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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밤 Feb 11. 2023

니가 왜 식기세척기가 필요하냐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식구라고는 달랑 갓난쟁이 하나랑 두 부부인데 니가 왜 식기세척기가 필요하냐!

라고 '엄마'가 말씀하셨다. 한.... 25? 26년 전쯤에.

소제목에 나온 '어머니'는 시어머니가 아니라 내 '친엄마'

1기 신도시 좁은 주공아파트, 좁다란 주방 한 켠 아래쪽 싱크를 떼어내고 12인용 동양매직 식기세척기를 설치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그때 엄마가 그 자리에 계셨었다.

기계를 설치하고 계신 기사님도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데시벨로 엄마는 저렇게 나에게 말씀하셨다.

그때만 해도 젊다 못해 어렸던 나는 황급히 입술에 검지 손가락을 가져가서 입을 오므리고

"쉿! 쉬잇!, 아우 조용히 좀 해. 들리겠어" 하면서 엄마를 진정시켰다.


내가 식기세척기가 왜 필요하냐 하면, 엄마, 나는 설거지가 너무너무 싫기 때문이야


내 설명을 들으신 엄마는 듣자마자 더 흥분하셨다.

세상에, 살림하는 여자가 설거지가 싫다니, 아니, 세상에 설거지를 좋아서 하는 여자도 있다니? 살림이 좋아서 하나? 해야만 하니까 하지 등등 블라블라 아니, 세 식구 설거지가 나오면 얼마나 나온다고, 먹자마자 싹 씻으면 간단할 것을. 나 옛날엔 그 많은 대식구들 설거지를 블라블라 따뜻한 물이 어딨어 블라블라 나 때는 블라 그때는 블라 라떼는 블라


눈알을 돌리고 딴청을 한참 피우다가 레퍼토리도 다 떨어지신 것 같을 때쯤 말대답을 퐁당! 했다.


엄마, 요즘은 아무도 방비로 방 안 쓸지? 빨래는? 세탁기가 하지? 난 내가 집안일 중 가장 싫어하는 설거지를 기계에게 시키겠어. 설거지를 하다보면 속이 울렁거려. 식기세척기는 행복 아이템이야. 우리 부부에게 행복과 평화를 가져다줄 것이야. 흠흠.


엄마의 잔소리가 조금 더 이어졌지만 나는 상관하지 않았다. 나의 예상대로 식기세척기는 나에게, 우리 부부에게 행복과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그러다가 몇 년 뒤 여차저차 미국 동남부 어느 시골 대학촌, 어느 기숙사에 이사를 들어왔는데

어머?

식기세척기 어딨어? 뭐야 왜 주방에 식기세척기가 없어? 왜? 왜? 미국엔 다 있는 거 아니었어?

기숙사 주방에 식기세척기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얼마나 당황을 했던지 나는 곧바로 학교 건물관리 오피스로 직진했다. 

영어도 떠뜸떠듬 잘하지도 못하던 상태였는데. 내 행복 아이템이 없다니 안될 일이었다.

우리 가족한테 배정된 유닛에 '디쉬워셔'가 없어요. 없다고. 왜 없냐고오요.

학교 시설물 관리 담당자는 나 때문에 조금 당황한 듯 보였다. 영어도 떠듬거리는 중국여자로 추정(?)되는 여자가 다짜고짜 들어와 디쉬워셔 타령을 하고 있으니 뭐라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허둥거렸다.

그의 대답은 아주 간단했다. 

'그냥 없어, 원래 없어, 그쪽 다른 유닛들 대부분 없어. 있는 유닛도 있지만 여하튼 너네 유닛엔 없어'

아.... 그래.. 내 행복 아이템은 이제 여기에 없구나. 

실망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 집과 얇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둔 '에릭'네 식구들이 앞마당에 나와 저녁 공기를 쐬고 있었다. 저 친구에게도 좀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너네 집에는 디쉬워셔가 있니?

응? 응! 아무렴 있지!

아아.... 그랬구나. 너네 집엔 달려 있었구나. 난 왜 하필 안 달려있는 유닛일까.. 아아...


에릭은 일그러진 내 얼굴을 보고 해맑게 웃고 두 손을 귀 높이로 올린 후 반짝반짝 작은 별 노래 율동처럼 귀엽게 흔들면서 이렇게 말했다.

여깄잖아. 우리 집 디쉬워셔. 여기, 두 개. 두 손


오늘은 긴 하루였어. 에릭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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