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이 모든 이유가 어지러이 뒤섞여 있으리라 생각한다.
추석이었다. 나는 그때 혈혈단신 서울살이의 외로움과 첫 직장에서의 스트레스로 매일을 울며 보내고 있었다. 그런 내게 추석은 입사 후 첫 명절이었고, 평생 떨어져 산 적 없던 가족과 떨어져 지내다 두 달 만에 얼굴을 보는 날이었다. 어느 때보다도 들떴다. 출근이 열 시라 퇴근이 늦고, 집까지 4시간이 걸리는데도 불구하고 하룻밤도 더 견디지 못하고 퇴근하자마자 짐을 챙겨 집으로 내려갔으니까. 새벽에야 도착한 나는 오랜만에 만나는 '내 침대'에서 잠을 청했고, 다음 날 진짜 '내 방'에서 눈을 뜨고는 괜히 혼자 벅차올랐다. 거실에는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부모님이 있었고, 또 건넌방에는 아직 자고 있는 동생이 있었다. 내가 팔이 빠져라 가지고 내려온 명절 선물들은 침대 발치에 잘 숨겨져 있었다. 완벽한 명절의 시작이었다.
첫날은 친구를 만나 밀린 수다를 떨었다. 힘들어서 죽을 것 같다며 온갖 너스레를 떨고, 준비해 온 선물을 주고 취업 턱까지 냈다. 사진으로만 보던 친구의 강아지와 산책도 했다. 잘 놀고 널브러져 다음날 눈을 뜨니 LA갈비를 한가득 해놓은 아빠가 상을 차리고 있었다. 또 좋아서 뒤집어졌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 밥을 먹었다. 배부르게 먹고 나서는 동생과 근처 동네 곳곳을 돌아다니며 놀았다. 영화를 보고, 방탈출을 하고, 카페에서 아포가토를 먹으며 같이 드라마도 봤다.
익숙한 곳에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경계심 하나 없이 편안하게 있을 수 있다니. 뭘 하든 눈치 보지 않아도 된다니. 이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내 휴일은 너무나도 완벽해서 무언가 불안할 정도였다.
삼 일째 되는 날이었다. 다른 계획은 없고, 저녁까지 집에서 뒹굴다 가족끼리 외식을 하고 영화를 볼 셈이었다. 내가 취업 기념으로 처음으로 가족들에게 '한턱내기로' 한 것이었고, 한식 코스 요리가 꽤 괜찮게 나오는 식당을 예약해두기까지 했다. 영화도 명절 이벤트로 동생과 싸게 잘 예매해 오늘도 완벽한 저녁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권태롭게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소파를 뒹굴며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안방에서 전화가 울렸다. 조금 있으면 끊어지겠거니 했는데, 도저히 끊기질 않았다. 시끄러움을 참지 못하고 안방으로 들어가 자고 있는 아빠 옆에 놓인 핸드폰을 봤다. 둘째 큰아빠였다. 또 김치 가져다주는 건가? 심드렁하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 이월이냐.
네.
아빠는. 자냐?
네.
할머니 돌아가셨다.
네? 물음은 아니었다. 큰아빠는 덤덤히 말했다. 지금 첫째 큰아빠랑 위에서 내려오고 있으니까, 광주에서 장례 치를 거니까 아홉 시쯤까지 맞춰서 어디로 와라. 아빠 깨워서 말하고. 네, 네. 얼이 빠진 채로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화장실 문을 벌컥 열어젖히니 엄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야, 볼일 보잖아. 왜?
할머니 돌아가셨대.
어? ……진짜?
거실에 대자로 누워 텔레비전을 보던 동생도 벌떡 일어나 나를 쳐다봤다. 겨우 고개를 끄덕이고 아빠를 깨워야 하나 싶어 안방 쪽을 쳐다보는데, 어느새 일어난 아빠가 침대 맡에 걸터앉아 있었다. 잠에서 깬 평소 같은 얼굴로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어딘지 다른 표정이었다. 아주 미묘하게.
어떡해. 얼른 옷 입어라, 너희. 아니지. 지금 가면 되나?
아니, 아홉 시까지 오래.
아, 그래, 아홉 시. 그러면…… 저녁 예약, 그거. 영화도 안 되겠네. 얼른 취소해라.
화장실을 나와 허둥대는 엄마와 달리 아빠는 목석처럼 거기 그대로 앉아 있었다. 동생과 나는 저녁 예약을 취소했고, 영화는 취소가 안 되어 그냥 두었다. 엄마는 짐을 가져갈 가방을 찾았다. 그럴 동안도 가만히 있던 아빠는 버퍼링이 풀린 사람처럼 한순간 마른세수를 하고 머리를 잔뜩 헤집으며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어디로 오래?
우리는 아홉 시쯤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상담실이라는 공간에 첫째 큰아빠 부부와 둘째 큰아빠가 먼저 와 있었다. 조용히 인사를 하고 앉아 있으니 장례식장 직원이 커다란 검은색 차트를 들고 와서 내 옆으로 앉았다. 일단 오실 수 있는 분들은 다 오신 거죠? 그러더니 질문을 던지며 차트를 하나하나 체크해나가기 시작했다.
온갖 선택지들이 쏟아졌다. 특실로 할 건지, 일반실로 할 건지부터 꽃은 얼마짜리 패키지로 할 건지, 관은 어떤 나무로 할 건지, 하다못해 국은 된장국을 할 건지 육개장을 할 건지……. 된장국이 단가가 더 싸긴 하거든요. 요즘 많이 하는 추세고. 나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직원 바로 옆에서 바쁜 손놀림을 보고 있었다.
현실은 차가웠다. 사람이 죽었는데,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여기 있는 사람들의 엄마가 돌아가셨는데 우리는 할머니의 마지막 얼굴을 보기도 전에 어디에 얼마나 돈을 쓸지를 먼저 계산해야 했다. 차트의 절반쯤 지났을까, 내내 차트와 큰아빠들 쪽만 번갈아 보던 직원은 처음으로 나와 동생에게 눈을 돌리고 말했다. 다음은 식당 이모님들 쓰실지 선택하셔야 하는데요. 시급 구천 원 주셔야 하고, 오전에 와서 저녁에 가시는 걸로 이틀 보통 쓰시는데 여기 손녀분들이 하실 거면 안 쓰셔도 되고요. 어른들은 우리를 한 번 쳐다보고 대답했다. 그냥 씁시다.
꼭 해야 하는 절차인데, 아는데. 귀를 꼭 틀어막고 자리를 피해버리고 싶었다.
특실에서는 묘한 비린내가 났다. 오랜 시간 축적되어 온 장소의 고질적인 냄새 같았다. 장례식장 한가운데에는 아직 꽃이 도착하지 않아 덩그러니 할머니의 사진만 있었다. 아침 일찍 온 고모들은 수다를 떨고 있었다. 엄마 저 사진 언제 찍은 거야? 누가 오긴 오려나, 코로나 때문에. 뭐 그런 얘기들이 간간이 귀에 들려왔다. 고모부들은 따로 모여 앉아 이야기를 하다 몇몇이서 담배를 태우러 갔다. 큰아빠들과 아빠, 또 큰엄마들과 엄마는 그 사이 어딘가에 끼어 함께 떠들었다가, 웃었다가 그랬다.
'응답하라 1988'이라는 드라마를 열심히 봤었다.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었는데, 주인공 덕선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덕선은 조퇴를 하고 엉엉 울며 언니, 동생과 함께 장례식장에 갔다. 아빠가 울고 있을까 봐 걱정하며 들어선 장례식장 안은 시장통이 따로 없었다. 다들 왁자지껄 떠들며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 안에서 가장 요란하게 웃고 있는 것은 덕선의 아빠였다.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하고 덕선이 말했다.
여기 초상집 맞아? 잔칫집 같은데?
우리도 그랬다. 잔치까지는 아니더라도 대단한 곡소리나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아무도 울지 않았다. 모두들 조용히 조문을 했고, 조문하는 곳 맞은편에 있는 식당에서는 수육에 된장국을 먹으며 오랜만에 만난 일가친척, 친구, 지인들과 시끌벅적하게 근황을 나누고 안부를 물었다. 그게 이질적이면서도 자연스러웠다. 나와 동생은 그새 많이 컸네, 살이 쪘네, 졸업을 했네 안 했네, 취업은 어디로 했네……. 의례적으로 쏟아지는 관심 속에서 머쓱해 하며 이 테이블 저 테이블 불려 다녔다. 아빠의 친구의 사돈의 팔촌을 다 만났고 기억도 안 나는 사촌 오빠들은 어디서 하나씩 등장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점점 더 실감이 나야 하는데, 어째 점점 더 현실감이 옅어지는 것 같았다.
이틀이란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지나갔다. 할머니의 이름 석 자를 가장 많이 본 날들이었고, 할머니의 세례명이 요안나라는 사실을 처음 안 날이 있었다. 다만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뿐, 시간이 빨리 흐르지는 않았다. 장례식장 이후로도 유골함을 안치하기까지 몇 단계를 더 거쳐야 한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으니까. 사람이 밀렸다는 추모공원에 화장하러 들어가는 데 두 시간, 화장하는 데에 한 시간 반……. 대기와 대기의 연속이었다. 고단해져 졸기도 자주 졸았다. 엄마는 조용히 나를 걱정했다. 고생해서 일하다가 명절이라 모처럼 가족들 얼굴 보고 쉬러 왔는데 피곤해서 어떡하냐고.
그 생각을 아예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할머니는 휴일을 3일 남기고 돌아가셨고, 우리 회사는 조부모상에 휴일 포함 3일을 휴가로 주고 있었다. 사람이 죽었는데 국 종류를 고르는 것에는 환멸을 느낀 주제에 나는 돌아서서 휴일을 계산하고 속상해했다. 가족들에게 보란 듯이 맛있는 밥을 사고 선물을 주며 뿌듯함을 느낄 저녁이, 우리 넷이 함께 영화를 보고 즐거워할 시간이 사라진 것을 속상해했다. 황금 같은 명절의 절반밖에 쉴 수 없음에 한숨 쉬었다.
내가 태연한 얼굴로 국을 고르고 관을 고르던 어른들을 낯설고 멀게 느낄 자격이 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유골함은 아주 하얗고 품 안에 가볍게 들어왔다. 아니, 그런 것처럼 보였다. 나는 들 수 없었으니까. 외국에서 지내는 장손, 첫째 큰아빠의 아들은 코로나로 들어오지 못했고 관을 옮기는 것도, 영정 사진을 드는 것도, 유골함을 들고 앞장서는 것도 모두 고모의 아들인 사촌 오빠가 해야 했다. 친척 한 분이 말했다.
그렇게 좋아하던 장손은 결국 오지도 못하고, 손녀들만 삼 일 내내 자리 지키네.
쓰게 웃었다. 할머니가 내 손등을 토닥이며 가끔 하던 말을 떠올렸다. 예쁜 우리 강아지, 그래도 니가 남자로 태어나야 했는데. 우리 막둥이 아들로 태어났으면 좋은데. 할머니는 가장 아끼던 7남매 중 막내아들, 우리 아빠에게서 정말 아들을 보고 싶어했다고 했다. 나를 예뻐하긴 했지만 딸은 딸이고 아들은 아들이었던 거다.
그런 귀한 막내아들에게서 딸 둘을 낳아 어쩔 수 없이 평생을 눈치 보았을 엄마. 그런 엄마를 배려해 오래도록 명절마다 반쯤 어쩔 수 없이, 반쯤 고의로 근무 스케줄 탓에 시댁에 가지 않아도 별말 한 번 않던 아빠. 그런 부부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릴 때는 물론 다 자란 우리 앞에서도 대놓고 나와 동생의 좋은 점은 다 아빠를 닮았다고 좋아하고, 못난 점은 다 엄마를 닮았다고 욕하던 할머니.
이런 우리 가족의 풍경을 생각할 때면 나는 어찌할지 모르는 감정에 사로잡히곤 했었다. 엄마의 시어머니인 할머니와, 아빠의 엄마인 할머니와, 우리의 할머니인 할머니는 다 다른 사람 같았으니까. 좋은 사람은 아닌데 나쁜 사람은 더 아닌 할머니. 나쁜 사람이면서도 좋은 사람이기도 한 할머니.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체력도 한계에 다다랐다.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와 나는 중간중간 선잠을 청했다.
이제 여기 앞을 막으면 유골함을 못 보세요.
유골함은 마지막으로 보시는 거니까 다들 인사하세요.
추모공원 담당자가 말했다. 그 말에 여기저기서 울음이 터졌다. 고모들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산발적으로 들려왔다. 신음소리 같기도 했고 중얼거림 같기도 했다. 무슨 말인지 모를 그 속에서 엄마, 라는 단어만은 선명하게 들렸다. 마음이 울렁이기 시작했다. 담당자는 덧붙였다. 유골함이 아직 따뜻하니까 어머님이라고 생각하시고, 손 딱 잡고 말씀 나누세요. 큰고모부터 차례대로 유골함 옆으로 줄을 섰다.
고모들은 담당자의 말대로 유골함에 손을 얹고 울었다. 엄마, 잘 가. 엄마, 미안해. 일흔 여든의 고모들이 어린아이처럼 말하며 훌쩍이는 것이 어색했지만 눈물이 핑 돌았다. 입술을 꾹 깨물고 엉거주춤 근처에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자식이 7명이나 되는 할머니의 막내 손녀인 내 차례가 오려면 시간이 조금 걸렸다. 앞에는 아빠가 보이지 않았다. 아빠가 먼저 인사하는 게 맞을 것 같아 두리번거리며 찾는데, 뒤에서 어깨에 손이 올라왔다.
가서 인사해. 할머니 마지막으로 보는 거야.
내 등을 살짝 떠밀며 아빠가 말했다. 그때 아빠의 목소리에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물기가 어려 있었다. 아빠가 우는 건지 고개를 돌려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는 꼿꼿이 앞을 보고 서 있다가 엄마의 차례가 끝나자 그 뒤로 이끌리듯 따라 걸어갔다. 내 노트북 화면보다도 작은 한 칸짜리 사물함에 할머니가 있었다. 그게 할머니라는 게 도무지 와 닿지 않았다. 유골함 위로 두 손을 얹었다. 내 차례는 너무 늦게 왔고, 유골함은 이제 미지근해져 있었다. 뒤에서 여태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아빠가 생각났다. 아빠는 더 차가워진 유골함을 만지게 될 것이었다. 할머니에게 미안하게도, 아빠가 걱정되어 울컥 눈물이 났다.
할머니, 안녕히 가세요. 잘 가.
마음속으로 인사를 하고 나니 흰 바탕 위에 물감이 퍼지듯 듬성듬성, 아주 조금씩 실감이 났다.
우리는 그렇게 할머니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빠는 결국 울지 않았다. 어른이란 뭘까.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기에 울지 않을 수 있나. 얼마나 단단히 마음을 먹어야 그럴 수 있을까. 할머니가 아흔아홉이라고 해서, 오래도록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소리를 들어왔다고 해서 괜찮을 리는 없었다. 슬프지 않았을 리는 더더욱 없었다. 나는 아빠와 별 이야기를 다 하는 막역한 사이지만, 그 후로도 차마 묻지는 못했다.
내가 스물다섯이 아니라 다섯이었다면 망설이지 않고 아빠에게 물었을 텐데.
아빠, 아빠는 눈물 안 났어? 아빠는 안 힘들었어? 아빠는…… 엄마 안 보고 싶어?
나는 마흔, 쉰, 예순이 되고 일흔이 된대도 부모의 죽음 앞에 무딜 자신이 없다. 아니, 아직은 부모가 없는 내가 상상조차 되질 않는다. 다들 이때까지는, 언제까지는 나와 같이 생각하다 세월이 흘러 흘러 시간 따라 무뎌질 수 있게 되는 걸까. 아빠도 그중 하나인 걸까. 아니면 아빠는 우리 가족의 가장이니까, 든든한 기둥 같은 존재니까, 두 딸을 둔 말 그대로의 아빠니까 그저 열심히 참아낸 걸까. 잘 모르겠다.
아마도 이 모든 이유가 어지러이 뒤섞여 있으리라 생각한다.
정신이 온전치 않았을 때도 내 이름과 막둥이 큰딸, 소리 하나면 번쩍 나를 기억해주던 우리 할머니.
내가 준 싸구려 컵을 프린트가 닳아 벗겨지도록 쓰던 우리 할머니.
그런 할머니를 오래도록 기억할 테다. 할머니 집 냉장고 안의 보리차가 담긴 델몬트 유리병도, 저놈은 뭐 저렇게 생겼냐며 혀를 차면 우리가 자지러지던 그 날의 전국 노래자랑도, 우리가 온다고 하면 항상 사두셨던 백 원짜리 야쿠르트도, 나란히 누워서는 딱딱해서 못 베겠다며 어리광을 피우고 할머니에게 떠넘기던 나무 베개도……. 전부 잊지 않고 기억해야지. 할머니를 생각해야지.
할머니.
사흘 동안 제가 했던 아주 작은 원망일랑 용서하시고,
오래도록 조금은 미워했을 막내며느리도 이제는 예뻐해 주시고,
그렇게 우리 나중에 또 만나요.
할머니 보물 막내 아들한테는 제가 더 잘할게요.
너무너무 고생하셨어요. 사랑해요.
절대 우리 앞에선 내색 않는 아빠 대신 제가 전해 드려요.
꼬박 한 세기를 살아낸 나의 할머니이자,
아빠의 엄마를 보내드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