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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원 Sep 04. 2022

그중에 만난

"이번 열차는 신설동. 신설동행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2호선을 타고 다닐 때 열차의 출입문이 열리면 가끔 들렸던 소리였다. 그날은 내가 왜 신설동으로 가려고 했는지 기억나지 않았지만 난 그 방향으로 서 있었고 주변은 평소처럼 어수선했다.

두껍게 칠해진 노란색 안전선과 등 뒤로 지나가는 순환선 열차의 초록색이 눈에 들어왔다. 노랑, 초록은 연거푸 떠오르더니 봄꽃을 만들었다.  

곧이어 열차가 들어온다는 방송이 서너 번 들렸지만, 열차는 쉽사리 나타나지 않았다. 순간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며 탑승하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지만 이내 안개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보이지 않던 열차는 언제 도착했는지 유령처럼 내 앞에 멈춰 서 있었다. 출입문을 개방한 4량짜리 열차는 통째로 입을 벌린 채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 섬뜩함과 달리 안전선 밖에서 보이는 열차 안은 유난히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였을까? 밖에 서 있던 내 온기도 훈훈해지는 것 같아 고개를 돌리는 순간 커다란 호랑이와 눈이 마주쳤다.

백두산 호랑이처럼 머리가 크고 귓바퀴는 짧고 둥글었다. 등 쪽은 노란빛을 띤 갈색 털이었으며 검은색 가로 줄무늬가 선명해 세차 보였지만 굵은 앞다리를 모으고 앉은 모습은 날 마중하러 나온듯했다. 섣부르지 않게 호랑이에게 다가가는 내 발걸음이 조금씩 흔들렸다.

내게 곁을 내준 호랑이는 시선을 떼지 않으면서 두툼하고 긴 꼬리를 들어 올려 나를 감싸 안았다. 동그랗게 말린 꼬리는 생각보다 길고 무게감이 느껴졌지만 부드럽고 포근했다.

그리고 6년이 지났다.      

© CoolPubilcDomains, 출처 OGQ

길을 걷고 있었다. 요즘처럼 포장이 잘 된 도로가 아니어서 까만 구두가 흙먼지를 뒤집어썼다. 얼마나 걸었을까? 한 사람이 양팔을 벌리면 맞은편 담벼락에 손이 닿을 것 같은 좁은 골목이 나왔다.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그 길을 따라 걷다 보니 마당에 국수가 널린 집이 나왔고 이발소 표시등이 빙글빙글 도는 곳에서 대머리 아저씨가 나왔다. 그리고 길이 사라졌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나오는 ‘체셔 고양이’처럼 사라진 길이 다시 보이고 흐려졌다. 그곳을 벗어나자 갈래 길이 나왔고 코너쯤에 내가 좋아했던 문구점이 보였다. 그곳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불량식품보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진귀한 물건들이 더 많았다. 오래된 지구본이나 망원경, 낡은 나침반과 지도 같은 것들이 유리 장식장과 높은 선반 위에 놓여 있었다. 문구점 아저씨는 그것들을 자랑처럼 얘기했지만 손쉽게 꺼내거나 만지게 하지 않았다.

문구점을 나와 다시 또 걸었다. 오래도록 걸어서인지 다리가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았다. 학교 수업이 끝난 모양이다. 재잘거리는 애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그들을 따라갔다. 그곳도 낯익었다. 삭막하게 비워진 공터가 나왔고 어느 집 개인지 컹컹 짖는 소리가 무섭게 들렸다. 그 소리 때문이었을까? 애들은 전력을 다해 뛰기 시작했다. 비명을 지르는 것 같기도 했고 숨넘어가게 웃는 소리 같기도 했다. 이내 아이들은 내 시야에서 멀어졌다.

“어느 놈이야!”

대문을 박차고 나온 아저씨는 반바지에 늘어진 러닝셔츠를 입고 슬리퍼를 끌고 나왔다. 왼손에는 빨랫방망이 같은 게 들려있었지만 그렇게까지 위협적으로 보이진 않았다.

초인종을 누르고 도망간 아이들은 흙먼지 속으로 사라졌고 장난친 아이들을 잡진 못한 어른은 혼잣말을 하며 철문 안으로 들어갔다.

좁고 길었던 골목이 사라졌다. 뒤통수를 잡아당기는 느낌이 들면서 발걸음이 굳어 움직일 수 없었다. 꿈속에서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뉘 집인지 알 수 없으나 양쪽으로 세워진 담벼락은 정갈했고 서너 개의 계단 위로 세워진 대문은 웅장하고 깔끔했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 사자가 있었다. 얼핏 보면 강한 햇살에 반사되는 큰 무엇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건 분명 사자였다. 잘 다듬어진 하얀 갈기는 섬광처럼 빛났고 예사롭지 않은 자태로 앉았지만 포효하지 않던 사자의 그 모습은 듬직하고 단단했다.

© krummel, 출처 Unsplash

꿈은 신기한 일이었다.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선명하게 나타나고 그 꿈이 가리키는 상징이 대체로 맞아떨어진다는 것이. 

만남에서 끝난 호랑이와 사자는 태몽으로 그럴싸한 딸과 아들을 내게 선사했다. 

6년 터울인 사자는 엄마보다 호랑이를 더 무서워하며 자랐다. 유독 남자가 많은 집안 내라서 그랬던 건지, 누나와 동생으로서 서열정리를 한 건지 모르겠지만 어찌 됐건 결과론적으로 큰 부딪힘 없이 잘 자랐다. 

아이들의 의중을 몰라 내 뜻으로만 키웠던 그 시절도 무탈하게 자라준 게 고마웠지만, 성인으로써 본인의 의지와 능력을 발휘하고 있는 지금의 모습이 더 대견하고 늠름하기까지 해 감사할 뿐이다.      


지금도 꿈을 꾼다. 예지몽처럼 현실에 맞는 꿈도 있지만 대부분 꿈은 꿈이었다.

어쩌면 우리는 일생을 상징의 의미를 찾아 헤매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잠깐 해봤지만,

그저 나만의 19호실이라고 결론짓고 말았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고래가 사는 세상이 상징인 것처럼  

누구나 마음에  하나씩 갖고 있는 나만의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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