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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셀라 Aug 19. 2023

착한며느리의 시작

나의 첫 번째 사업자등록증


2014년 1월 1일

송구영신 예배가 끝나고 어머님께서 나를 부르셨다.


기도하다가 응답을 받았는데
니 명의로 사업자 등록을
내는 게 하나님의 뜻 같다.



버거킹에서 새벽 한 시에 어머님과 단둘이 대화를 나눴다. 어머님은 지하에 식당을 하나 시작하셨는데 마음 좋은 주인이 보증금 없이 월세만 내고 주인이 낸 사업자와 통장을 빌려주어 무자본으로 장사를 하실 수 있었다.


돈 앞에 완전히 선한 자는 없는지 가게 주인은 어머님에게 왜 이걸 썼느냐, 매출이 왜 이것밖에 안 되느냐, 가게를 왜 쉬었느냐 등등의 일로 참견을 시작했다.


어머님은 탈출하고 싶으셨지만 어머님 보증을 서 1억 이상의 빚을 지고 신용불량자가 된 남편과 같은 빚을 지고있는 어머님은 대출도 사업자도 낼 수 없었다. 지금은 도련님이 된 남편의 동생도 아버님도 절대 해주시지 않았다.

가게를 망한 전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업가의 딸인 탓인지 나는 남편에게 말하곤 했다.


오빠 1억은 그렇게 큰 빚이 아니야. 10억 50억 빚지고도 다시 일어나는 사람 많아.


상황을 지켜보던 나는 며칠 기도해 보겠다 미루지 않고 그 자리에서 수락을 해버렸다.

어머님은 기뻐하시며 내 두 손을 잡으셨다. 그리곤 신신당부하셨다.


너희 엄마한텐 절대
말하면 안 된다
절대!




27살이면 성인이라고 여겼기에 몇 번이고 하시는 당부에 비장하게 끄덕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머니가 생각해도 그건 옳은 일이 아니었으니까 숨기셨던 거겠지.


보통의 어른이라면 네가 하고 싶어도 어머니께 허락을 받고 와라. 너희가 결혼을 약속했더라도 아직 결혼을 한건 아니잖니. 결혼하기 전에 흠을 만들긴 싫구나.라고 말했겠지.


유럽에서 도는 아시아 마케팅 공략집에서 말하길 한국인과 계약할 때는 그 자리에서 끝내야 한다고 한다. 한국인만큼 성격이 급하고 감정이 확확 바뀌는 민족이 없다나.


아주 오랜만에 엄마와 두동생과 영화를 보러 갔던 평일 저녁. 엄마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가정폭력센터에서 나와 겨우 500에 50짜리 빌라로 독립하게 된 우리는 행복했다. 엄마는 아직 암투병 중이었지만 기초수급자가 되어 아직 미성년자인 두 동생을 건사하고 병원비를 충당할 수 있게 되었다. 영화는 문화바우처였다.


앞으로 일을 해야 하는데 하고 걱정하는 나보고 한 달에 80만 원 이상은 벌면 안 된다고 한다. 수급비가 깎인다면서. 그 말을 듣는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머님과의 구두계약이 떠올랐다. 식당을 하게 되면 수입이 80만 원 이상 잡히게 될 텐데. 엄마와 상의를 하니 말 그대로 노발대발하며 왜 엄마와 상의도 하지 않고 그런 일을 하냐고 화를 내셨다.


엄마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어머님을

찾아가 이야기했다. 못 할 것 같다고.


어머님은 불같이 화를 내셨다.



당연히 반대하지. 그러니까 말하지 말라고 했잖아! 어디서 저런 개뼉다귀 같은 게 굴러와선. 꼴도 보기 싫으니까 나가!


어렸던 나는 뮤지컬을 하며 고된 일을 겪고 혼나도 좀처럼 눈물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눈물이 줄줄 났다. 내가 왜 저런 말을 들어야 하지?


돈도 없고 갈 곳도 없던 나와 남편은 우선 남편의 집으로 갔다. 남편도 답답해했다.


그러니까 내가 하지 말라니까. 불안하더라니.


오빠는 하지 말라고 한 적이 없었다. 그저 네가 하겠다면 알겠다고만 했다. 자신의 가족이 얼마나 급한 상황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를 적극적으로 만류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고민했다. 만약에 사업자를 하지 않으면 오빠와 헤어져야 할 것 같았다. 이미 어머님께 미운털이 박혔으니 말이다. 그래서 다시 결심했다.


이건 명백한 나의 잘못이었다. 끝까지 거절했어야 했다. 집으로 바로 갔어야 했다.


다시 가서 어머님께 잘못했다고 했다. 지금의 mz나 똑똑한 사람이라면 내가 왜 저런 말을 들어야 해?라고 생각했을 텐데 그렇게 되면 남편과 헤어져야 했다. 남편을 세우고 싶었다. 그 빚의 구렁텅이에서 꺼내고 싶었다. 이미 할 수 있다고 희망도 잔뜩 준 뒤였다.


어머님은 분이 안 풀리셨는지 나에게 계속 언성을 높이시다가 몇 번이고 잘못했다고 하는 나에게 꺾이셨다. 그래서 이젠 진짜 비밀로 사업자를 내기로 했다.


그래서 남편의 집에서 머무르며 남편과 영업신고를 하고 사업자 등록을 하고 보증금용으로 창업 대출을 받았다.

순식간이었다. 사업자를 내기 위해 남편의 주소로 전입했다. 암묵적으로 우리는 결혼한 것과 진배없는 사이가 되었다.


창업대출받은 돈은 고스란히 어머님께 드렸다. 어머님께서 잘 갚겠다고 못 마땅한 얼굴로 말씀하셨다. 안 한다고 한 순간, 어머님의 통제에서 벗어나 엄마에게 말한 순간부터 이미 내가 맘에 들지 않으셨던 것이다.


내 명의로 사업자를 낸 것을 주변에 알리기 싫어하셨다. 명백하게 이상한 그림이라는 사실을 아셨던 것이다. 분명 본인이 제시하셨는데.


나는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다. 하늘아래 부끄러운 것이 별로 없다. 그래서 그냥 얘기해서 주변 사람들이 알고 있다는 사실이 어머님껜 껄끄러운 일이었다. 어머님은 내가 비밀로 끌어안길 바라셨다. 하지만 바꿔서 되묻고 싶다. 본인이라면 그렇게 하실 수 있으신지?


외가 쪽 식구들이 엄마의 말을 듣고 가게로 몰려왔다. 어디 귀한 조카딸을 잘못 이용해 사기 치나 싶으셨던 것이다. 남편은 그 일을 아직도 속상해한다. 하지만 남편의 친가나 외가라면 똑같은 반응 아니었을까?


대출은 여러 번 연체되었다. 세금신고를 늦게 하시거나 제대로 비용처리를 하지 않아서 부가세를 폭탄으로 받으셨다. 미리 준비해 놓은 돈이 없어 일 년이고 이년이고 부가세가 밀려있었다.


연체 연락은 내가 직접 받았다. 사업자를 낸 그 해에 남편과 결혼했으니 아이가 생기고 아이와 집에 단둘이 있을 때도 각종 연체 문자에 시달렸다.

남편과 어머님과 거의 매일 통화하고 일요일에는 기본적으로 하루종일 같이 있었으니 가게 사정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참고 참다가 남편에게만 문자를 보여주었다.


세금에 대한 지식이 없던 나는 대리 경험을 통해 사업을 배웠다. 부가가치세 신고와 종소세 신고 건강보험과 4대 보험. 인건비와 각종 세금 혜택 등을 그때 공부하게 되었다.


알게 된 것들을 말씀드리면 딱딱하게 말한다며 싫어하셨다. 돈 앞에선 칼 같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서로 섭섭함이 없다.


어머님은 주변 사람들을 다 섭섭하게 만드시면서도 섭섭하다는 한마디를 들으시면 펄떡 날뛰는 감정적인 분이었다. 자기는 굉장히 후하다는 착각을 하시는 분이셨다. 사업을 했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은행이나 세금 전산처리를 모르셨다. 그런 어머니에게 딱딱하고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집에 아무도 없었다. 남자들은 어머님이 겪고 있는 중압감에는 관심이 없고 단지 빚액수만 운운하며 해결해주려고 하지 않았고 어머님께 책임전가를 했다. 나는 직감했다. 이걸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다.


너무 정확하게 얘기해서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가끔씩 퍼부어대시거나 흘기는 눈으로 보시긴 했지만 어머님을 건지기 위해서 애썼다.


근데 그것 아는가? 도움을 받는 사람이 그 도움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 알고 고마움을 느끼기는 어렵다.


몇 년 간의 인내에도 내가 고맙다는 말을 듣기 시작한 것은 남편과 이혼을 각오하고 카페를 한다는 핑계로 내 사업자를 빼왔을 때였다.


정말 고마우셨던 거겠지. 그 진심을 오해하진 않는다. 근데 그 고맙다는 말을 듣기 전까지 너무 오랜 시간 맘고생을 했다.


그래도 내 첫 사업자를 시작할 때 받았던 신용 대출은 겨우겨우 5년 만에 끝나있었다. 카페를 시작한 건 2019년. 아버님께 식당 사업자를 양도하고도 내 부가가치세는 약 8개월 남짓을 남아있었다.


어쨌거나 다 갚으셨다. 그러실 것이라 믿고 기다렸다. 다 갚은 그날 너무 고생 많으셨어요.라고만 했다. 그렇게 내 첫 사업자등록증은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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