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이 다가오면 어머니는 마전장에 다녀오셨다. 장에 간 어머니는 가래떡부터 옥고시 한 자루에 우리의 설빔까지 양손 가득 행복을 안고 돌아오셨다. 어머니는 아무리 삶이 팍팍해도 설 때만큼은 우리 다섯 자매에게 꼭 설빔을 마련해 주셨다. 주머니가 가벼운 어머니의 미안한 마음이 그것에 얼마간 녹아있었을 것이다.
그 무렵이면 우리 집뿐 아니라 마을 전체가 시끌벅적했다. 마을 한복판 냇가 바위 위에서는 동네 아저씨들이 돼지를 잡았다. 어린아이들이 보면 안 된다고 해서 우리는 집 밖으로 나가지 못했지만 온 동네를 울리던 돼지 멱따는 소리는 아직도 또렷하게 내 귀청을 흔든다.
설을 맞이하며 어머니는‘고무 다라’에 뜨거운 물을 받아 우리의 때를 불리고 한 명씩 ‘이태리타올’로 등이 벌게지도록 닦았다. 개집 뒤에 둔덕처럼 쌓여있던 잿더미도 치워지고 구멍 송송 뚫린 방문도 창호지로 발라졌다. 어머니는 창호지 중간에 말린 꽃잎을 넣어 멋을 부리기도 했는데, 어느새 누렇게 변할 걸 알았기에 나는 새 방문을 아끼는 마음으로 바라보고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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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하고 단촐한 설을 보내며 온 마을이 축제의 장 같았던 내 어린 날의 설이 그리워지곤 했다. 새언니들과 어머니와 큰어머니의 노고가 있었기에 우리가 즐길 수 있는 명절이었다는 것을 이제는 너무나 절실히 잘 안다. 그럼에도 목울대가 울렁거리는 이 진한 그리움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내 어린 날의 동화라서일까, 아니면 내가 누렸던 풍만한 행복감을 우리 아이들은 끝내 누려보지 못할 것이라는 아쉬움 때문일까. 잘 모르겠다. 다만 아직도 명절이 돌아오면 ‘깨갱깽깽’ 꽹과리 소리가 내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