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의 경계에 선을 긋는 법
오랫동안 가라앉은 마음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투명한 유리문을 반듯이 닫고 나가던 P의 모습이 무겁게 나를 끌어내렸다. 뜨거운 해에 그슬려 거무잡잡한 얼굴에 핏기가 없었던 그녀. 나는 P를 붙잡지도, 쿨하게 보내지도 못했다.
'그냥 제가 힘들어서 그래요. 누구 때문도 아니에요'
회사에 들어온 지 1년이 막 지난 P는 결심을 내린 듯했다. 나는 결정문을 망설임 없이 읽어내리는 그녀의 입술을 바라보며 지나온 시간을 돌렸다. 얼마 전까지 농담을 주고받으며 함께 밥을 먹자고 했던 순간들. 골치 아픈 일을 해결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었던 일, 어쩌면 나와 제일 결이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동료.
그런 P의 어려움을 나는 왜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왜 그녀는 내게 이런 상황을 더 일찍 알려주지 않았을까. 모든 게 나의 책임 같았다. 내가 상사로서 좀 더 이 사람의 어려움을 알아차리기 위해 더 노력해야 했던 건 아닐까. 그럼 내가 이런 상황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나는 왜 너를 다 알지 못했을까?'
함께 일하는 직원들의 마음을 깊게 알지 못했던 내가 한심했다. 당신을 어느 정도 안다고, 그래서 적어도 이 회사 안에서 나는 너를 품을 수 있다 생각했다.
구명조끼도 없이 겁 없이 뛰어든 푸른 바다에서,
나는 처음으로 아주 짙은 어둠을 보았다.
짜디짠 소금물이 숨 쉴 틈 없이 코를 타고 들어와 목을 넘었다. 얕은 물에서 두둥실 유연히 떠다니며 함께 시간을 보냈던 나의 바다. 그것만으로도 바다를 다 안다고 착각했다. 그리고, 내가 너를 통제할 수 있다고도.
P가 이별을 고했던 날, 같은 질문이 속에서 끼익- 쇳소리를 내며 마음을 긁고 올라왔다.
'나는 왜? 왜 몰랐을까'
동료들의 마음에 닿기 위해 언제나 진심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누구보다 잘하고 있다고. 날카롭게 긁힌 흔적을 따라, 펄펄 끓던 자부심이 왈칵 흘렀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살피는 일 또한 나의 업무라 생각했는데.
책임을 다하지 못한 상사가 된 듯했다
그간 '책임'이라는 단어를 지키기 위해 분투했던 순간들이 머리를 스쳤다. 내가 결재하는 문서에 실수가 있다면, 함께 일하는 직원이 무언가를 놓쳤다면 나의 잘못이다.
생각해 보면 이 위치에 서고 나서부터는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황이, 사람들이 내가 감당해야 할 숙제 같았다. 계획대로 숙제를 풀고, 끝마쳐야 마음이 편해지는 극 'J' 성향의 나.
벌어질 대로 벌어진 마음을 부여잡고 천장을 보며 멍을 때리던 그 주말, 남편이 얼음을 띄운 물을 가져다주며 말했다.
'아니 말하지도 않은 마음까지, 어떻게 알아?
정말 누군가의 마음 속 어려움까지 다 알고, 보듬어야 된다 생각해?
그게 진짜 상사의 업무고 책임이야?'
새빨간 자부심을 용암처럼 꿀렁이며 뱉어내던 마음이 한순간 굳었다. 그리곤 벌어진 마음 틈새로 한없이 작아진 내가 내게 물었다.
'P의 마음을 알고 싶었던 게, 정말 그녀를 위한 일이었어?'
그래. 어쩌면 나는 모든 상황을 내 예상대로 통제하지 못한 내가 더 안타까웠다. 책임이란 범위 안에, 너라는 사람까지 꾸역꾸역 욱여넣고 잘하고 있다 착각했던 나의 자만. 너의 어려움보다, 그 자만을 지키지 못한 것이 어쩌면 더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마음속을 가득 채우던 욕심을 비워내고 나니 머리가 깨끗해졌다.
P가 떠난 이후, 내 책임에도 경계선이 생겼다. 함께 일하는 과정에서 위기가 오면 앞에 서는 것, 판단이 필요할 때 결정을 미루지 않는 것. 혹여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책임을 피하지 않는 것.
그러나 말하지 않은 마음까지 먼저 알아차리려 애쓰는 일, 그 사람의 내면까지 나의 몫이라 여기던 생각은 내려놓았다. 한때 그것조차 책임이라 믿었던 자만은 버렸다.
다만, 언젠가 당신이 스스로 마음을 꺼낸다면, 나는 기꺼이 듣겠다. 그건 책임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나누는 진심일 뿐이니까.
책임의 경계가 생긴 뒤로, 전과는 다른 소망이 생겼다. 말없이 회의실을 나서는 동료를 보며, 나는 더 이상 이유를 애써 짐작하지 않는다. 대신 마음속으로 조용히 속삭인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잘 지나가길'
P가 떠난 날을 기점으로 나는 새로운 책임과 함께 일한다. 그리고 또 당신을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