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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굴비 Sep 24. 2015

하리보 정치학개론

하리보 젤리는 개인을 뛰어넘는 시스템이다


하리보 젤리는 맛있다. 1922년 '하리보'를 설립한 독일인 '한스 리겔'은 100년 후 바다 건너 대한민국까지 하리보 추종자가 생길 줄은 몰랐을 것이다. '꼬마곰젤리'를 연상하게 하는 다양한 색깔의 귀여운 곰 모양 젤리는 촉감이 고양이 발바닥을 만지는 것처럼 말랑말랑하다. 하리보 젤리를 먹으면, 쫄깃한 식감이 입안에서 사라질 때 까지 그 탄성을 잃지 않는다. 무엇보다 하리보 젤리는 천연 착신료와 천연과즙을 사용해 씹을수록 짙어지는 단맛과 산미가 느껴진다. "내가 그동안 먹었던 젤리들은 밀가루 맛이 나는 고무였구나"라고 생각될 정도로 하리보는 궤를 같이 하되, 격이 다른 젤리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하리보 젤리를 한 봉지만 쥐면, 우리 고시반 친구들을 모두 노예로 만들 수 있을 있겠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하리보 젤리를 싫어할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언론고시반 글쓰기 스터디 현장에 나와있다. 모두들 '논제'를 글로 풀기 위해서, 저녁밥도 굶고 글쓰기에 매진하는 시간이다. 조금 일찍 스터디룸에 들어온 나는, 같이 있었던 동원이와 은진이에게 하리보 젤리를 2마리씩 건네주었다. 다들 "글쓰기 준비로 배도 고프고, 머리도 아프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또 1마리씩 추가로 건네주었다. 하리보 젤리가 선사하는 입 안의 행복은 짧다. 나는 그들이 이후에도 하리보 젤리를 생각했으리라 확신했다. 나 또한 스터디 내내 하리보 젤리가 먹고 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하리보 젤리를 더 나눠주고 싶었지만, 언론고시반 모두가 스터디룸에 들어왔다. 그리고 내 수중에는 그들에게 모두 나눠줄 정도로 하리보 젤리가 남아있지 않았다. 때문에 하리보 젤리가 선사하는 미각의 행복은, 나중에 나 혼자 차지해야겠다는 이기적인 생각을 했다.


그런데 글쓰기 중에 옆자리에 앉은 명진이가, 내 외투를 빌려 입고 스터디룸을 나갔다. 나는 놀랐다. 외투 주머니에는 카드와 현금, 중요한 메모를 해놓은 종이 쪼가리가 있었지만... 그보다 하리보 젤리 걱정이 더욱 컸다. "그렇게 중요한 물건은 바지 주머니에 넣는 것이었는데" 하리보 젤리를 떠나보낸 나는 자리에 앉아 도무지 글을 쓸 수 없었다. 대신에 이래서 금 같은 것은 은행에 맡기기가 꺼려지는구나, 이래서 권력은 한 번 쥐면 놓지 못하는 것이구나... 이런 생각들을 했다. 하지만 명진이는 글쓰기 스터디의 사람들을 위해 추위를 헤치고 음료수를 사왔다. 오직 하리보 젤리 생각뿐인 내가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정치를 하려면 이런 친구에게 시켜야지, 나는 안 될 것 같다. 정치를 하려면, 하리보 젤리의 맛을 보기 전에 사람들과 나눠야 한다.


스터디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하리보를 분배하는 방법을 생각해 보았다. "이렇게 맛있는 행복을 모두에게, 만족할 만큼 나눠주는 것이 가능할까?" 글을 쓸 때는 사회의 거물들을 향해 "모두에게 분배해야 한다"라고 말했던 사람이 겨우 꼬마곰 모양 젤리를 놓지 못한다는 것이 우스웠다. 하리보 젤리가 여러 사람이 모두 먹고도 질려서 남을 만큼 많은 양이었다면 좋겠지만, 사회적으로 귀한 것의 양은 한정되어 있다. 필요한 자에게 차등 지급하는 방법도, 또는 아예 알아서 사먹으라며 개인주의로 놓는 방법도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모두 만족할 답이 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위탁을 해도 하리보 젤리를 맛보는 순간, 더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모두가 만족할 분배를 하지 못할 것이 뻔했다.


내 안의 논쟁이 길어질수록 하리보 젤리는 한 마리씩 입 속으로 사라졌고, 그 속도도 점점 빨라졌다. 15분 남짓을 걸어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하리보 젤리는 사라지고, 그것을 담았던 빈 껍데기만이 남아있었다. "이토록 허망한 것을" 멈추고 싶었지만 멈출 수 없었고, 나누고 싶었지만 내 이득에 나눌 수 없었다. 나는 하리보 젤리라는 작은 권력에 취해서, 뭐라도 된 듯이 혼자 기뻐하고, 전전긍긍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일종의 회의감을 느끼며, 이 작은 꼬마곰 모양 젤리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하리보 젤리는 100년이 가까운 시간, 바다 건너 한국까지 영향력을 선보이는 개인을 뛰어넘는 시스템이다.  하리보 젤리는 점점 더 맛있어지고, 많은 사람들에게 "이걸 나눠먹을까, 혼자 먹을까"하는 가짜 권력을 선물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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