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지금 이 글을 썼다.
글이 안 써진다.
큰 위기가 왔다. 내가 뭐 대하소설을 쓰겠다는 것도 아니고, 16부짜리 드라마 대본을 쓰는 것도 아니고, 어디 내야 할 원고를 쓰는 것도 아니고.... 그저 브런치에 몇 자 적는 것뿐인데도 글이 안 써진다.
차라리 마감이 있는 원고라도 되었다면, 하다못해 대학교 과제였더라면 약속된 기한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글을 썼을 텐데.
아무런 틀이 없는, 주제도 내용도 분량도 심지어 그 주기조차도 내 마음대로면 그만인 거라 그런지 되레 써지지 않는다. 그동안 뉴스레터는 열 통도 더 보냈는데. 주마다 보내는 뉴스레터는 아무리 글이 안 쓰여도 안 풀려도 월요일 밤 10시라는 약속을 지켜야 하기에 아득바득 써 내려가지만 브런치는 그게 안 되는 거다.
브런치에서 알림이 뜨고, 운영하는 뉴스레터의 답장으로 '여기에서 얘기를 꺼내도 될지 모르겠지만' 브런치 글을 기다리고 있다는 황송한 내용까지 받고도 한없이 애매한 죄책감만 느낄 뿐 글이 써지지는 않는다.
내가 나를 너무 쉽게 봤다. 그냥 어떻게든 계속 쓸 줄 알았다. 늘 주어진 틀을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정작 그 틀에 딸린 의무감이 없으면 뭘 제대로 해내지도 못하는 사람이면서, 오래도록 그렇게 살아왔으면서 글쓰기에서만큼은 감히 나를 믿었다. 그래도 좋아서 하는 거니까 꾸준히 뭐라도 끄적일 줄 알았는데, 삶의 궤적까지 거스를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더 솔직히 고백하자면, 사실 뭘 써야 할지도 모르겠다.
어딘가에서 말하기를 쓰고 보니 엉망이라 폐기하든, 몇 번을 다듬어 살려내든 일단은 떠오르는대로 적는 것이 글쓰기의 시작이라고 했는데 떠오르는 게 없어서 적을 수도 없다. 낭패다.
단 한 번, 어쩌다 브런치의 간택을 받아 카카오톡 플러스친구로 전송된 한 편의 글이 폭발적으로 구독자를 끌어모으고 나자 괜한 강박도 생겼다.
그때 우연히 얻은 많은 댓글은 물론 천삼백 명가량의 구독자는 내가 생전 처음 보는 숫자였다. 아무리 활발하게 글을 올려도 광고 계정을 빼면 스무 명의 이웃도 채우기 어렵던 블로그, 전부 다 건너 아는 사이인 팔로워 백 명 남짓한 인스타그램, 또 타인의 324,503번째 구독자가 되어보았을 뿐인 유튜브.... 뭐 이런 세상에서만 살던 내게 그날의 일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렇다 보니 꼭 그 글만이 아니어도 부모님의 이야기, 가족의 이야기를 썼던 글이 유독 반응이 좋았다는 사실은 내게 그나마 떠오르는 '쓰고 싶은' 다른 주제들을 멀어지게 했다.
얼마 전 유튜브를 보다가 그런 말을 들었다. "내가 만들고 싶은 영상이랑, 실제로 반응이 오는 영상 사이의 거리감을 극복하는 게 힘들어." 몇십만 명의 구독자를 가진 유튜버의 말이었지만 공감은 갔다. 회사 일만 해도 내가 하고 싶은 프로젝트와 실제로 반응이 좋은 프로젝트는 자주 달랐다. 그런데 이제 어디까지나 취미인 내 글조차도, 사람들이 더 읽어주고 반응해줄 것만 찾게 되다니.
여기까지 생각하다 보면 그 글은 우연히 얻어걸린 것이고, 사실 내 글은 누군가의 마음에 인상 깊게 남기에는 한참 부족하구나. 그러니 '소재'라는 편법에 기대려고만 하나. 그런 생각이 자꾸 들었다.
아, 이런 생각이나 하며 빈둥거리고 석 달을 넘게 글을 안 올렸다.
내가 이렇게나 성과주의에 찌든 사람이었나. 나 참, 속물 같다.
자의식 과잉이라고 해도 할 말은 없다. 실제로 드물지만 비슷한 류의 악플도 달렸다. 이런 글은 나도 쓴다느니, 착각도 유분수라느니, 공감이 하나도 안 간다느니. 그런 댓글들이 내 의지를 더 꺾기도 했다.
하지만 그만큼 잘 쓰고 싶었다.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더 좋아하는 걸 쓰고 싶었다. 나라는 사람은 내가 좋아하는 것이나 겨우 알지 사람들이 좋아하는 걸 알 수는 없는 한 개인에 불과한데, 그걸 어떻게든 알아내서 그것에 맞춰서만 쓰려고 하니 더 써지지 않았던 것 같다.
맞다.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쓰는' 일 자체를 하지 못했다. 일단 쓰고 나서 생각했어야 할 일을 나는 생각하느라 쓰지 못했다.
비단 글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닌 나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습관이자 오랜 고질병이다. 실행에 옮기기 전에 한참 생각하고, 고민하고, 걱정하다 결국에는 시작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잦은 삶. 돌이켜보면 그 과정에서 내가 얻은 것은 결국엔 하지도 않을 일들에 대한 고민거리와 그에 따른 스트레스뿐이었다.
그래서 지금 이 글을 썼다. 평소보다 조금은 짧고, 거칠고, 덜 다듬긴 이 글이라도 써서 올리면 다시 무언가를 써 내려갈 힘이 생길 것 같아서. 누군가는 이 글을 읽으며 '진짜 되는대로 썼네'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실망스러울 수도 있고, 아니, 애초에 내게 실망하고 말 것도 없어서 그냥 '이 사람 글 되게 못 썼다'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썼다.
정말 간만에, 너무 오랜만에, 뭐든 내가 썼다!
이렇게 계속 해내야겠다. 어디서부터 하지? 어떻게 하지? 언제 다 하지? 이런 고민을 할 시간에 그냥 아무거나 붙잡고 시작할 테다. 아무거나 막 쓸 테다. 뭐라도 써서 씹고 뜯고 맛보고 버리고 다듬어야지. 아무런 기대도 걱정도 없이 정말 마음이 가는 대로 써야지.
꿋꿋하게 다짐해본다.
다시는 삼 개월짜리 잠수는 없다고!
Ps. 그래도 못된 댓글은 좀 안 달았으면 좋겠다. 암만 지워도 머릿속에 남아 괴롭히는 맘을 아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