 있다. 만약 내가 점심때쯤 고기를 먹었다 하면 그날 오후부터 저녁까지 속이 더부룩해 소화제를 먹지 않고서는 잠들기 힘들 정도이니 말이다.

상황이 이러니 소화제는 나의 소울메이트처럼 집안 약통에, 가방 곳곳에 껌처럼 붙어 다녔다.

그런 내가 임신하고서는 도통 약을 먹을 수 없게 됐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은 부항을 뜨는 것이었다. 조금 노인네 같은 방법이긴 하지만 나름대로  효과가 있다. 임신 16주 차라 윗배까지는 불러오지 않아 위 주변과 등의 척추 라인을 따라 양옆에 부항을 뜨는 것이다. 피부가 조이고 흡입되는 압력에 처음에는 등살이 별로 없는 나에게 움직일 수 없는 고통을 가하긴 했지만, 하고 난 후에는 한결 속이 편해져 잠을 잘 잘 수 있으니 잠깐의 고통은 다가올 평화에 비할 바 못 된다. 물론 극심하게 소화가 안될 때는 이 방법 마저도 소용없다. 그럴 때는 시어머니가 알려주신 최후의 처방을 생각해야 한다. 바로 손을 뜨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 피를 봐야 한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손톱 밑 부위가 아니다. 세 번째부터 새끼손가락까지 지문 있는 곳에 침으로 달칵 누르며 피를 빼야 한다.

 

처음으로 손에 피를 본 건 결혼식 당일이었다. 긴장한 탓인지 별로 먹은 것도 없는데 꽉 끼는 드레스를 입고 속이 답답했다. 어머니는 야무지게 손을 따주셨다. 단단하게 뭉쳐있는 검은 피가 딸깍하는 소리와 함께 뻥 터지자 이상하게 기분 탓인지 정말 효과가 있는지 속이 한결 나아졌다.

그 뒤로 나는 어머님 집에 갈 때면 늘 손을 따달라고 한다. 그러면 속이 한결 편해지고 머리에 피가 도는 기분이다.


이번 명절 때도 예외가 아니었다. 사실 3일 전부터 속이 좋지 않았던 게 전조증상이었다. 15주 차로 진입하자 입덧은 사라졌지만, 극심한 소화불량과 위염 때문에 무언가 먹으면 메슥거리는 증상이 계속됐다. 더군다나 화장실에는 기분 나쁜 기분으로 헐레벌떡 들어가서 변기통에 폭탄 투하를 일삼는 일이 종종 있었기에 제발 명절에는 무사히 넘어가 주길 바랐다.

하지만 나의 간절한 바람과는 다르게 설 당일에도 속은 좋지 못했다. 이틀 연속 고기를 먹었던 게 문제였을까? 이미 좋지 않았기도 했지만 특히나 위에 부담이 되는 자극적인 닭도리탕, 그다음 날에는 소고기를 먹었는데 종일 더부룩함이 계속됐다. 도저히 그 상태로는 잘 수가 없어서 남편과 1시간씩 걷기도 하고, 부항도 떴지만, 도저히 메슥거림과 소화불량이 진정되지는 않았다. 이 상태면 장도 탈이 날 게 뻔했다. 내 예상은 빗나간 적 없는 무당처럼 다음날 기분 나쁜 장염 증상을 호소했다.

 당일날 시부모님댁에 가서도 몸이  처지고 이상한 상태가 계속됐다. 남편은 언제 말했는지 어머님은 음식 준비하다가 나에게 다가오셔서 침을 놔주신다고 자리에 앉히셨다.

낭자한 피가 휴지조각에 흥건할 정도로 나쁜 피를 뽑았다. 매번 손을 따는 심약한 며느리라 민망하고 죄송스러웠다.

튼튼한 며느리였음 좋았을 텐데, 비실거리는 모습만 보이는 것 같아 속상했다.

그래도 손을 따고 나니 한결 가벼워져 음식도 거들도 제대로 된 떡국 맛도 보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명절 잔치는 무르익어 갔다.


시누이는 식후에 커피를 주문하자고 했다. 요즘 핫한 카페인데 흑임자 라떼가 맛있다고 했다. 사실 나는 위 때문에도 카페인을 잘 못 먹지만, 애초에 커피 자체에 약하다. 하지만 그날따라 기분이 좋아서 그런지 다들 커피 마시는 분위기에 따라가고 싶어서 ‘흑임자 라떼 연하게’에 도전하기로 했다. 임산부도 아메리카노 하루에 한 잔 정도는 괜찮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걱정하는 남편을 안심시키고 도착한 흑임자를 골고루 섞어 라떼를 음미했다. 와, 꿀맛이었다. 이것이 바로 커피의 농후함과 흑임자의 고소함이 조화롭게 섞인 맛인가. 적당히 달짝지근한 게 취향 저격이었다. 라떼 3분의 1 정도를 남겨놓고, 더부룩함이 갑자기 몰려왔다. 이제 그만 마셔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남편에게 남은 커피를 전해주고 한 20분이 흘렀을까. 갑자기 기분도 몸도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누군가 내 몸에 커다란 돌덩어리를 묶어놓은 것처럼 기운이 축 처지고 머리가 빙빙 돌았다. 속도 메슥거리고 울렁거렸다.

 

역시 커피 때문인 것 같았다. 말로만 듣던 카페인 쇼크 현상을 겪게 된 것이다. 그놈의 감당하지 못할 커피를 들이부은 결과로 나는 소화불량보다 더한 고통에 시름시름 죽어가는 식물처럼 소파에 축 처져 있었다. 남편은 표정이 좋지 못한 나를 보며 괜찮냐고 물었고, 나는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잠시 있다가 부엌을 정리하고 돌아온 어머님이  옆자리에 앉으셨다. 많이 좋냐고 물어보셨다. 이제는 정말 민망하고 미안해  몸뚱아리가 싫어질 지경이었다.


“아, 심하진 않고 그냥 좀 어지러워서요. 못 먹던 커피를 마셔서 그런 거 같아요. 괜찮아요. 어머니”


더는 골골거리는 모습이 자신도 못 봐주겠어서 애써 괜찮은 척했지만, 마음 같아서는 응급실이라도 가서 주사라도 맞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 나에게 어머니는 등과 어깨를 주무르며, 관자놀이와 눈썹 위 등 지압점을 찾아 야무진 손으로 마사지를 해주셨다. 아프긴 했지만 동시에 머리가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다행히 어머니의 약손 덕분에 한결 나아진 상태로 집에 왔다. 저녁 10시쯤 되니 카페인 독소가 다 빠져나갔는지 몸이 무겁고 어지러운 증상은 사라지고 약간의 메슥거림만 남아 등에 부항을 뜨고 잘 수 있었다.


하… 정말 오늘 하루도 편하게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는 몸뚱아리는, 매번 먹는 순간 행복과 기쁨에 차서 음식을 대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고통과 노력이 수반되는 일이라 너무 속상하다. 그런데도 감사할 수 있는 건 비실대는 며느리 아껴주고 보살펴주시는 시어머니, 걱정해주고 애써주는 남편 덕에 무사히 잠에자리에 든다. 내일은 또 화장실을 부수고 있을 수도 있지만, 속을 달래고, 마음을 달래며 감사하게 하루하루를 살다 보면 한 뼘 더 튼튼해지는 내가 되지 않을까?

작가의 이전글 감당할 수 있겠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