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더는 도망치기 위한 공상이 없어도 괜찮아.
어릴 적 나의 취미는 공상하기였다.
다른 말로는 뜬구름 잡기, 쓸데없는 생각 하기, 핑크빛 미래 꿈꾸기 정도로 말할 수 있겠다.
초등학교 고학년쯤부터였던 것 같다. 사실 내가 하는 공상 대부분은 '하늘을 날면 어떨까?'나 '세계 일주를 하고 싶다'와 같이 초자연적이거나 순수한 종류가 아니었다. 아주 현실적이고 탐욕적인 것이었다고나 할까. 대충 이런 식이다. 중학생이 되면 교복을 사겠지? 그럼 아주 예쁘게 치마를 줄이고, 머리도 허리까지 길러서 웨이브를 넣은 다음 하늘하늘하게 늘어뜨리고 다닐 거야. 촌스럽지 않게 예쁜 머리띠를 하고 다니고, 어울리는 가방도 새로 사야지. 신발도 운동화 말고 단화를 사서 신고 다닐 거야. 얼마나 깔끔하고 어른스럽고 예쁠까? 혼자 침대에 누워 이런 생각을 하며 싱글벙글 웃는 것이 내 삶의 작은 낙이었다.
현실에서 벗어난 공상도 물론 있었다. 가령 내가 이세계(異世界)의 공주고 여왕이라는 상상 정도. 이 공상의 시작은 <여왕의 기사>라는 만화 때문이었다. 여자아이들이 좋아하던 잡지에 연재되던 그 만화는 내게 그 세대가 돌아올 즈음에는 만화방에 단행본으로 나와 있었고, 나는 권당 200원인가를 주고 20권이 넘는 그걸 부지런히 빌려봤었다. 어린 나이의 내게는 아주 큰 투자였고, 그만큼 그 만화가 좋았다. 줄줄이 만화를 빌려 보며 주인공에 푹 빠져 주인공이 되는, 즉 여왕이 되는 공상도 꽤 오래 했다. 내 머릿속에서 나는 어린 나이에도 아주 야무지고 똑 부러지는, 다른 차원의 세계를 멋지게 다스리는 인정 받는 여왕이었고, 어느 날 정말 마법처럼 다른 세계에 떨어져 여왕이 된다면 누구보다 잘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공상에 힘을 싣고자 주·조연급 출연진을 같은 반 친구들로 한 소설을 쓰기도 했다. 수기로 빼곡히 쓰인 소설은 당시 생각보다 꽤 인기를 끌었고, 공책을 채워나갈수록 내 공상도 무럭무럭 더해갔다. 그게 창피하다고 여긴 뒤로 그 공책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나는 현실과 비현실을 오가며 즐겁게 공상해나가는 것으로 틈틈이 나의 시간을 채우며 살았다.
중학생쯤 되자 비현실적인 공상은 사라지고, 전자의 공상만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사실 공상이라기보다 막연한 미래를 향한 희망 사항에 가까웠다. 어떤 것보다도 '고등학교에 가면, 대학교에 가면, 어른이 되면 예뻐지겠지'를 바탕으로 한 예쁜 나에 대한 공상이 주를 이뤘다. 초등학교 시절까지는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던 '외모'의 우열을, 세상의 잣대를 깨닫게 되었으니 더욱 그랬다. 나는 더 예뻐지고 싶었지만, 뭘 어떻게 노력해야 하는지도 몰랐고 설령 그것을 구체적으로 알아간대도 그 노력이 결국 주어진 환경 혹은 태생이 받쳐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한 번 더 아프게 깨달아야 했을 터였다.
그래서 공상을 했다. 화장? 성형? 구체적인 방법을 생각하기에는 괜히 머리도 아프고, 아는 것도 없고……. 그냥 상상해버리면 편했다. 드라마와 영화에서 '몇 년 후'라는 자막으로 긴 시간을 퉁치듯이 나는 시간과 노력을 모두 상상으로 퉁쳤다. 빨리 감기로 돌려버린 것이다. 어떤 경위로 내가 예뻐지는지는 건너뛰고, 그냥 어찌어찌 결과적으로 '예뻐진 나'를 상상하며 즐거워했다. 나를 무시하고 괴롭히던 사람들이 예뻐진 나를 보고 놀라고, 뒤에서 수군거리고 부러워하는 모습도 빠뜨리지 않고 열심히 공상했다. 지금의 모습은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예뻐져 모두를 놀라게 하는 상상.
다소 비참한 상상이었고, 절대 건강하지만은 않은 생각들이었다. 차라리 하루에도 열두 번은 더 바뀌던 온갖 꿈을 이뤄 멋진 직업인이 된 나, 과학이 발전한 미래에 사는 날아다니는(!) 나 같은 걸 공상했더라면 귀여운 추억이 되었을 텐데. 외모에 집착하며 오로지 예뻐진 모습만 상상해야 했던, 외모의 벽에 갇혔던 어린 나를 떠올리면 어쩐지 안쓰러워진다. (내가 유독 외모에 관련된 공상만을 집착적으로 하게 됐던 이유는 또 있는데, 주제에서 벗어나게 되는 긴 이야기라 다음에 따로 적고 싶다.)
고등학생이 되었다. 물론 특별히 예뻐지지는 않았다. 으레 그 나이의 여고생들이 그렇듯 나도, 내 친구들도 모두 좋아하는 남자 연예인이 한 명쯤은 있었다. 그들의 '남친짤'을 2G폰 혹은 당시 최신식 3G폰의 배경화면으로 해 두고 우리는 즐거워했고, 그들과 연애하는 상상도 했다. 우리는 그들을 연예인으로, 팬으로서 좋아하긴 했지만 그런 마음 한편에는 어느 정도의 연애 감정 비슷한 것이 녹아있었다. 누군가는 부정한다 해도 사실 그 시기의, 아니, 시기를 떠나 연예인을 좋아하는 마음 일부에는 동경을 넘어선 성애적 감정이 포함되어 있는 법이니까.
그때도 글을 쓰는 것을 좋아했던 나는 친구들을 주인공으로 한 짧은 소설 한 편씩을 써서 선물로 줬다. 여자 주인공은 친구들이고, 남자 주인공은 친구들이 좋아하는 그 연예인인 소설. 여덟 명이서 다니던 우리 무리 모두가 소설 한 편씩을 받았으니 총 일곱 편, 아니, 내 몫까지 여덟 편이나 썼던 셈이다. (그래도 크게 소유욕이라든가 경쟁의식은 없었던 것 같은 게, 한 친구는 나와 좋아하는 '최애' 연예인이 겹쳤지만 나는 그 친구의 몫도 흔쾌히 써 주었다.)
선생님이 되고 싶어하는 친구에게는 선생님이 되어 좋아하는 뮤지컬 배우와 연애하는 소설을, 유치원 교사가 꿈이었던 친구에게는 유치원 교사가 되어 작곡가가 된 좋아하는 가수와 연애하는 소설을……. 꼭 K-드라마 같은 소설을 찍어내듯 줄줄이 써 내려갔다. 왜, 한국 드라마가 그렇지 않은가. 주인공이 교사든, 변호사든, 의사든, 발레리나든……. 아무튼 그들은 연애를 한다. 연애만 한다. 학교에서, 재판장에서, 병원에서, 무대 뒤에서로 배경만 바뀔 뿐.
친구들은 모두 꺅꺅대며 좋아했고, 서로가 주인공인 것들을 킥킥대며 돌려 읽었다. 어떤 장면이 맘에 들지 않는다고 하면 그때그때 고쳐주기도 했다. 메모장에 열심히 적어 텍스트 파일로 준 그 소설들은 그렇게 친구들의 MP3와 전자사전 안을 떠돌아다니다 어느 순간 자취를 감췄다. 심지어 메일링까지 해 줬었는데, 그 역시도 아주 다행히 더는 내 메일함에서 찾아볼 수 없다. 아마 스물 몇 초반의 내가 우연히 발견했다 창피한 나머지 싹 밀어버렸던 것 같기도 하다. 지금도 가끔 친구들을 만나면 더러 그 이야기를 꺼내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쥐구멍에 숨고 싶은 심정이 된다. 내용까지는 기억나지 않는대도 우리 모두 소설의 제목만은 기억하기 때문이다. 제목은 전부 그들이 좋아하는 가수, 혹은 배우의 노래 제목과 작품 제목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그때 나를 채웠던 공상은 좋아하는 연예인과의 연애, 혹은 직업적인 성취를 이룬 나의 모습이 대부분이었다. 아무래도 대학 진학을 앞두고 진로에 대해 더 진중하고 확고한 고민과 결정이 필요한 시점이었기에 그랬다. 하지만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나의 꿈은 끊임없이 바뀌었고, 그때마다 내가 공상하는 내 미래도 변화를 거듭했다. 나는 외교관이 되었다가, 호텔리어가 되었다가, 작사가가 되었다가 또 기자가 되기도 했다. 나름대로 곳곳에 있는 시간의 공백을 메워주는 즐거운 시간이었지만, 그 공상들이 진짜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나의 미래에 보탬이 되었느냐 하면 딱히 그렇지는 않다. 막연히 어떤 직업인이 되는 것을 공상하기만 했을 뿐 그에 비례하는 노력을 하지는 않았다. 말 그대로 뜬구름 잡는 공상들이었던 것이다.
나는 항상 미래에 있었다. 내 마음은 늘 미래에 먼저, 한발 앞서 가 있었다. 그만큼 나는 오래도록 현재의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어릴 때는 그저 순수한 마음에 더 나은, 예쁜 미래를 꿈꿨던 것일지 몰라도 머리가 큰 후에도 항상 그래왔던 것을 보면, 나는 무의식과 의식에 두루 걸쳐 현재를 부정하고 싶어 했다. 그리고 그런 감정들이 한데 모여 꿈속에서 점점 더 짙어져 가는 핑크빛 미래에 대조되는, 회색빛으로 뒤덮인 현재의 나를 만들었다.
이제는 더 이상 공상하지 않는다. 그것이 별 의미 없는 허황된 바람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될 거야, 라는 의지를 담고 노력을 예고하는 다짐이 아닌 이렇게 되겠지, 라는 막연한 희망임을 깨달아서. 어쩌면 로또보다도 더 실체 없는 꿈이다. 요즘 사람들이 우스갯소리로 하는 농담이 내게는 딱 알맞다. 로또 당첨이 되고 싶다면서 로또를 사지도 않는 사람. 로또를 사고서나 당첨을 꿈꿔야 하지 않겠는가. 노력이나 하면서 무언가를 꿈꿔야 하지 않는가.
또 다른 이유는 공상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을지도 모르는, 아니, 그럴 확률이 더 높은 미래가 비참하게 느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목표로 설정한 것을 이루지 못하면 엄청난 패배감을 느끼는, 매번 노력한 것보다 더 나은 결과를 원하는 이기적인 완벽주의자로 살았던 과거를 돌이켜보면 공상마저도 사실은 아닌 척 꿈꿔온 나의 무책임한 목표라는 생각이 들었다. 감히 그것을 목표라고 부르면 내가 민망하니까, 부끄러우니까, 그리고 이뤄내지 못했을 때 내 마음이 힘들어질 테니까 공상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서 머릿속에 전시했던 것들.
하지만 그 순간순간 행복했다. 내가 끓여 먹은 라면 한 그릇보다 동생 옆에 빌붙어 뺏어 먹은 라면 한 젓가락이 더 맛있는 것처럼, 나는 힘이 들 때면 노력해도 쉽게 나아지지 않는 현실을 잠시 떠나 달콤한 공상을 몰래몰래 꺼내먹었고 위로 받았다. 그걸로 충분하다. 그만큼 했으면 공상은 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해 주려고 한다. 내 확고한 목표가 되고 삶의 의지를 위한 부스터가 되기에는 다소 터무니없는 것들이 많았고, 또 그런 책임을 멋대로 지우기에 공상들은 너무도 해맑았으니까.
다만 이제 무턱대고 이상에 잠기는 공상에 의지하기보다는 그저 낙천적이려고 한다. 이렇게 대단하게 되겠지, 보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그럼 패배감을 느낄 필요도, 자책할 필요도 더는 없을 테니까. 어떤 결과를 받아들어도 어떻게든 됐네! 이렇게 된 거군! 하고 웃어버릴 수 있도록. 내가 가장 사랑하는 가수 아이유는 이렇게 노래했다. 하루 정도는 행복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래, 맞아. 그러니까 더는 도망치기 위한 공상이 없어도 괜찮아.
그래도 확실하게 감사 인사는 하고 싶다.
어쨌든 그 시절,
공상은 나의 힘이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