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작은 노력으로도 너무나 쉽게 말랑해지는 아빠.
생전 처음 아빠와의 데이트였다. 버스 타고 열 정거장을 나가서 상추튀김도 먹고, 아이스크림도 먹고, 팝콘에 콜라 사서 심야영화까지 봤다. 영화가 끝나고 집에 들어가는 고요한 새벽길이 참 좋았다. 슬쩍 팔짱을 꼈다. 다 큰 자식이 징그럽다면서도 아빠는 계속 웃었다. 자기 전 침대에 누워서도 자꾸 생각했다. 기분 정말 이상해.
이틀 전 밤 뜬금없이 상추튀김이 먹고 싶다는 아빠 말에 내가 잘못 들었나? 하면서도 그냥 해 본 말이라고 넘길까 냉큼 "그럼 우리 토요일에 먹으러 가자!" 못부터 박았고, 너 혹시 공짜 표 있니? 백두산인가 뭔가 영화 개봉했다며? 슬쩍 흘리는 말에는 실실 웃음이 났다. "공짜 표 있지, 그럼. 나 영화관 VIP잖아."
우리 아빠가 저런 말을 툭툭 하는 게 너무 낯선데, 그래서 너무 좋았다. 생각해 보면 아빠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내가 조금씩 달라지고, 아주 별것 아닌 노력을 시작한 이후로부터.
평생 당신 취향이 담긴 얘기나 부탁이라고는 믹스커피 타 줘, 물 적게 설탕 한 스푼, 이 전부였던 아저씨가 먹고 싶은 게 있다고, 하고 싶은 게 있다고……. 저런 얘기를 하게 되기까지 꼬박 이십 년 하고도 사 년이 더 걸렸다. 그 외에는 항상 부탁이라기도 민망한 말들만이 있었다. 네 방 좀 치워 줘, 배달 좀 그만 시키고 집에 있는 반찬에 밥 좀 먹어라. 그것도 아님 양말 좀 걷어 줘, 빨래 좀 개어 줘……. 참 당연한 것들뿐이었는데. 그마저도 매일 같은 자세로 핸드폰 쥐고 침대 뒹굴며 나 귀찮은데~ 아빠가 해 줘~ 따위의 어리광을 연발하며 살았다. 그럼 아빠는 잠시 눈살을 찌푸리고 그랬다. 그래서 어떻게 혼자 살래. 그냥 그게 다였다. 그렇게 말하고 다시 아무렇지 않게 베란다로 향하고는 했다. 내가 아빠에게 미룬 그 양말을 걷으러, 빨래를 개러.
그렇게 없는 형편에 손 하나는 공주처럼 컸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세탁기 한 번, 밥솥 한 번 제대로 만져 본 적이 없을 정도니까. (아직도 밥물은 잘 못 맞추겠다.) 그렇다고 해서 썩 타의까지는 아니고, 오로지 상황이 허락한 자의로 얼렁뚱땅 곱게 자란 이 철부지 대학생의 졸업이 고작 두 달밖에 남지 않은 때였다. 남들은 이즈음이면 더러 재주도 좋게 취업하고, 자취도 하고, 그렇게 홀로서기를 시작한다고 했다. 이런 얘기는 왜 슬픈 예감을 비껴가는 법이 없을까. 엄마 친구 아들 아무개도, 아빠 친구 딸 아무개도 어디 어디에 취업을 했다더라, 부모한테 용돈을 준다더라, 그런 소리가 내 귀에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무런 계획도 목표도, 의욕도 없는 내 부모의 딸, 그러니까 예비 백수가 그 말을 죄 무시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나는 생애 최초로 어울리지도 않게 부모님 눈치를 보게 됐고, 그래서 생애 최초로 집안일에 슬금슬금 손을 대기 시작했다.
요즘 말로 참 웃픈 거다. 눈치 보여서 마지못해 하는 거면서, 철든 척 집안일 아닌 집안일 몇 번 해 줬다고 평생 안 그러던 사람이 대번에 말랑말랑해져서는 나랑 막 데이트도 해 준다. 내 방 내가 치우고, 귀찮아도 이불 좀 널고, 설거지 좀 하고……. 아, 또 배달 음식 줄이고 집밥 좀 챙겨 먹는다고. 그게 그렇게 좋은가 보다. 예쁜 짓 백 번 해도 한 번 어긋나면 밉고, 미운 짓 백 번 해도 한 번 예쁘면 사람 다시 본다는데 내가 참 아빠한테 후자에 속하는 자식으로 살았구나 싶다. 아빠 말마따나 못난 스물넷 딸래미다.
아직도 VIP 초대권이나 포인트로 보는 게 아니면 영화 그거 만 원도 넘지 않니? 됐다 됐어, 지레 고개를 내젓는 아빠. 상추튀김은 십 년 전 그대로 1인분에 이천 얼마 하는 줄 알고, 오천 원이라니까 동그래진 눈으로 나만 쳐다보던 아빠. 셋팅펌 한 번에 이십만 원 줬다고 하면 기절할까 봐 팔만 원에 했다고 하얀 거짓말을 해야 하는 아빠지만 그런 아빠여서 미안하고 그런 아빠여서 고맙다. 그런 아빠가 내 아빠여서 너무너무 좋다.
나만 할 때는 분명 다양하고 확고했을 당신 온갖 취향은 사는 데 치여 다 어디 우주 저 너머로 보내 버리고, 나를 갖고 스무 해가 넘도록 그저 가장 저렴한 것, 가장 편한 것만 찾고 산 사람. 당신 옷 하나, 신발 하나 비싸고 좋은 것 안 사고 싸도 이만하면 괜찮다는 것만 사던 사람. 취미라고는 일주일에 한 번 목욕 다녀오는 거랑 만 원어치 로또 사서 5등이라도 좀 됐음 좋겠다고 툴툴거리는 게 다인 사람. (이나마도 코로나 때문에 하나 뺏겼다고.) 안겨들면 다 큰 게 어쩌구 구시렁거리면서도 마지못한 척 안아 주고, 뽀뽀하려고 들면 이런 건 애인이랑 하라고 구박하면서 받아 주고, 그러면서도 결혼 안 한다고 하면 너 하기 싫으면 하지 말라고 말해 주는 사람.
나의 작은 노력으로도 너무나 쉽게 말랑해지는 아빠. 이런 우리 아빠, 앞으로 좀 더 좋은 것 먹고 좋은 것 입고, 좋은 걸 좋은 줄 알고 살게 내가 잘 좀 해야지 생각한다. 아주 조그만 노력으로도 아빠를 웃게 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나니까. 아빠에게만 발휘할 수 있는 내 작은 능력이니까.
아빠, 진짜 딱 일 년만 기다려. 내가 돈 모아서 아빠 여권 만들어 줄게. 됐긴 뭐가 돼, 환갑 찍기 전에 비행기는 타 봐야 할 거 아니야. 내가 창피해서 안 돼. 아, 그리고 있잖아. 그날 우리 본 영화 공짜 표 아니었어. 연말이라 이미 다 썼거든. 내가 쏜 거야. 그러니까 다음엔 아빠가 나 영화 보여 줘야 해, 알았지?
우리 또 데이트하자.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