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월 Sep 10. 2021

탈출! 와르르맨션 - 셰어하우스 탈출기 (1)

스트레스성 위염과 위경련이라고 했다. 제가요?

※ 글을 쓰기에 앞서, 과거형으로 2020년 하반기의 일임을 밝힌다.


셰어하우스에 산 지 3개월.

나는 생애 최초의 병명을 얻었다.

스트레스성 위염과 위경련.




처음에는 나쁘지 않았다. 내 방 바로 옆 1인실의 수더분한 입주자 대표 겸 최장기 거주인 A, 건너 1인실의 친절한 에어프라이어 주인 B. 실제 여섯 명이 입주할 수 있는 집에 우리는 셋뿐이었고, 우리 셋은 공교롭게도 각 8시, 9시, 10시로 출근 시간이 모두 달랐다. 일단 첫 만남부터 아주아주 럭키한 일이었다.


밤늦은 시간에는 조용히 드나들었고 설거지와 빨래는 바로바로 해치웠다. 청소 당번인 주에는 잊지 않고 청소 체크표를 지켜 청소를 했다. 문제가 될 게 없으니 감정 상할 것도 없었다. 오가며 마주칠 때마다 인사를 나누던 것이 차차 주전부리를 나눠 먹으며 부엌 테이블에서 수다를 떠는 것으로, 금요일 저녁 함께 곱창을 시켜먹는 것으로, 또 급번개로 남산에 놀러가는 것으로까지 발전했다.


서울 생초짜인 나와 달리 서울에서 지낸 지 못해도 삼사 년은 훌쩍 넘은 데다 나이도 나보다 열 살씩은 많았던 하우스메이트들은 어느새 '언니들'이 되었고, 연고 없는 지역에서 생애 첫 회사 생활로 외롭던 내게 좋은 친구이자 선배가 되어 주었다.


우리는 한동안 잘 지냈다. 각자의 영역을 존중하면서, 또 나눌 것들은 잘 나누면서.

이렇게 훈훈하기만 했다면 나는 이 글을 여기서 마쳐야 했을 것이다.


한 달 반쯤이 지났을까, 새로운 입주자가 등장했다.

무려 월세 55짜리의 가장 큰 1인실에 들어온, 요주의 인물 C.




아침 출근 저녁 퇴근. 늦은 밤이나 새벽 귀가는 드물고, 만약 그럴 일이 있다면 서로가 무섭거나 예민해지지 않게 미리 말할 것. 우리에게는 셰어하우스 단톡 내의 공지사항이자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암묵적으로 예의라 여겨 지켜지는 것들이 있었다.


C는 등장과 동시에 그 모든 규칙을 산산이 깨부쉈다.


일단 생활 패턴부터가 맞지 않았다. 여러 증언을 합쳐본 결과 C는 오후 대여섯 시쯤 나가 이르면 밤 열한 시, 늦으면 새벽에 들어왔다. 특히 귀가 시간과 그 이후의 행동이 문제였다. 나는 워낙에 잠귀가 어두워 별 문제가 없었지만, A와 B는 C가 드나드는 새벽마다 잠을 설쳤다.


비단 잠귀만의 문제는 아닌 것이, C는 귀가할 때마다 꼭 누군가와 큰소리로 통화를 했다고 했다. 들어와서도 곱게 씻고 자는 게 아니라 주방 불을 켜고 한참을 부스럭거리고, 전자레인지를 돌리고, 주방 테이블에 앉아 뭘 먹으며 또 통화를 하고. 온갖 잡다한 소음을 내며 잠을 잘 수가 없게 한다고 했다.


한 번 잠이 들면 호랑이가 업어가도 모르는 나는 그 광경을 직접 목격하거나 들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모든 증언이 진실임은 다음날 방문만 열어도 알 수 있었다. 부엌 테이블은 온갖 음식 양념과 얼룩이 묻은 채였고, 싱크대에는 그릇이며 수저가 며칠씩 방치되었다. 전자레인지 안은 아무리 닦아내도 늘 튄 양념들로 지저분해졌다.


우리는 참았다. 오다가다 마주쳐도 먼저 인사는커녕, 하는 인사조차 받지 않고 사람을 한 번 슥 보고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사람과 괜한 다툼을 벌이지 않으려고 참았다.


물론, 참다 못해...


단톡에 역성을 내본 날도 없지는 않았지만 늘 그녀는 톡을 읽고 '씹었다'. 갈수록 빗발치는 원성에도 관리자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했고, 그녀를 내쫓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러자 보란 듯이 C의 행태는 더욱 악랄해져 갔다.




어느 날 새벽, 느닷없이 부서질 듯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쾅쾅쾅쾅. 쾅쾅쾅쾅! 이 집은 물론 아랫집까지 모조리 깨우고도 남을 굉음이었다. 천하의 내가 퍼뜩 놀라 잠에서 깨어났으니 아마 A와 B는 훨씬 전부터 깼을 것이었다. 눈을 뜨고도 계속해서 들리는 소리에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너무 무서워 밖을 내다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문이 열리는 소리와 말소리가 귓가에 웅웅 울렸다. 어둠 속 겁에 질린 상태여서 그런지 현관에서 가장 가까운 방이었음에도 말소리가 또렷이 들리지 않았다. 이윽고 말소리가 끊기며 문이 닫혔고, 그 뒤로도 몇 분을 더 뜬눈으로 버티다 다시 까무룩 잠이 들었다.


다음날 방문을 열고 나오자 A가 부엌 테이블에 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A는 나를 보자마자 물었다. 어제 소리 들었어?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A는 밥을 먹다 말고 숟가락을 꽉 쥔 채 이를 갈았다.


그 여자야. 그 미친 여자.

네?

제일 큰 방. 어제 그 여자가 또 배달 음식 시켜 먹었대.


머리가 띵 울렸다. 아니, 그 말인즉슨.... A는 잔뜩 화가 나 있었다. 지가 음식 시켜놓고 잠든 거지. 아니, 결제나 미리 해놓고 연락이 안 되면 앞에 놓고라도 갈 텐데 왜 결제는 안 하는 거야? 아무리 돈 받겠다고 한밤중에 남의 집 문 부서지게 두드리는 배달원도 웃기지만 근본적으로 그 여자가 미친 여자야.


아니, 근데 '또'라뇨? 더 충격적인 A의 말이 이어졌다. 이게 처음이 아니라고 했다. 이렇게까지 크게, 세게, 오래 두드린 경우가 처음일 뿐이지 그전에도 밤이며 새벽에 누군가 와서 문을 두드리고 현관 센서등을 켜는 일이 더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날 이후로 대문 앞에 써 붙였다.

<노크 사절!>


전쟁 같은 날들이었다.




이런 일들을 겪고도 나는 A와 B에 비해 뭉근하게 끓어올랐다. 어쩌면 그사이 새로 온 D보다도. 건조대에 널어둔 빨래를 3주씩 걷지 않는 일, 세탁기에 돌아간 빨래를 내버려 두고 문을 걸어 잠근 채 잠든 일, 앞서 말한 주방에서의 만행 같은 것은 수없이 함께 겪었지만 가장 직접적이고 짜증스러운, 밤잠을 설치고 공포에 떠는 일을 내 극도의 취침력 덕에 피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나조차도 결국은 터지고야 말았다. 아니, 터져야 했다.


아침 아홉 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출근 준비에 한창인데 갑자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지? 쎄한 기분을 애써 무시하고 고데기를 잡는데 다시 한번 쾅쾅, 문을 두들겼다.


출근 시각 8시 한 명, 9시 두 명, 10시 한 명과 저녁 출근의 C가 사는 우리 셰어하우스 구성상 그 시각 집에는 나와 C뿐이었다. 그날 밤 들었던 정도의 두들김이 되었을 때 나는 마지못해 문을 열고 나왔다.


저기요! 목소리에 괜한 안심이 되었다. 그제야 누구세요, 하고 묻자 배달이라는 대답이 들려왔다. 고개를 홱 돌려 굳게 닫힌 C의 방을 바라보았다. 눈이 절로 까뒤집혔다. 문을 열어주자 배달원이 질린다는 표정을 하고 서 있었다. 배달원은 문 앞의 <노크 사절!>을 가리키며 말했다.


주소 여기 맞는데요. 안 시키셨어요? 아니, 이거 봤는데, 안 두드릴 수가 있어야죠. 아무리 전화해도 전화를 안 받아요. 아, 나 미치겠네.

네, 제가 시킨 건 아닌데 누군지 알 것 같.... 잠시만요.


나는 조금 전 배달원에 빙의해 C의 방문을 부서질 듯 두드렸다. 한참을 두드리자 문이 열리더니 비몽사몽한 얼굴의 C가 보였다. 이 얼굴을 딱 한 대만 때려주면 소원이 없을 것 같다는 폭력적인 생각이 잠시 머리를 스쳤다. 이를 악물고 말했다.


배달 왔어요. 그쪽 거 맞죠? 아니, 뭘 시켜놓고 이렇게 자면 어떡해요? 누가 받으라고요?


그렇게 말하면 허둥지둥 일어나 나가면서 어머, 어떡하지, 하는 체면치레의 말이랄지 죄송해요 한마디쯤은 할 줄 알았다. 지나가는 말로라도, 반사적으로라도 그 정도 말은 나오지 않을까? 상식적으로? 그러나 멀뚱히 나를 쳐다보다 느릿느릿 몸을 일으켜 나가는 그녀는 생각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었다.


전화 달라고 했는데.


내 옆을 스쳐 가며 작게 읊조리는 것이었다.

미친.... 이 여자는 미친 여자다.


출근하자마자 업무 준비도 못 하고 톡 보내고 있던 날.




C가 재차 쏘아 올린 작은, 아니, 겁나 큰 공은 드디어 내 머리... 아니, 명치를 정통으로 후려쳤다.


배달 음식을 받은 C는 어이없다는 듯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나를 자연스럽게 지나쳐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더 따져 들고 싶었지만, 이미 회사에 늦었음을 직감하고 등을 돌려야 했다.


첫 지각이었다. '걸어서 이십 분이라며? 꼭 집 가까운 애들이 더 늦더라고' 같은 가벼운 돌려까기를 들으며, 분노의 장문 톡을 보낸 뒤 죽사발이 된 기분을 안고 일을 하는데 가슴께가 답답하더니 또 명치끝이 싸르르 아파왔다. 이러다 말겠지 했는데, 몇 날 며칠을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하며 지속되는 통증이 오늘따라 더한 것 같았다.


그래도 지각한 날 병원을 가겠다고 한두 시간 자리를 비울 엄두가 나지 않아서, 며칠 더 뒤에야 병원을 찾았다.


스트레스성 위염과 위경련이라고 했다. 제가요? 어리둥절한 채 약을 처방받아 나왔다. 살며 감기와 비염 외에는 병이랄 것을 만난 적이 없는 몸이었다. 나 자신도 믿을 수 없는 이 병명이 C가 쏘아 올린 공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하지만 이때의 나는 몰랐다.

내게는 아직도 도래하지 않은 몇 가지의 병력이 남아있다는 것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