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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월 Sep 23. 2020

단돈 12만 원도 없는 우리 집

천오백 정도면 안 될까?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는데.

근무 중에 전화가 왔다. 동생이었다. 첫 취직, 첫 출근 이후 한 달여를 일하면서 한 번도 온 적 없는 전화였다. 급하게 비상구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 왜? 묻는 말에 동생이 약간 쭈뼛대며 물었다. 언니, 돈 있어?


얘 또 나한테 돈 빌리려고 이러네. 그렇다고 일하는 중에 전화할 일인가. 그렇게 생각하며 핸드폰에서 얼굴을 떼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2시. 동생은 적게는 만 원 이만 원, 많게는 십만 원 언저리까지 가끔 내게 돈을 빌리곤 했다. 용돈이 떨어졌다거나, 친구 생일인데 돈이 부족하다거나 하는 이유였다. 없어, 없어. 손사래를 치며 말하자 짐짓 진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말고. 엄마가   빌려달래.


응? 반사적으로 하이톤의 되물음이 먼저 나왔다. 동생이 말을 이었다. 나 등록금 냈잖아. 내 등록금 내니까 정말 돈이 한 푼도 없대. 그래서 언니한테 좀 빌려달라고. 그렇게 말하는 눈치를 보니 바로 옆에 엄마가 있는 것 같았다. 기분이 이상해졌다.


얼마나?

12 .


동생의 등록금은 400만 원을 조금 넘었다. 비싼 금액인 건 맞지만, 그래도, 그걸 냈다고 돈이 하나도 없다니. 하나도 없다는 말이 정말 엄살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라니. 그래서 1,200만 원도 아니고, 120만 원도 아니고 12만 원을 빌려달라고 엄마는, 동생을 통해서 내게 전화를 건 것이다. 이제   월급을 받은 딸에게.


급해서 그렇대. 진짜 잠깐이면 된다고. 삼일 안에 준대.


침묵이 이어지자 동생이 급하게 덧붙였다. 처음 전화해달란 부탁을 들었을 때는 전달하고 있는 동생의 마음도 나와 비슷했을까. 우리  정도로 힘들어? 묻고 싶었지만 장난으로도 차마 물을 수가 없었다. 아니라고 하겠지만, 아닌 게 아니어도 아니라고 하겠지만 결국 그런 대답은 아무 힘이 없을 테니까. 입 밖으로 그 질문을 꺼내는 순간 내가 지금 가진 고질적인 우울과, 사회 초년생으로 겪는 방황과, 일적인 고민, 삶의 회의감……. 그 모든 걸 거뜬히 넘어서고도 남을 어떤 기시감과 부채감이 몰려올 것을 알았다.


새삼스럽게 내 부모가 삶에 관철하고 살아온 기준점이 과연 옳았던 걸까 생각했다. 빚 한 푼이라도 있으면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아는 내 부모. 평생 단 한 점의 빚도 남긴 적 없이 살았던 사람들이 처음 빚이란 걸 가진 것은 동생이 대학교 2학년이 되던 해였다. 동생의 등록금과 타지에서 용돈으로 쓸 비용을 학자금 대출과 생활비 대출로 받으며 부모는 어두운 표정을 했다. 나와 동생은 그런 부모를 닮아 가족끼리가 아니면 빚질 줄을 모르고, 살며 그런 것은 인생에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자라왔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그래서 우리에게 남은 게 있었던가? 우리는 빚을 지지 않은 대신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다. 등록금을 낼 수 없어 대출을 받았다면서, 이상하게도 대출은 그 한 학기가 끝이었다. 그 뒤로 그들은 어떻게든 있고 없는 돈들을 끌어모아 학기마다 등록금을 댔다. 부모의 구체적인 재정 상황까지 알 수 없는 스물 초반의 풋내기 두 딸은 그래서 그냥 생각했다. 살 만한가 보다. 괜찮은가 보다.


여태 괜찮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400 넘는 돈을 쌩돈으로 박치기를 하고 알거지가 되다니. 차라리 대출을 받지. 그냥 대출 그거 한 번 더 받지. 학자금 대출은 금리도 완전 낮다던데. 하지만 얼추 알 수 있었다. 부모를 닮았다지만 유독 빚에 거의 강박 수준의 거부감이 있는 동생은 단 한 번 받은 600만 원가량의, 그나마도 원금과 이자를 매달 부모가 꼬박꼬박 갚아나가 이제 200만 원쯤 남은 대출금을 가지고도 꽤 자주 한탄을 했다. 졸업도 전에 빚이 있어서 너무 마음이 무겁다며. 제가 갚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말이 많냐는 부모의 핀잔에도 어쨌든 내 이름 아래 달린 것 아니냐며 투덜거렸으니까. 별것 아니라 생각했던 투덜거림이 부모의 가슴에 어떻게 다가가 어떻게 박혔을까. 그 모습을 아무 생각 없이 멀거니 바라보던 과거의 나를 꾸짖고, 동생의 입을 틀어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언니?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아, 어. 얼마라고?

12만 원. 있어?


다시 듣는 금액에 입술을 물었다. 응, 있어. 계좌 보내 줘. 바로 보낼게. 알았어. 전화를 마치고 계좌를 확인했다. 적금 두 개 넣고, 다가오는 날에 넣을 월세 빼고, 공과금 빼고, 교통비 빼고, 자동이체 빼고……. 남는 나의 생활비. 동생이 보낸 계좌로 12만 원을 송금했다. 문득 울고 싶어졌지만 울고 가기에는 이미 너무 오랜 시간을 보낸 것 같았다. 나는 비상구를 빠져나와 자리로 향했다. 다만 내 영혼은 그 뒤로도 오래도록 비상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틀 뒤 아빠는 고맙다는 짤막한 문자와 함께 돈을 돌려주었다. 공인인증서 갱신도 못 하고 인터넷뱅킹도 못 하지만 편하다고 가르쳐 준 카카오페이만큼은 잘 쓰는 아빠가 웃겨서 라이언이 손을 흔드는 노란 말풍선을 누르며 그냥 웃었다.


12 원을 받으세요.




10시 출근. 회사에서 걸어서 15분, 죽기 살기로 뛰어서 8분인 셰어하우스에 살며 가장 좋은 점은 남들이 집을 나설 때, 더러는 이미 지하철에 실려 가고 있을 때 눈을 떠도 된다는 것이다. 8시 50분에 맞춘 알람이 울리는 줄 알았는데, 화면을 보니 아빠에게서 온 전화였다.


응, 무슨 일.

일어났어? 이제 일어난 거야? 어떡해, 빨리 준비해야겠다.

이제 준비 오래 안 걸려. 적응이 돼서.


아빠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다정했지만, 평소와 달리 어딘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아빠는 다행이라며 잠깐 웃고는, 한 템포 쉬었다가, 말을 꺼냈다. 근데   있어? 아빠 삼십만 원만 빌려주라. 잠이 확 달아났다. 태연하게 왜, 하고 물으니 그냥 좀 쓸 데가 있다고 했다. 좌로 보나 우로 보나 돈 가지고 허튼짓은 안 하는 우리 아빠라지만, 그런 대답은 나의 불안을 더욱 키웠다. 장난스레 말했다.


뭐야, 그런 게 어디 있어. 어디다 쓸 건데.

그냥~ 그냥 좀 쓰게.


아빠, 나 팔천 원만. 쓸 데가 있어. 입으로 바람을 불어 넣는 장난감 뿅망치를 갖고 싶다고 말하면 돈을 주지 않을 것 같아 그렇게 말하던 열한 살의 내가 떠올랐다. 아빠는 엄하게 그랬다. 그러니까 어디. 어디다 쓸 건데. 솔직하게 말하면 사 줄 건가, 뭐. 속으로 투덜거리며 겨우 뿅망치를 입에 올렸지만 역시나 소용은 없었다. 나는 결국 팔천 원을 얻어내지 못하고 잉잉 울었다.


꼭 내가 그때의 아빠가 된 것 같았다. 어디다 쓰려고 그 돈이 필요하니. 이 말은 평생 듣기만 할 줄 알았다. 이렇게 일찍, 그것도 아빠한테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이른 시간의 전화와 이른 우리의 변화가 나를 많이 슬프게 했다.


사실…… 엄마 아빠 결혼 25주년이야. 그냥 넘어갈 수는 없잖아. 뭐라도 좀 사 주고, 현금으로도 주고 하려는데 아빠가 이번 달은 돈이 없네.


멋쩍어하며 털어놓는 아빠의 말에 또 한 번 머리가 울렸다. 내가 스물다섯이니 부모도 스물다섯 해째가 되었겠구나. 나는 엄마 아빠의 결혼기념일을 몰랐다. 계좌를 달라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머리가 복잡해 전화를 끊으면서도 끝내 묻지 못했다. 몇 월 며칠인지.


감은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핸드폰을 집어 드니 문자가 반짝였다.


농협은행

001-

000

000000

고마워^^


끝은 12만 원을 돌려줄 때와 같았다.  글자와 웃음 표시. 그때는 그래도 웃었는데, 웃어버릴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그게 잘 안 됐다. 핸드폰을 붙잡고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아 잠시 울었다. 내가 제일 늦게 출근해서 다행이다. 화장실에서 늦게 나와도 돼서. 우는 소리가 들릴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돼서. 아빠가 보고 싶어 자꾸 눈물이 났다.




가진 돈 한 푼 없이 얼결에 처음 서울에 있는 직장을 얻었을 때, 그래서 갑자기 서울 어느 한구석에라도 내가 몸을 뉘일 자리가 필요하게 되었을 때였다. 이전에도 경험이 있는 셰어하우스를 먼저 찾던 내게 부모는 원룸을 찾으라 말했다. 전세는 안 돼도 월세라도 구하라고. 웃으며 말했었다. 서울 물가가 여기 같은 줄 알아? 여긴 삼백에 삼십이면 사람 살 만한 집 차고 넘치지만, 거긴 보증금부터 천은 있어야 할걸. 우리가 천이 어딨어.


엄마는, 아빠는, 그랬다.


천오백 정도면  될까?  정도는    있는데.


어쩌면 그 돈은 부모의 어느 통장에 든 비상금이 아니라, 장성한 두 딸을 세상에 내어놓느라 얼마 모으지 못한 노후자금이 아니라 그들이 받을 수 있는 최대의 대출금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오십 평생 육백의 빚이 전부였던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다 자란 자식을 위해 천오백을 그렇게 쉽게 불렀다.


나는 어쩌면 앞으로 일 년을, 오 년을, 아니 십 년을 더 셰어하우스를 옮겨 다니며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이상한 일은 아니다. 우리 셰어하우스에도 서른셋, 서른아홉의 언니들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슬플 것이다. 서울 곳곳에 즐비한 아파트들을 올려다보며 종종 기운이 빠지고 자주 서글프겠지. 다만 아무리 슬프더라도 가진  없는 부모를 원망하지 않기 위해 내가 가진 모든 마음을 쏟을 것이다.


 부모도 그랬으니까. 가진 돈이 없어도 가진 마음을 죄 쏟아 나를 빚었으니까. 내가 이제야 돈에 벌벌 떨도록, 돈의 무서움을 깨닫도록 내 가난을 이만큼 유예시켜 주었으니까. 스물다섯 해를 무지할 수 있었음에 감사하며 나는 오늘 조용히 한 번 더 울었다. 이 글을 쓰면서도 아주 조심히, 숨죽여 한동안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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