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기다릴께요
시간만큼 개인적인 것이 있을까.
내가 소유한 것 중에 가장 값비싼 것. 누구와도 쉽사리 나눌 수 없는 것. 우리는 유독 시간을 나누어 주는 것에 참 인색하다. 기다리는 시간이 아까워서 쿠팡 새벽배송을 하고, 놀이동산 큐패스를 끊고, 어플로 줄 서기를 하며 맛집 웨이팅을 휙 건너뛴다. 헛되이 쓰고 싶지 않은 나의 시간.
나도 그렇다. 시간을 나누어 써야 한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쭉 뻗은 시침과 분침은 늘 나를 중심으로 둥글게 돌았다. 정해진 시간에 출근해 정돈된 사무실에서 메일을 읽고 보고서를 쓰는 일. 가끔 업무가 밀려도 긴급이 아니라면 저녁에 있는 약속과 운동이 우선이었다. 언제나 내가 주인공이 되는 순간이 더 우선이었던 나.
그런 나의 고고한 일상에 어느 순간 불청객이 찾아왔다. 노크도 예고도 없이 찾아온 단발의 그녀, 신입직원 E양. 언제나 굳건할 것 같던 나의 시간은, 상사라는 간판아래 맥없이 흔들리는 풍선이 되었다. 처음으로 내 시계가 멈췄던 날, 나는 전투를 결심했다. 그게 결코 이길 수 없는 전투인 것도 모르고.
중요한 보고서 마감이 일주일이 채 남지 않아 마음이 급했다. 출근하면 일단 그 보고서부터 검토해서 빨리 털어야지. 샤워를 하면서 할 일들을 정리하고 개운한 마음으로 출근했던 그날. E양이 보여주기로 한 보고서가 약속한 아침 9시가 지나도 오지 않았다.
지금쯤 와야 하는데. 허공을 응시하며 이빨로 손톱을 깨작깨작 뜯었다. 불만을 억지로 삼킬 때 나오는 습관.
'물어봐야 하나 말아야 하나.. 기다리면 말이 있겠지.'
급해서 쪼는 상사가 되고 싶진 않았다. 여유 있게 기다려주고 우아하게 받아주고 싶었다. 그런데 10분, 20분, 30분이 넘어가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고고하고픈 상사의 마음은 사라지고, 시킨 물건이 제때 안 와서 짜증 난 소비자가 되고 있었다.
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데! 언제까지 기다리고 참아야 돼? 늦으면 늦는다고 말이라도 하든가. 참지 못한 나는 기계식 키보드의 리듬을 살려 메신저를 날렸다.
"오늘 9시까지 저한테 A보고서 초안 써서 주기로 하지 않으셨나요?"
"아, 맞다. 여기 있습니다~!"
경쾌한 물결이 날리는 그녀의 메신저 끝에 달린 파일 하나.
'그래도 했으니 다행이네' 하며 빛의 속도로 클릭한 순간. 아찔했다. 회사 들어온 지 얼마 안 됐다는 건 알지만, 이럴 수가. 이건 마치 뜨거운 불 앞에 궁중팬을 올려두고 볶을 준비를 하는데, 재료는 듬성듬성 썰려 있는 상태.
'와… 이걸 어떻게 볶지? 처음부터 다시 썰어야 하는 거 아닌가?
지금 손님한테 당장 음식이 나가야 하는데, E에게 다시 재료를 썰라고 할 순 없다. 마음이 급한 나는 팔을 걷어 부치고 칼을 들었다. 그리곤 도마에서 사정없이 칼을 탕탕 내리치며 생각했다.
'그냥 다 내가 할까. 그게 더 빠른 것 같은데'
남편이 저녁 설거지를 마치고 나와, 물 묻은 손을 티셔츠에 쓱쓱 문지르며 장난스레 말했다.
"게임 한판? 신기록 고고?"
요새 2인용 닌텐도 스위치 요리게임에 푹 빠진 나는 주저 없이 콜을 외쳤다. 두 명이서 역할을 나눠서 시간 내에 음식을 완성해 몬스터를 무찌르는 스토리. 서로 크로스를 외치며 결의를 다지던 것도 한때, 나는 신경질을 내며 외쳤다.
"아, 바꿔 바꿔. 그냥 내가 썰 테니까 오빠가 끓여서 서빙해"
"아 조금만 기다려봐. 아직 이거 맵이 안 익숙해서 그래"
"아니, 그러니까 내가 한다고. 바꾸자니까"
땀으로 얼룩진 조이스틱이 미끌거렸다. 처음엔 재밌자고 시작한 게임이었는데 마음이 급한 우리는 게임 안에서 사정없이 부딪혔다. 참다못한 남편이 한마디 했다.
"나 좀 기다려줘. 딱 10분만 연습 좀 해보자."
남편의 단호한 명령어에 나는 소파에 드러누웠다
"어디 10분 연습한다고 그게 되나 보자. 그게 다 감각이야 감각~"
괜히 놀리는 말을 하며 남편을 바라봤다. 몸을 좌우로 흔들며 재료를 써는 그의 모습은 진지했다. 누군가 무언가를 익히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 함께 무언가를 하기 위해 기다려보는 것. 오랜만이었다.
10분 뒤, 남편은 보란 듯이 나와 호흡을 맞췄다. 신기록은 아니지만 스테이지 클리어. 옥신각신하던 시간들이 없던 마냥, 우리는 역시! 최고 호흡! 을 외치며 낄낄 거렸다. 팀전으로 짜인 이 게임에서,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나는 몰랐던 걸까.
몰랐던 게 아니라, 생각을 안 했다. 어쩌면 누군가의 기다림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엄마니까, 선생님이니까, 친구니까, 남편이니까, 상사니까-'
정해진 시간에 밥을 먹고, 출근을 하고, 정돈된 사무실을 쓴다는 것. 내 중심으로, 내가 계획해서 쓰고 있다고 생각했던 모든 시간들에 누군가의 기다림이 있었다. 그것들이 당연하지 않았다는 걸, 내 시간을 써야 할 때가 돼서야 알았다. 그간 나와 함께 일한 누군가는 얼마나 나를 기다렸을까.
언젠가 내가 쓴 보고서를 다 뽑아서 빨간펜을 들었던 팀장님을 생각해 본다. 막 들어온 신입을 옆에 앉혀놓고 교정을 봐주던 팀장님. 내가 써온 보고서에 꼼꼼히 수정의견을 담아 고쳐보라고 했던 과장님. 내가 빌려 쓴 그들의 시간을 합치면 대체 나는 몇 살이 될까.
나는 기다리는 게 참 어렵다. 무엇보다 잘 모르는 당신을 위해 시간을 쓰는 게 참 힘들다. 그래도 이제는 안다. 기다림 없이 이 게임에서 누구도 이길 수 없다는 걸. 그리고 기다리는 게 어쩌면 내게 주어진 역할이라는 걸.
다만, 그 기다림이 너무 오래 걸리진 않기를 소망한다. 그래서 이 마음이 변치 않길 바라본다.
내게도 나의 시간은 아직 너무 소중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