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고 싶지 않을 때 만난 살지 않기를 택한 이들.
요즘의 나는 일어나는 것이 버겁다. 비단 일어나는 것뿐만이 아니다. 잠이 드는 것도, 몸을 일으키는 것도, 움직이는 것도, 걷는 것도……. 그 모든 게 버겁게만 느껴진다. 이러다가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워질 것만 같다. 어느 순간 덜컥 숨조차 쉬고 싶지 않아지면 어떡하지. 이조차 의식하게 되면, 노력으로 분류해야 할 만큼 무기력해지면 그때는 정말 어떡해야 하지. 눈을 뜨면 또다시 시작되는 하루가 설렌 적도 없지만 이토록 두려운 적도 처음이다. 가끔 눈을 감을 때면 그냥 영원히 잠들고 싶다고 생각한다.
온통 이런 생각들로 둘러쌓였다 번뜩 정신이 든 것은 어제의 늦은 새벽이었다. 잠들기 전 침대에 누워 인스타그램을 둘러보던 중 지금은 연락이 뜸한 지인의 계정을 하나 보게 되었다. 본 계정은 따로 있고, 일기처럼 자신의 감상을 적는 계정인 것 같았다. 그녀의 게시물 중 가장 최근의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익숙한 연예인의 사진이었다.
언니 벌써 일 년이다
보고 싶어
사진 속 환하게 웃고 있는 그녀. 지인은 그녀의 팬이었다. 10월 14일. 그렇구나.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났구나. 나름대로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던 사람이 그렇게 어린 날로부터 여태껏, 인생의 절반 이상을 우리 곁에 머물다 스쳐 갔는데. 그 모든 과정이 조각조각 낱낱이 사람들 앞에 보였는데도 일 년이란 시간이 흐르도록 금세 잊고 살았구나. 하지만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전 세계 70억 명이 모두 아는 유명인보다도 내게 빈자리를 느끼게 하는 것은 나의 가족, 나의 연인, 또 나의 주변에 언제나 있는 것들일 테니까.
당시의 내가 생각이 났다. 아니, 그보다 조금 더 이전의 일이 먼저 떠올랐다. 그때도 나는 때때로 찾아드는 우울에 괴로워하며 살았고 그러다 느끼는 무력감에 몸을 뒤틀었지만 아무래도 지금보다는 괜찮은 상태였다. 그런데도 당시 포털 속, 뉴스 속 일련의 소식들은 생각보다 나를 울게 했다.
17년 어느 겨울이었다. 처음 기사를 봤을 때는 오보라고 생각했다. 그날 저녁, 그 사실이 뉴스에까지 보도되었을 때야 믿을 수 있었다. 믿어야만 했다. 나는 그를 크게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목소리를 좋아했고, 노래를 즐겨 들었고, 라디오를 종종 찾았다. 그는 어둠이 깔린 밤 귀갓길에, 문득 외로워지는 새벽녘 이불 속에서, 인적이 드문 버스 창가에 머리를 기댄 채 우울하게 즐겨듣던 목소리의 주인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 마음을 건드리다 못해 폐부를 찌르고 깊숙이 들어왔다. 그로부터 며칠간은 먹은 것이든 뭐든 마음속에서부터 몽땅 게워내고 싶은 기분이 수시로 들었다. 누군가 들으면 웃을지 모를 일이지만, 생판 남에 불과한 한 연예인의 이야기지만 나는 그랬다. 한동안 꾸준히 마음이 울렁거렸고, 속이 좋지 않았다.
그가 떠난 날 내 곁에는 가족이 있었고, 이튿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사람들이 함께 있었다. 단둘이든, 여럿이든 나는 사람들과 부대끼며 밥을 먹었고 술을 마셨다.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고 해서 일상에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사람들은 살던 대로 살았고, 만나던 대로 만났고, 뭐가 됐든 하던 대로 했다. 내 주변도 마찬가지였다. 평소와 같이 웃고 떠들고 즐거워했을 뿐.
다만 비보가 전해진 이튿날의 자리에서는 왁자지껄하던 테이블에 그 이야기가 등장하자 잠시나마 숙연해졌다. 모두 들뜨지 않은 목소리로 한마디씩 했다. 많이 힘들었나 봐, 힘들었겠지, 참 그러고 보면 돈 많고 인기 많다고 다가 아니야……. 우리는 우리의 방식대로 그를 애도하고 그리워했을지 모르지만, 나도 그저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었지만 어쩌면 이 모든 안타까움의 토로조차 그에게는 수많은 사람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한순간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렇게라도 기억한다. 이런 순간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가라앉은 분위기 속의 이 대화들을 기억하기 때문에 너무나 뻔하고 당연해서 특별할 게 없었던 어느 하루를 여태 기억하고 있다. 우울에 잠겼던 어느 한 시절로 뭉뚱그려지지 않고 이렇게 아스라이 남아있을 수 있는 것은 내게 마음을 맡길 곁가지들이 있어서였다. 아무렇지 않게 장면 장면마다 스쳐 갔던 내 자리들이 나를 지켰다. 평소처럼 내 곁을 지켜주는 이들이 있어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넘어갈 수 있었다. 그때는 그런 줄도 몰랐는데, 그게 다 나를 지키는 길이었다.
그녀가 떠났을 때 나는 깊어진 우울로 사람들을 더 잃은 후였다.
더 크게 앓았던 것 같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지금의 나는 2년 전 이맘때의 나보다 우연히도 당사자를 더 사랑해서 더 아픈 걸까. 더 버겁게 느끼고 더 큰 책임을 통감하고 더 마음을 쓰고 더 눈물을 흘리는 이유가 오직 그것뿐일까. 아니면 그저 그 사이 더 깊어진 나의 우울 때문일까. 알 수 없어서, 또 그런 모든 감정에 죄책감이 덧입혀져 그렇게 오래도록 혼자 되뇌던 19년의 가을.
지금에서야 생각한다. 아닐 것이다. 아니었을 것이다.
17년의 내게 있던 모든 것들이 19년의 내게는 없어서였다. 그 시간들이, 그 장면들이 존재하지 않아서 더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나를 아무렇지 않게 붙잡아 주고 지탱해 줄 사람들이 내게 더는 남아있지 않아서. 일상을 태연하게 꾸리던 것들이 내 우울에 잡아먹혀 몽땅 사라져 버려서, 나는 더욱 크게 휘청여야 했다. 머나먼 타인에 불과한 그녀와의 안녕에 더욱 괴로워하고 몸부림을 쳐야 했다.
나는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히 그녀 세계의 이방인일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고 오래도록 그녀의 팬이었다거나 열렬히 그녀를 사랑한 적도 없다. 다만 먼저 지난 그처럼 그녀의 노래를 들었다. 그녀의 노래는 그의 것과는 또 다르게 기분이 좋은 어느 날 듣고 싶어지곤 했다. 누가 봐도 참 예쁜 그녀의 웃는 얼굴을 좋아했다. 그리고 가끔 그녀를 마음속으로 응원했다.
많은 이들이 그녀에게 손가락질할 때 나는 그게 그럴 만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생각했지만, 거기서 그쳤다. 그것이 못내 후회된다. 백 개의 따스한 말도 한 개의 모진 말 앞에 무력해지는 게 사람의 마음인데, 그마저도 백 개 중 단 한 개도 얹어 주지 못했다는 것이.
감히 떠난 이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내가 무섭다. 너무 지겨워서 사람 없이 살고 싶은데 사람이 없어 지난 날 괴로워했음을 뼈저리게 느끼고, 결국 사람 없이는 못 사는 내가 우습다. 이러다가 어느 날엔가 눈깔이 돌아버리면 죽음을 생각하고 싶을 것 같아서 또 두렵다. 우습고 두려운 나날의 연속이다. 무엇 하나 온전하게 그리고 멀쩡하게 해내는 것이 너무도 크나큰 과제 같은 날들이다.
나는 살아내고 있다.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무너지지 않고 나 자신을 완전히 버리지 않기 위해 아득바득 살아내고 있다. 못난 나를, 어쩌면 이미 꽤 망친 자식을 올곧게, 또 때때로는 비뚤게 어쨌든 여전히 사랑하는 부모를, 그런 나를 수시로 기웃거리는 주변의 시선을 버티고 또 끊어내며 근근이 스스로를 붙잡고 있다.
이렇게 모든 게 버거운 나날에 나는 우연히, 또 함부로 다달이 떠난 이들을 떠올리고 한순간이나마 그리워한다. 그리고 왜인지 모르게 미안해한다. 그러고 나면 화면 속 11월의 그녀가 울며 전한 말이 떠오른다. 그때까지도 자신을 비난하고, 동정하고, 재단하던 수많은 시선 앞에서 먼저 떠난 10월의 친구에게 다짐하던 말. 끝내 지키지 못했던 그 말.
내가 네 몫까지 열심히 살게.
누군가에게는 아주, 아주 우스운 말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 당사자도 아닌 주제에 감히 그 말을 곱씹으며 또 감히 살아갈 생각을 한다. 내게 그는, 그녀는, 또 그녀는 그런 의미를 가지니까. 설리라는 이름은, 그들의 이름은 내게 그런 무게다. 살고 싶지 않을 때 만난 살지 않기를 택한 이들.
나는 누군가의 몫까지 살아낼 여력이 없어 그냥 내 몫의 삶을 살아갈 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