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세상이 일본 여행을 외치는 알고리즘 피드에 휩쓸려 후쿠오카 비행기표를 끊었다. 후쿠오카에 대한 호기심이 없을 때는 잘 몰랐는데, 요즘 사람들에게 후쿠오카 여행의 체감은 '우동 먹으러 일본이나 다녀올까', '백화점 쇼핑이나 하고 오지 뭐." 하는 허세를 부려볼 만한 도시로 여겨지는 듯하다. 첫째는 물리적으로 가깝기 때문이고(부산에서 후쿠오카는 50분 비행 거리인데, 농담 삼아 부산시 후쿠오카라고 이야기할 정도라고), 둘째는 언제 다시 오를지 모를 엔화 가치의 하락이다. 세 번째는 그에 덧붙였는 각자의 취향과 이유. 어찌 되었든 돈과 시간만 해결된다면 여행은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니까. 찐 재벌이 아닌 이상, 일본 가서 정말 우동 한 그릇만 먹고 오진 않겠지만, 그만큼 가벼운 마음으로 모두들 '후쿠오카 정도는' 다녀오는 것 같은 위화감이 나를 등 떠미는 듯한 기분이 든 것도 사실이다.
고백하자면, 나의 목적에도 꽤나 허영심이 묻어 있었다. 어떤 알고리즘이 내 머릿속을 후벼 판 것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불현듯 내가 후쿠오카에 가게 된 것은 바로 '에키벤' 때문이었다. 기차역에서 파는 도시락 말이다. 전 세계 수많은 기차가 있겠지만, 유독 일본에서는 기차를 타본 경험이 없었기에 에키벤에 대한 추억, 아니 일본 드라마와 영화, 만화책에 등장하는 에키벤의 장면이 문득 나의 여행 욕망을 자극했다. 정갈하게 차려진 가이세키나 김이 모락모락 나는 대욕탕보다 료칸을 향해 가는 유리노모리 기차를 타는 것이 중요했다. 역사에 켜켜이 쌓인 에키벤을 고르고, 클래식 기차에 앉아 9칸 찬합에 담긴 도시락을 맛보는 것만으로도 후쿠오카 여행의 당위성은 충분했다. 이 허영심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에키벤 먹고 싶어서, 일본 좀 다녀와요.'
나에게 후쿠오카 여행 준비라고 할 것은 오직 유후인으로 가는 기차를 예약하는 것이었는데, '유후인 기차'라고만 검색해도 무수한 정보가 우수수 떨어져서 좀 놀랐다. 블로그에 한 땀 한 땀 써 놓은 온라인 예약 방법에는 일본어를 번역해 주는 페이지를 하나씩 캡처하고 거기에 가타카나로 이름을 검색해 주는 사이트까지 남겨놓는 정성이 깃들여 있었다. 기계의 화면을 일일이 찍어 올린 사진과 함께 티켓을 수령하는 방법을 남겨놓는 배려까지. 나도 한때 여행 정보를 전달하는 기자였지만, 본인들의 사적인 여행에 이토록 수고로운 일들(마치 취재 같은)까지 해내는 그들이 새삼 대단하다 느껴졌다. 어디 이뿐인가, 블로그 몇 개를 뒤졌을 뿐인데 인스타그램 돋보기 피드에 후쿠오카 콘텐츠가 쓰나미처럼 밀려오기 시작했다.
'후쿠오카에서 안 먹으면 후회할 맛집 10'
'비행기값 벌어오는 쇼핑 팁(feat. 후쿠오카 명물 셀린느)'
'일본 10년 산 사람이 추천해 주는 편의점에서 꼭 사야 할 것'
'후쿠오카 여행 간다면 여긴 꼭 가봐'
'돈키호테에서 꼭 사야 할 간식/뷰티 리스트'
매일 제목만 다른 피드들이 시도 때도 없이 팝업처럼 튀어 나올 날때마다 에키벤만 먹고 오면 그만이었던 후쿠오카 여행에 군더더기처럼 해야 할 일들이 쌓여갔다. 생각에도 없었던 백화점 명품 쇼핑도 해야 할 것 같고, 분명 한국에 가져오면 입에도 안 댈 것 같은 돈키호테 간식 리스트를 나도 모르게 저장하고 있었다. 평소 줄 서는 식당은 무조건 패스하는 우리 부부에게 눈에 띄는 건 자꾸 오픈런을 해야만 먹을 수 있다는 맛집 리스트들 뿐이었다. 대체 이들이 조언해 준 모든 것을 다 먹고, 사려면 얼마나 바쁘게 움직여야 하는 걸까?
3박 4일 일정에 이틀은 유후인, 이틀은 후쿠오카 시내에 머물렀던 우리는 역시나 후쿠오카 여행 선행자들이 알려준 대부분의 것을 실행하지 못했다. 기껏해야 두 끼 정도밖에 먹지 못하는 우리의 하찮은 소화력으로는 그들이 정해준 맛집의 대부분을 섭렵할 수 없었고, 큰맘 먹고 맛집을 찾아가면 한참을 줄 서서 기다려야 하는(90% 한국인) 인내심 또한 용납되지 않았다. 실제로 후쿠오카에서 만난 대부분의 한국인은 식당 앞에 줄을 서 있거나 백화점 명품 매장 앞에 입장을 위한 줄을 서 있거나 택스 환급을 받기 위해 줄을 서 있거나... 대체로 그랬다. 뭘 살 지 아무 계획 없이 돈키호테 들어선 우리는 너도나도 같은 쇼핑리스트로 바구니를 꽉꽉 채우고 있는 한국인들 덕분에 길을 잃지 않고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작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먹을 킷캣 한 봉지만 집어왔을 뿐이지만).
마지막 날, 공항 가기 전 숙소 근처 카페(후쿠오카에서 '가야만'하는 카페는 무수히 많았지만 그것조차 쫓아다니기엔 우리에게 너무나 힘든 여정이었다)에 둘이 앉아 "우리가 너무 게으른가 봐. 우리처럼 안일한 사람들은 후쿠오카 오면 안 되겠다. 뭐, 할 수 있는 게 없어!"라고 지난 여정을 회상했다. 떠날 때의 의욕처럼 양손 가득 쇼핑을 해온 것도 없이 나는 그저 남들이 말하는 것들에 기웃거리기만 하다가 여행이 끝난 듯한 기분이 들어 괜한 부아가 나기도 했다.
"그 집 가서 그 메뉴 못 먹으면 인생을 잘못 살았네 말았네 하도 난리라서 먹어봤는데. 그저 그랬어요."
남들이 추천해 준 맛집을 갔다가 솔직 후기를 남긴 어느 블로그를 보다가 우리 부부는 눈치 없이 찾아간 식당에서 빵 터지고 말았다. 우리 또한 그 식당에서 사람들이 주문하라고 추천해 준 메뉴를 그대로 시킨 직후였기 때문이다. 여행을 다녀온 이후에도 한동안 인스타그램 돋보기를 누르면 후쿠오카 여행에 관한 추천 리스트가 콘텐츠에 자주 떴는데, 실제로 그 피드들을 보고 있으면 인생 잘못 살게 느끼게 하는(정확히 말하자면 내 여행이 잘못됐다고 꼬집는 듯한) 피드가 시들해졌던 내 부아를 쿡쿡 찌르는 기분이 들곤 했다. 그럴 때마다 이번 여행의 목적인 에키벤의 추억은 충분히 경험했으니 그만하면 됐다고 스스로 위로했다. 그 흔한 편의점 하나 없는 유후인 료칸 주변을 산책하며 구름이 걸린 다케야마를 보며 감탄하고, 노을을 감상하며 천천히 걸었던 시골길이 그 어떤 시간보다 오래 기억될 것 같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만한 여행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재미있는 건, 너무 많은 정보를 보고 듣고 간 여행에서 나는 오히려 제대로 된 여행을 즐기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행에서조차 실패를 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을 위한 사적인 추천 리스트가 오히려 여행을 실패하게 만드는 원흉이 된다는 사실을 몸소 깨달았기 때문이다. 특히 나처럼 계획대로 되지 않으면 스트레스를 받는 J에게 정해둔 목적이 달성되지 않았을 때의 허탈감과 불안감은 오히려 새로운 발견의 눈을 차단한다. 어떤 여행지든 꼭 뭘 해야 하거나 꼭 먹어야 하는 것은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잠시 망각했을 뿐이다. 남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참고일 뿐, 여행지에서의 나의 감정, 상황에는 무수한 변수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설사 남들이 다 하는 것을 못한다 한들, 인생을 잘못 산 건 아니지 않나요? 우리의 인생이 그렇듯 남들이 정해놓은 여정을 따라갈 필요가 있을까요? 같은 여행지라도 우리에게 모두 각각의 목적이 있고, 길이 있고 그렇기에 결국 각자의 여행지일 뿐이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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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말입니다, 후쿠오카 가면 츠케멘은 꼭 드세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