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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RE Jan 20. 2024

시무식 없는 회사

나홀로, 고독한 시무식을 치르다

새해 첫 출근. 차갑게 식은 사무실의 불을 차례로 켜고, 히터의 온도를 한껏 올린다. 분명 여느 때와 다른 주말이었지만, 새 사람이 되어 나타난 듯한 직장 동료들의 상기된 표정, 어수선한 분위기를 바로잡는 상사의 잔소리 따위는 찾을 수 없는 적막한 사무실. 시무식에 모인 동료들과 새해 떡을 나눈다든지 모닝커피를 사러 몰래 빠져나가는 일은 더 이상 없다. 내가 상상하는 그날의 분위기는 이제 아주 오래된 추억 같다.

아무 온기 없는 차가운 사무실이 데워지길 기다리며 올해의 연간예산표를 만들고, 작년에 마무리되지 못한 프로젝트 일정들을 체크한다.   


대표 2년 차. 여전히 소름 돋는 직함이다. 지난 1년을 직장인에서 법인 회사의 대표로, 대외적 직함을 바꿔 살아봤다. 가까스로 버티며 쌓아온 커리어와 직장 생활에 대한 무수한 고민에 비하면 너무 쉽게 그리고 수월하게 나는 옷을 바꿔 입을 수 있었다. 사업을 독려한 든든한 조력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시작은 그저 '좋아하는 사람들과 즐겁게 일할 수 없을까?'와 같은 이상적인 바람을 품고 표류하던 나를 어떤 우주의 기운이 생각지 못한 현실로 떠밀어 준 것 같았다. 능력 있는 직장인이라면 '내가 이 회사 일 다하는데, 이럴 거면 내가 나가서 내 사업하고 말지'라는 기고만장한 마음이 들 때도 있겠지만, 현명한 사람이라면(능력이 있는 사람일수록) 이를 실천에 옮기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마음을 잠재울 만큼 조직은 따듯하고, 바깥세상이 전쟁터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 테니까. 그래서였을까. 퇴사를 하고 사업을 시작한다고 했을 때, 아니 사업을 이미 시작한 이후(사업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표현이 맞겠다)에 어쩌다 보니 사업을 하게 되었다고 고백(?)을 할 때마다 나는 어딘가 되게 어리석은 사람이 된 느낌이 들곤 했다.


법인 회사 대표 2년 차. 본격적으로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6개월 만에 우리 회사는 법인으로 전환했다. 정식 직원이자 공동 대표인 우리는 여전히 어리바리한 주니어일 때도 있고, 실무를 진두지휘하는 시니어 일 때도 있고, 한 달에 며칠 씩만 고정적으로 사무실 정비나 회계 같은 일을 맡아하는 비정규직 직원이 될 때도 있고, 회사를 운영과 방향을 정하는 대표 역할을 하기도 한다. 조직에 속해 있을 때의 업무가 종단이라면, 회사를 운영하는 일은 횡단에 가깝다. A라는 업무를 하다가 A-1, A-2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순식간에 Z로 건너가 업무를 쳐내야만 한다. 잘 나가는 CEO가 브랜딩의 기초에서 말하는 것처럼 업의 정의를 내리기 전에 '나는 대체 뭐 하는 사람인가.'라는 현타부터 찾아온다. 따박따박 들어오는 월급을 먹고 자라는 개인 통장을 확인하는 횟수보다 세금계산서 발행일과 법인통장의 잔고를 체크하는 일이 잦아진다. ‘내가 대체 뭐 하는 사람인가’에 대한 대답을 찾기 전에 나는 지금 눈앞에 닥친 일들을 해결해야 하고, 회사 운영을 고민해야 한다. 직장을 다닐 때처럼 상사를 붙잡고 커리어가 어쩌고. 승진이 어쩌고. 연봉이 어쩌고. 회사를 관두네 마네 할 수 있는 자격이 대표에게는 없다. 나는 더 이상 사직서가 무용한 법인 회사 대표니까.

 

승진과 연봉이 전부인 것처럼 보이는 직장인 세계에서도 나처럼 실무를 다루는 것만 좋고 관리직에 오르는 것에 별로 관심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다가 결국 남 좋은 일만 하다가 몸만 망가진다.' 이 말은 실제로 내가 회사를 다니면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이다. 그의 말이 맞는지 틀린 지를 내가 직접 실험체가 되어 '맞다, 아니다'를 방증했으면 좋으련만, 나는 몸이 망가지기 전에 도망.. 아니, 그렇게 피해 다녔던 최고 관리직에 얼떨결에 앉아 버렸다. 물론 아직은 수 십 명의 팀원을 거느리거나 수 백명의 조직을 이끌 정도의 큰 회사는 아니지만, 어엿한 법인 회사를 움직여야 하는 막중한 책임이 있다. 직장인으로는 다뤄보지 못했던 액수의 프로젝트 계약금이 우리 회사 법인 통장으로 오가고, 온갖 법적 책임이 난무하는 계약서를 직접 받아 든다. 법인회사 대표의 1년 차에게는 종종 회사에 갓 입사한 신입사원처럼 물 따르는 법도 까먹는 낯선 상황이 수두룩하게 발생하는데, 그때마다 마치 모든 걸 예상했다는듯 받아치며 어떻게 서든 나아간다. 그러다 보면 깜깜했던 장막이 사라지고, 또 다른 장막 앞에 가로막히고. 그렇게 우리는 지난 1년을 지나왔다.


전처럼 거창하고 시끌벅적한 시무식은 없지만, 대표로서 처음 맞아보는 새해 첫 출근의 기분은 꽤 새로운 자극이 되는 듯했다. 뭉근하게 데워진 고요한 사무실에서 불과 지난 주였던 작년을 돌이켜보다가 내린 총평은 ‘가까스로 생존!' 보이지 않는 총성과 누군가의 희생으로 남겨진 탄피와 여전히 약탈과 모방이 난무하는 영상업계에서 올해도 잘 버텨낼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다시 원제로 돌아가, ’ 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를 고민하며 회사의 철학과 정신을 되새기게 된다. 여전히 이밖에도 수많은 물음표들이 머릿속을 떠돌지만, 명확한 답을 내리기엔 아직 한참 부족한 연차다. 올해는 작년보다 더한 물음표 살인마로 스스로에게 난제를 선물하겠지. 끝없는 난제를 만들고 우리 회사만의 답을 찾고 밀고 나가는 것 또한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 중 하니니까. 나도 대표로서 연차가 쌓이다 보면 그 답이 선명해질 것이고, 누군가에게 그 노하우를 나눠줄 수 있으리라.


*직장을 다녀도 내 회사를 차려도 여전히 내 앞의 세상엔 여러 문제가 난무하지요. 하지만 왜 또 누가 옆에서 지켜 봐주고 토닥여주고 하면 포기하고 싶다가도 한번 더 참고 나아가는 게 성실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이지요. 부딪히고 다치고 넘어지고 일어서는 저의 우당탕탕 사업 도전기를 종종 글로 남겨볼 예정입니다. 어쩌면 지금의 제 모습이 내일 당신을 더 멋진 대표로 만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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