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원 Mar 18. 2022

그런 게 어디 있어!

“그래, 무슨 말인지 알았다. 어쨌든 집에 와서 얘기해라. 아버지도 알아야 하니까”     


베란다 밖으로 목련꽃이 만개하고 라일락 향이 감질나게 유혹하던 날이었다. 사업으로 곤경에 처한 남편에게 자금이 급하게 필요했고 촉박한 시간으로 은행 대출을 알아보는 게 쉽지 않았다. 다방면으로 수소문하던 중에 아파트 재개발로 시세차익을 남긴 부모님 재산이 생각났다. 그리고 감히 융통할 수 있을 거라는 어리석은 생각까지 했다.    

  

언니 내외가 힘들었을 때도 도와주지 않았던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엄마의 반응이 미덥지 않았지만, 이것저것 따질 시간이 없었다. 그동안의 내 신용을 본다면 문제가 쉽게 해결될 것 같았지만, 언니에게 했던 처사를 보면 그리 만만한 일도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흔쾌히 집으로 오라는 엄마의 말이 긍정과 불안을 꼬아놓은 동아줄 같았다.      


움직이는 차 안은 거대한 양팔 저울처럼 흔들렸다.  가능성을 점치며 40분을 달리는 동안 기대치가 높은 남편의 생각도 끌어내려야 했다. 안 된다는 예상을 깨고 허락이라는 반전의 보너스를 받고 싶은 심정이 더 컸기 때문이다.

© tingeyinjurylawfirm, 출처 Unsplash

아침을 건너뛰고 점심도 먹지 못한 탓에 앉아있는데도 다리가 후들거렸다. 허기짐보다는 큰일을 앞둔 긴장감이 떨림을 더 부추긴 것 같았다. 아파트 입구에 다다르자 그래도 빈손으로 가는 건 아니라며 남편은 상가에 들어가 과일을 사 들고 나왔다. 현관 입구에 가깝게 주차를 하고 남편보다 앞서 걸었다. 아니 뛰었다.     

3층이라 보안장치를 한 건지 아니면 스티커만 붙인 건지 모르겠지만 못 보던 보안업체의 빨간 스티커가 눈에 들어왔다. 벨을 누르자 ‘삐리리’하고 안에서 벨 소리가 들렸다. 소음이 있는 밖에서도 들렸는데 안에서는 인기척이 나질 않았다. 연거푸 두 번 더 벨을 눌렀다. 갑자기 초조해졌다. 철문을 두드리며 엄마를 여러 번 불렀다. 한 번에 안 열리는 문이 열 번을 부른다고 열리진 않았다.

     

예감은 적중했고 다리는 풀렸고 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화나고, 기막히고, 남편 보기도 창피하고 내 맘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벌게진 얼굴로 남편의 손을 우악스럽게 잡고 내려왔다. 참았던 분노는 차에 오르자 대성통곡으로 폭발했다. 영문을 모르는 남편은 곧 들어오실 거라는 말만 했다. 우리와의 약속을 잊고 산책하러 나갔다는 말로 기다리고 싶었겠지만 난 이미 아닌 걸 알고 있었다.

“이럴 거면 전화로 못 해주겠다고 하지. 왜 여기까지 오게 해. 어떻게 나한테 이래!”

이 말조차 남편은 알아듣지 못했다. 그의 입장에선 그럴 수 있다고 예측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년이 지났다. 겨울 끝자락이지만 창문을 열어도 춥지 않았다. 오히려 살짝 드는 찬기가 정신을 맑게 했다. 베란다에서 보이는 초등학교 운동장엔 1학년 입학생들이 꼬물거렸고 교문 밖은 마중 나온 학부모와 자가용으로 어수선했다.

‘하이고, 저 애들은 언제 크려나.’

남의 일에 참견하듯 한 생각은 커피잔을 놓을 때까지였다.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산책도 하고 취미생활도 하게 됐다. 말끔하게 정리된 집안을 뒤로하고 밖으로 나왔다. 바싹 마른 화단이 흙먼지를 만들면 봄바람이 사방으로 흩뿌렸다. 아파트 단지 사이로 길게 뻗은 가로수엔 새순이 돋기 시작했고 도로 경계선에 있는 개나리 나무엔 껍질눈도 뚜렷하게 나타났다.    

 

© HeungSoon, 출처 Pixabay

01번 마을버스가 신호등에 걸렸다. 차창 너머로 봄이 느껴졌고 길 건너 아파트 화단에 할머니 한 분이 앉아계셨다. 희끗한 단발머리에 벙거지를 쓰고 누빔 옷을 걸친 모습에서 엄마가 보였다. 1년이 넘도록 전화도 하지 않고 매몰차게 왕래도 끊었던  내가 어르신 모습을 보며 가슴이 불편해졌다.      


“엄마, 나.”

“.......”

“이번 아빠 생일에 갈게”     


엄마가 돌아가신 지 삼 년째다. 덜 익은 슬픔으로 엄마란 단어를 꺼내지 못했다. 봄볕에 연상되는 것을  욱여넣어야 했고, 평양냉면 그릇에 얼굴을 묻고 그리움을 참아야 했다.     


“ㅇㅇ아, 미안하다”

마지막이라고 예측도 하지 못한 날에 엄마가 내게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엄마는 다 놓고 간 걸까, 다 가져간 걸까?

상처는 남았는데 아픔은 찾을 수 없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