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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케터 로스코 Sep 09. 2020

성소수자에 대한 미디어의 시선

왜 우리는 편견을 가질까?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나지 않는다. 인종, 젠더, 유전된 신체적 우월성(장애, 체격 따위), 계층 등, 우리는 어떤 면에서 모두 소수자가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특정 개인 혹은 집단을 차별한다. 범지역적으로 성소수자, 흑인, 여성, 장애인, 범죄자가 차별의 대상으로 손꼽힌다. 그들을 향한 차별의 매개체는 편견이며, 편견을 가중하는 것은 미디어다. 

 국내 성소수자를 상대로 한 미디어의 확증편향은 성소수자에 대한 미디어의 시선(박지훈,2013)에서 명쾌히 드러난다. 본 연구에서는 소수자들에 대한 미디어의 ‘과소재현(underrepresentation)’과 ‘왜곡된 재현(misrepresentation)’ 그리고 ‘스테레오타이핑(stereotyping)’을 중심으로 국내 대표 성소수자인 홍석천과 하리수를 해석했다. 그 결과 2000년대부터 약 10여 년간 미디어는 홍석천과 하리수를 안전한 이성애 규범성 속에 포섭해왔고, 그들이 겪는 편견은 개인적인 차원으로 한정했으며, 그들의 욕망을 희화화하여 호모포비아의 대상으로 연출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출처 : <코미디빅리그> tvN 


 왜 미디어는 전통적인 젠더 규범을 고수하고,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을 재생산할까? 우선 편견에 대한 정의를 살펴보면, ‘어떤 사람이 어떤 집단에 속하고 그래서 그가 그 집단에 귀속되는 못마땅한 성질이 있을 것이라 추정된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에게 드러내는 회피적이거나 적대적 태도’를 뜻한다. 그렇다면 왜 특정인에게 못마땅한 성질이 있을 것이라고 예단할까? 사회심리학자 고든 올포트의 저서 편견에 의하면 이는 인간의 가장 흔한 버릇인 ‘과잉 범주화(overcategorization)’ 때문이다.


 과잉 범주화는 매 순간 일어난다. 필자의 경우 직장에서 몇몇 무례한 중국인과 인도인을 만났다. 이후 몇몇의 중국인과 인도인은 내재적인 관념에서 집단으로 확대되어 무례한 인종으로 분류되었다. 세상의 모든 중국인과 인도인을 경험해본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번의 경험을 일반화하는 통계의 오류를 범한다. 이는 인간의 뇌 속에서 정보를 전달하는 뉴런들의 활동과 닮아 있다. 뉴런들은 외부 자극을 시냅스를 통해 다른 뉴런으로 전달하여 신경 가소성을 형성한다. 유용하다고 인지된 정보는 장기기억으로 전환되어 자동화에 기여한다. 


 자동화된 메커니즘은 인간의 생존본능을 높여 왔고, 삶의 용이성을 확장해왔다. 푸른 사과는 덜 익은 것을 상징했고, 붉은 사과는 에너지 원을 상징했다. 그리고 검게 변한 사과는 질병을 상징했다. 검은 사과를 먹고 탈이 난 인류가 푸른, 혹은 붉은 색깔 외에 다른 빛깔의 사과를 계속 먹었다간 병약해지기 십상이다. 결국 인간은 본인이 규정한 안전한 결과 값을 구축하기 위해 과잉 범주화를 기꺼이 이행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오류는 감수한다. 그래야만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인지적 구두쇠이고, 다시 말해 편견은 부정적인 정보를 빠르게 판정해 기능적 용의성을 높이는 (생존) 본능의 일부이다.


 편견의 구성비의 전부가 본능은 아니며, 편견은 맹목적으로 합리화될 수 없다. 본능이 편견의 국소적 일부라면, 성장 환경이나 사회문화적 배경과 같은 외재적인 요인의 지분은 어느 정도일까? 사회 구성원들은 어떤 문화 내부의 일부 관행에 대해서 그 문화가 내리는 도덕적 평가에 따라 편견을 확립한다. 미디어는 성소수자들에 대해 다음과 같은 태도를 승인하지 않는다. 미디어는 성소수자들을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에 근거한 남성성과 여성성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존재로 함의한다. 푸코는 성에 대한 담론이 일정한 틀에 따라 생산/조절된다고 보았다. 일정한 틀의 핵심에는 권력의 테크놀로지가 있다. 그것은 ‘성에 담론 영역들’을 조작하면서 성을 일정하게 생산하고 소비한다.


 미디어는 성소수자들에 대한 담론을 필요에 따라 조작하면서 ‘일정하게’ 생산하고 소비해왔다. 일정한 생산 속도는 정책과 톱니바퀴가 맞물린다. 미국 공립학교의 인종 분리 정책이 위헌이라고 결정 난 역사적인 사건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판결’을 1955년 연방대법원이 신중한 속도로 이행하라고 명령했다. 올포트는 이에 대해 1958년 앵커 출판사판 편견 서문에서 인종 차별 철폐는 “단호하게 집행된 행정 명령을 통해 가장 쉽게 달성된다.”라고 비판했다. 그는 인종 통합은 대부분의 시민들에게 거의 저항이나 동요 없이 기정사실로 수용된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인종 통합이 그들의 편견을 거스를지라도 양심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KBS는 시청자 위원회 출범 30주년을 맞아 방송제작 가이드라인에 성소수자 차별금지를 명문화했다고 밝혔다. 반면, 논문이 쓰인 시기에서 7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소수자들을 보호하는 참여 금지법과 같은 제도적 장치는 마련되지 않고 있다. 올포트의 의견처럼 입법, 행정부가 강제하면 다수 시민들의 양심에 따라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거세하고 동등하게 대우할 수 있을지 미지수이다. 서울 신촌역에서는 지난 7월 말부터 한 달간 게재되었던 성소수자 차별 반대 광고판을 한 사람이 6번 훼손하는 범죄가 발생했다. 

 이 남성은 우리 구성원들이 동조한 관념과 행위를 대변한 것일 뿐일까, 아니면 개인적인 부정적 감정에 동해 범죄를 저지른 것일까? 성소수자를 거부하는 태도는 다음과 같은 유형으로 분류될 수 있다. 1. 적대적인 말 2. 회피 3. 차별 4. 물리적 공격 5. 절멸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적개심을 지인과 일상적인 대화에서 그친다. 그러나 몇몇은 차별을 물리적 위협으로 발전시킨다. 소수의 동인은 무엇일까?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은 어떤 행태를 띌까? 또한 편견의 감도가 낮은 적대적인 말은 용인되어도 괜찮을까? 개그 프로에서 홍석천을 희화한 대화가 당시에는 왜 문제 시 되지 않았을까? 


 성소수자들의 커뮤니티에 들어가 이성애자임을 말하고, 불편하면 퇴장하겠다고 밝혔다. 돌아온 답변은 ‘다 똑같은 사람이지 않느냐’였다. 반대로 일반인들의 친목 커뮤니티에 입장해서 ‘레즈비언’ 임을 밝혔다. 결과는 강제 퇴장이었다. 상반된 경험이 낯설었다. 


 우리 사회가 성소수자를 바라보는 시점이 5가지 유형에서 어디에 머물러 있을까? 미디어가 성소수자를 바라보는 시점은 어느 정도 폭력적일까?



■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에 대한 논의


Q1. 편견은 가치 개념인가? 

일부 학자들이 생각하는 편견은 사회에서 윤리적으로 승인되지 않은 예단의 일종이다. 판사에게 어린 학생들이 작성한 글을 보여주고 편견이 나타나는 정도에 따라 분류를 요청했다. 학생들이 여학생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며, 선생님을 나쁘게 말하는 것은 편견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가 노동조합, 사회 계급, 인종을 향해 적의를 내뿜으면 편견으로 판단하는 경우가 많았다. 불공정한 태도에 사회적 중요도가 판사들이 편견을 구분 짓는 관점에 영향을 끼쳤다. 성소수자 차별에 대한 사회적 중요도가 10년 전과 비교해 어떻게 달라졌는가. 그리고 이 인식의 차이는 궁극적으로 제도를 바꾸는 데 성공했는가?


Q2. 편견은 인간의 본능인가? 편견의 합리성은 어디까지일까? 

편견은 과잉 범주화에서 비롯된다. 과잉 범주화는 전체를 다 파악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로 전체를 일반화한다. 인간에게는 거울 뉴런(Mirror Neuron)이 있다. 거울 뉴런을 통해 얼굴 형상을 한 개체의 감정이나 행동을 즉각적으로 공감하고 묘사한다. 이는 구성은 동일하지만, 생김새가 모두 달랐던 인간의 얼굴 표정을 빨리 학습하고, 그렇게 얻은 정보로부터 상대가 나에게 호의적인지 호전적인지를 즉각적으로 판별하는 기능을 한다.  '러시아 사람들은 표정이 어둡다. 그렇기에 그들은 불친절할 거야.'라는 편견을 가졌다고 보자. 이 중 어디까지가 합리적이며, 어디까지가 비합리적인 편견일까? 


Q3. 편견은 개인 성격의 특질인가, 사회가 유도한 결과물인가? 

둘 다 편견을 구성한다면, 무엇의 역할이 더 클까? 

인간의 편견은 본능의 일부이다. 편견은 외집단을 배척하는 인간의 공통된 사회적 행태이다. 인간은 사회적 결여 감을 느끼면 우울감을 호소하며 지속될 경우 자살 충동을 느끼는 존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을 포용하지 않고, 배척하는 이유는 그렇게 함으로써 본인이 규정한 내집단의 소속감을 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 때부터 다양한 인종과 어울린 경우, 소수 인종에 대한 배타심이 적다는 연구가 있다. 편견은 개인의 주체적으로 형성한 특질일까? 혹은 사회, 미디어가 조장한 것일까? 둘 중 편견을 타파하기 위한 목적으로, 우리는 무엇부터 개선해야 할까?


Q3. 어린 학생들에게 동성애도 이성애와 동등한 관계 양상의 일부라는 성교육을 하는 것은 윤리적인가? 또한 성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 제고에 기여할 것인가?

지난 7일 초등학교에 배포된 성교육 책이 문제시되어 회수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책은 엄마와 아빠가 자율적으로 사랑할 권리, 그리고 마음이 끌린다면 동성끼리 가족을 구성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책은 성교를 직접적이고 자세하게 묘사해서 추가적인 질타를 받았다. 동성애의 성교를 넘어 관계를 자연스럽게 어린 시절부터 접하게 하는 것은 성소수자의 편견을 타파하는 데 일조할 수 있을까?


Q4. 개인이 소셜미디어로 성소수자들에 대한 사회의 만연한 편견에 대해 역설하는 방법은 효과적일까?

주변 지인을 대상으로 소셜미디어(인스타그램)에서 성소수자에 대해 긍정하는지 가벼운 설문을 시행했다. 약 250명이 콘텐츠를 확인했고, 그중 41명이 설문에 참여했다. 긍정한다는 31명으로 76%에 해당했고, 나머지 10명인 24%는 부정한다고 답했다. 부정한다고 답한 지인을 상대로 추가 질문을 했다. 그는 40대 직장인 남성이며, 지적인 호기심이 많은 편이다. 그러나 성소수자에 대해서는 주변에서 본 적도 없고, 관심도 없다고 했다. 대표적인 예로 그들의 섹스에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 동성애가 변태적인 성욕으로 치환된 지난 미디어의 시선이 심어낸 시각일 수 있다.  불합리한 예단에 반하는 증거를 찾고, 대상을 이해하는 범주가 늘어나면, 편견은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개인이 소셜미디어를 주변인들에게 성소수자의 평등성에 대해 역설한다면, 부정적인 예단을 뿌리 뽑는데 도움이 될까? 아니면 되려 부정적인 인식이 강화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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