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분이 당신의 하루가 된다면

무지개를 띄워드리고 싶어요

by Anne H



팀장님의 기분은 우리 모두의 ‘날씨’였다.



눈을 뜨면 제일 먼저 날씨 예보를 본다. 핸드폰에 뜬 오늘의 최고기온과 최저기온. 비가 언제 얼마나 오는지 확인한다. 그리곤 잠이 덜 깬 무거운 몸을 끌고 옷방에 철푸덕. 가디건을 입을까, 우산은 들고나갈까 말까. 하루를 시작하기 위한 준비운동이라고 해야 하나.


사무실에서 기상캐스터 역할을 한 적이 있다. 날씨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에 위치했던 내 자리. 그 덕에 나는 출근해서 한두 시간이 지나면 같이 일하는 동료들에게 쪽지를 돌리곤 했다.


'오늘 하루는 대체로 맑지만, 때때로 비가 내리거나 천둥이 칠 예정입니다.'


아 물론, 가끔 예보가 바뀌기도 한다. 당최 하늘이란 변화무쌍한 것이니까. 주로 이런 경우다. 팀장님이 어디 미팅을 다녀왔는데,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을 때. 평소엔 잘 넘어가던 일에 갑자기 짜증을 부릴 때. 무엇보다 한숨이 늘어나거나, 말끝이 날카로워지면 딱 감이 온다.


'아, 오늘 폭우가 올 수도 있겠구나.'


그럼 나는 비를 피할 방법을 생각해 본다. 피할 수 없는 날엔 마음에 우비라도 뒤집어 씌운다. 적어도 젖지는 말자. 어쩌다 비를 홀딱 맞은 마음은, 젖은 양말처럼 온종일 찝찝했다. 특히 폭발해 버린 짜증이 우박처럼 쏟아질 땐 온몸에 멍이 들었다.


'내가 그렇게 만만한가? 화를 낸다고 무엇이 달라지나?'


힘든 순간들이 있었다. 누군가의 감정을 온전히 맨몸으로 뒤집어 쓸 때. 자신이 감당하지 못하는 감정을 누군들 받을 수 있겠는가. 물어보고 싶었다. 그렇게 화를 내서 달라지는 것이 무엇이 있는지.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는 말은 틀렸다. 사무실에서 상사가 나누는 슬픔과 분노는, 언제나 배가 되어 돌아왔기에.






"과장님, 오늘 많이 피곤하세요?"

"네? 그렇게 막 힘든 건 아닌데, 조금 그런가 봐요"


잘 찾아오지 않는 두통으로 괴로운 날이었다. 미팅도 수두룩인데, 왜 이렇게 타 부서 요청자료도 많은 건지. 메일 말머리는 '양해해 주셔서 미리 감사드립니다'라고 쓰여있었다. 평소 같으면 그러려니 할 텐데, 짜증이 올라왔다. 뭘 미리 감사한다는 거야.


카페인이 필요했다. 아주 진하고 뜨거운 카페인. 슬리퍼를 질질 끌고 탕비실에 갔다. 생각 없이 에스프레소 캡슐을 골라 넣고 버튼을 눌렀다. 쪼르륵- 새까맣게 어두운 커피가 머그잔에 채워지던 그때, 막내 직원이 내게 와 말했다.


"과장님, 오늘 피곤하시다면서요. 아휴. 요새 진짜 일이 많긴 해요"


잉? 아까 다른 직원이랑 말하자마자 커피 내리러 온 건데 어떻게 알았지? 카페인이 들어간 것도 아닌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내 기분이, 상태가 이렇게 짧은 시간에 전달되다니. 그 순간 기상캐스터였던 내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언제나 팀장님의 기분을 살피던 나의 모습. 나는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답했다.


"아, 어제 좀 설쳤는데, 이제 괜찮아요. 커피 한방이면 끝이지 뭐. 카페인 중독인가 봐"


커피를 찰랑이며 자리로 돌아오는 길에 오만가지 생각이 스쳤다. 이제 내가 누군가의 날씨가 될 수도 있겠구나. 내가 누군가의 상사라는게 실감이 났다. 순간 아무 생각 없이 편하게 팀원들을 대했던 내 모습이 스쳐갔다. 나의 피곤한 표정, 한숨 한 번이 누군가의 하루를 바꿀 수도 있다는 것. 회사에서의 내 감정은, 이제 더 이상 ‘나만의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간 변화무쌍한 기분으로 나를 힘들게 했던 사람들을 떠올려 본다. 내 잘못도 아닌데 느닷없이 갑자기 내게 화를 냈던 선배. 개인적인 일로 예민해져서 하루 종일 인상을 쓰고 있던 상사. 축 가라앉은 사무실에 숨이 턱 막힐 것 같았던 회의실 분위기. 싫었다. 내가 되고 싶은 모습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날씨가 될 수 있을까?



적어도 내가 겪은 힘듦을 주고 싶진 않았다. 일에 대한 경우도 마찬가지다. 화를 낸다고 직원의 능률이 더 오르나? 안 써지던 보고서가 갑자기 잘 써지나? 감정을 앞세운 말은 늘 가시가 돋아 서로를 다치게 했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이왕이면 사시사철 따뜻한 날씨가 되겠다고.


너무 차갑지도 덥지도 않은 따뜻한 기온. 가끔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기분 좋은 날씨. 빡빡한 일상에서도 잠시 쏘는 햇빛, 살랑이는 바람에 기분이 좋아지는 것처럼. 언젠가 팀원이 속상하고 힘들다고 털어놓을 때, 축 쳐진 마음을 바싹 말려줄 수 있는. 비가 올지, 눈이 올지 애써 점치지 않아도 되는 불안하지 않은 하루. 그런 하루를 만들 수 있다면 어떨까.





출근하자마자 탕비실로 향하는 길. 최대한 환하게 웃으며 "좋은 아침! 굿모닝입니다!"를 외친다. 어제 내가 얼마나 슬펐고, 오늘 내가 얼마나 피곤한지는 잠시 묻어둔다. 그건 오롯이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기에.


어느 날, 엘리베이터에서 이제 막 일을 시작한 인턴을 만났다.


"요새 일 어때요? 할만해요? 힘들지 않아요?"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조금은 흥분된 목소리로 답했다.


"과장님이랑 일하면서 일도 즐거운 마음으로 할 수 있다는 걸 느꼈어요!

매번 밝고 긍정적으로 하시니까 저도 즐거운 것 같아요"


오늘은 너무 피곤한걸 보인게 아닐까, 예민하게 말하지 않았나? 고민하며 털렁털렁 돌아가던 수많은 퇴근길들. 그 외롭고 길었던 길을 위로해 주는 그녀의 한마디에 나는 울컥 마음이 차올랐다.


"D 씨가 그렇게 말해주니 고마운걸. 어차피 할 일 인상 쓰며 하면 뭐 하겠어요.

이왕 하는 게 즐겁게 아자아자 파이팅 해봅시다!"


누군가의 따뜻한 응원, 오늘의 피곤함을 씩씩하게 구석에 밀어 넣는다. 띵동,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나는 힘차게 사무실 문을 열며 소망해 본다. 내일은 비가 올지 모르지만, 적어도 내가 만드는 당신의 하늘은 맑기를



내 기분이 당신의 하루라면,
언젠가 그 하늘에 무지개를 띄울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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