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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월 Nov 04. 2020

나를 좋아한다는 사람에게

지금 나를 좋아한다는 마음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냐고.

대학 시절 동아리 활동을 했다. 사실 늦다면 조금 늦은 시기였다. 스물두 살, 3학년이 되어서야 시작했으니까. 하지만 다행히도 동아리에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더 많았고, 나는 덕분에 어느새 고학년이 되었다는 부담을 나름 떨쳐낼 수 있었다. 동아리의 활동 대부분은 조를 짜서 운영진이 하는 교육을 듣고, 그들이 주는 과제를 해 오는 식이었다. 자연히 각자의 조원들과 더 친해질 수 있었고, 나는 그중에서도 한 살 많은 한 오빠와 친해지게 되었다.


물론 오빠라고 불렀다는 것은 아니다. 남자 형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평소 오랜 남사친이 있다거나 이성과의 교류가 잦은 편도 아니어서 내게는 '오빠'라는 호칭이 어색하다 못해 민망하고 창피했다. 더 솔직히 진짜 싫었다. (지금도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냥 말을 놓았다. 동아리 활동을 워낙 편하게 했고, 어쩌면 많은 '오빠'들이 웃으며 넘기는 걸로 허락했기에 나는 세 살 많은 오빠에게까지도 말을 놓고 지냈다. 그런 관계로 오빠가 아닌 Y로 그를 이야기하겠다.


괜히 사람 괴롭히고, 틱틱거리는 걸로 친밀감을 표현하는 성격인 내게 Y는 꽤나 잘 맞는 편이었다. 야! 하고 냅다 성질을 부리면 알았어, 알았어, 화내지 마, 하고 허허 웃으며 받아 주고, 어깨를 팍팍 때리면 때리는 대로 맞아 주는 Y가 편했다. 대부분의 즐거운 상황은 사실 모두 Y의 배려가 있었기에 가능했지만, 그걸 어렴풋이 알고도 나는 거기까지 일일이 고마워하는 일이 또 낯간지러워 그저 그 순간을 즐거워했다. 그러다 보니 심심할 때면 동아리방에 들러 Y부터 찾는 것도, 함께 앉아 장난을 치는 것도 점차 거리낌이 없어졌다.




언젠가부터 Y는 내게 전화를 했다. 평소 특별한 용건이 없으면 전화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전화를 받으면 (물론 어느 정도 가까운 사이라는 전제하에) '여보세요'가 아닌 '왜, 무슨 일이야'로 입을 떼곤 했으니까. 그런 내게 Y의 전화는 자주 뜬금없게 느껴졌고 종종 귀찮았지만 내가 귀찮아하는 기색이 보이면 '귀찮아? 끊을까? 그치만 서운해' 3연타의 반응을 보이며 시무룩해지는 Y가 웃겨서 곧잘 받았다.


하루는 오른손에 생겨난 습진이 심각해져 병원을 찾았다. 대충 의사에게 보여 주고 약만 받아 오면 될 줄 알았는데, 무슨 적외선 치료도 하고 연고도 바르고, 커다란 밴드에 붕대까지 감아 준다고 했다. 털레털레 치료실로 가서 차가운 베드에 걸터앉아 손바닥을 뒤집고 빨간 빛을 쬐고 있을 때, Y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른손잡이는 왼손으로 버겁게 전화를 받았다. 어, 왜. 그렇게 받는 전화에 Y는 또 어김없이 전화 좀 그렇게 안 받을 수 없겠냐고 투덜거렸다. 내 맘이야. 그렇게 대답하며 웃었다.


나는 손에 습진이 생긴 것부터 어찌어찌 병원에 오게 된 것, 대충 하고 가려다 그만 번거롭게 치료를 받고 있다는 걸 종알종알 모두 말했고, Y는 그걸 가만히 들으며 부지런히 리액션을 했다. 한참을 통화하던 중 적외선 기기의 불빛이 꺼졌고, 간호사가 들어왔다. 이만 끊자는 말에도 한참을 안 끊으면 안 되냐며 조르는 Y를 어르고 달래며 이따 또 전화해, 하고 끊었다. 이제 연고 바를게요. 멍하니 연고가 발리는 손바닥을 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방금 좀…… 과했다.


뭘 그렇게 시시콜콜한 걸 다 말했지. 후회가 물밀 듯이 몰려왔다. 내가 애도 아니고, 상대가 아빠도 아니고, 엄마도 아니고, 가족도, 연인도……. 아니, 무엇보다 내가 언제부터 전화 끊자는 소리에 냅다 끊어버리기는커녕 Y를 달래고 있었던 거지. 분명 '됐어, 귀찮아, 끊는다'의 3단 거절로 단호하게 끊기곤 했던 전화가 미적거리며 길어진 것이 어느새 꽤 되었음을 깨달았다.




눈치가 썩 없는 건 아니지만, 항상 눈치보다는 내 낮은 자존감이 이겼다. 설마 나를 좋아할까, 보다 설마 나 같은 걸 좋아할까, 가 앞섰다는 것이다. 나는 미묘해지고 길어지고 다정해지는 Y와의 통화, 그리고 관계를 애써 모른 척했다. 인지하고 싶지 않았다. 괜히 의식해서 착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날 좋아할 리가 없잖아. 나처럼 예쁘지도, 마르지도, 성격이 좋지도 않은 애를. 그렇게 생각하니 비로소 모든 게 내 착각이라고 느껴지며 속이 후련해졌다. 잠깐의 혼란이 지나간 뒤 나는 길어지는 통화에도, 달라지는 말투에도 자연스레 무뎌졌다.


얼마 후였다. 그날도 평소처럼 걸려온 전화를 받고, 정류장에서 내려 집까지 걸어가는 동안 통화를 했다. 늘 그렇듯 별 시답잖은 얘기였겠지. 나는 그날따라 무슨 이유에선지 집에 곧장 들어가지 않고 아파트 단지를 빙빙 돌며 통화를 이어갔다. 아파트 담벼락의 다듬어지지 않은 아스팔트 길을 따라 이백 미터가량을 서너 번 맴돌았을까, Y가 말했다. 나를 좋아한다고.


응? 머릿속이 멈췄다. 순간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솔직하게 당황이 아니었다. 착각을 접었다고 했지만 사실은 어쩌면 착각이 아님을 아는 일말의 촉, 혹은 나도 이성적으로 매력이 있는 사람이길 바라는 졸렬한 기대 따위였다. 주제 파악이라는 명목하에 두들겨 맞고 마음 한편에 구겨진 채 있던 그것들이 펄럭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봐라, 봐, 내 말이 맞지!' 아우성을 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아주 작은 예상조차도 빗겨나갔던 것이 있었다. 지금? 정말 지금?


타이밍이었다. 사실 그렇게 감정이 고백으로 튀어나오기에 우리는 자주 가까웠지만 많이 맞닿지는 못했다. 통화목록에는 Y의 번호가 꾸준했지만 Y와 함께 무언가를 한 기억은 많지 않았다. Y가 함께 밥을 먹자고, 카페에 가자고, 어디냐고 할 때마다 나는 집이었고, 이미 집 근처 카페였고 집에 가는 버스 안이었다. 통학 왕복 3시간의 집순이 대학생의 비애라면 비애였다. 그렇게 수시로 엇갈렸고, 아무리 잦은 통화라 한들 얼굴을 맞대는 것의 빈 자리를 채워줄 수는 없었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대답은 천천히 해 줘도 된다며 전화를 끊은 Y는 불과 한 시간 만에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조바심을 내는 모습에 웃음이 났지만, 마냥 웃기에는 함께 웃을 수 있는 대답을 할 생각이 없었다.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러자 Y는 괜찮다고 했다. 나는 덧붙였다. 처음 만난 이후, 그러니까 친해지고 나서는 처음으로 다시 오빠라고 부르면서.


오빠가 전역한 지 얼마 안 돼서 눈이 좀 낮아졌나 봐.

다시 생각해 봐,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어떻게 보면 무례한 거절이었다. 하지만 결단코 진심이었다. 나는 사회에 돌아온 지 이제 반년도 채 안 된 Y가 연애를 너무 하고 싶어서, 그런데 주변에 여자가 워낙 없어서 홧김에 나 같은 걸 좋아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도 한편으로 무례한 일인 걸 안다. 누군가의 감정을 쉽게, 그리고 가볍게 판단하고 무시하는 게 되니까. 하지만 거기까지 생각하기 이전에 나는 내가 좋아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가에 대해 요만큼의 확신도 없었다. 그래서 그랬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에도 나는 나를 영 사랑할 줄 몰랐고, 솔직히 지금도 누가 나를 좋아한다고 하면 비슷한 류의 대답을 꺼내 들 것 같다.


지금 나를 좋아한다는 마음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냐고.


내게 사랑은, 연애는, 누군가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듣는 것은 항상 그런 것이었다. 우려와 불안. 누가 봐도 예쁘지 않은 나를 왜 예쁘다고 하지. 언제까지 예쁘게 볼까. 언제까지 예쁠 수 있을까. 언젠가는 진짜 나를 보고 더는 예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될 텐데. 그럼 도망치고 싶어지지 않을까. 그렇게 도망가버리면, 내가 너무 비참하지 않을까. 커진 마음을 끌어안고 혼자 남겨져 울게 되지 않을까. 그럴 바에야 시작하지도 말아야지.


연애 같은 걸 하기에 나는 세상에서 나를 가장 미워하는 사람이었고, 생각이 너무 많은 사람이었다.




내가 왜 좋아?


나는 나를 사랑할 줄 모르는 주제에 나를 너무 아꼈다. 그래서 Y의 고백 직후 감히 이런 질문을 했다. 절반은 듣고 싶은 류의 대답이 있었고, 또 절반은 진심으로 이해가 가지 않아서 그랬다. Y는 쑥스러워하면서도 말했다. 내가 웃는 게 너무 좋다고. 내가 웃는데 니가 왜 좋아, 실없이 대꾸한 말에는 또 그랬다. 그냥. 그냥 좋아. 그리고,


너 웃을 때 얼마나 예쁜지 알아?


응, 알아. 다른 건 몰라도 하나는 확실하게 알았다. Y가 정말 눈이 어떻게 되었음을. 나는 웃을 때고 울 때고 예쁠 일이 없었다. 아주 객관적으로 그랬다. 그걸 다 알고도 순식간에 기분이 좋아졌다. Y는 그 뒤로도 한동안 본인에게만 진실일 거짓들을 계속해서 얘기해줬다. 나는 그걸 말리지 않았다. 아주 이기적인 짓이었다.


어둑한 밤길에는 사람이 지나가면 자동으로 켜지는 조그마한 센서등이 아파트 담벼락을 따라 매달려 있었다. 그것들은 더러 고장이 난 상태여서, 반짝, 반짝반짝, 규칙성이 없이 내 움직임에 반응했다. 그 모든 순간이 좋았다. 고백한 이를 좋아하지 않는데, 그래서 거절해야 하는데, 고백받던 순간만은 너무도 좋아 웃음이 나던 밤. 차마 누구에게는 말할 수 없는 그런 이기적인 밤.


그런 밤이 있었다. 이보다 더 절절하고 더 사랑스럽고 더 행복했던, 더 기억에 남는 밤은 많지만 순번이 밀릴지언정 쉽게 잊히지는 않을 또 하나의 밤이 그날 거기에 있었다.


나는 여전히 Y가 고맙다. 번호가 있음에도 연락은 하지 않지만, 앞으로도 할 일은 없겠지만 그럼에도 고마웠다. 아주 잠깐의 감정이라도 그렇게 이야기해줘서. 나는 감히 그 말을 여전히 고마워하고 있다고, 마음으로 전해주고 싶다. 예쁘지 않은 이를 예쁘다고 말해줬던 그 마음이 누군가를 어떻게 살아가게 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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