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플렉스: 전원일기 2021>이 전원일기를 다루는 방식
“꼭 전원일기 같다.”
나는 ‘전원일기’를 본 적이 없다. 그렇지만, 살면서 위와 같은 말을 듣거나 말한 적이 꽤 있다. 특히나 평화스럽고 목가적인 분위기, 주로 농촌 풍경을 보면 그것이 떠오르곤 했다. 전원일기는 2002년에 방영을 마쳤기에 2001년생인 내가 사실상 그것을 본방송으로 시청할 기회는 없었다. 그럼에도 그것은 어느새 나의 속 깊숙이 스며들어 이미 안착을 완료한 상태였다. 심지어 전원일기, 하면 저절로 “따라라라라- 따라다라-” 하고, 그의 편안한 배경음악이 재생된다. 그럼 눈앞엔 열댓 명의 사람들이 일제히 모내기하는 땡볕의 현장이 펼쳐지기도 한다.
1980년부터 2002년까지 장장 22년, 1088회의 분량으로 시청자와 함께했던 국내 최대 장수 드라마 전원일기. 방영을 마친 지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수식어만은 빛바래지 않는 것처럼, (그것을 시청했든 하지 않았든, 높은 확률로) 한국 사람들에겐 그것이 마치 관용어처럼 남아 있다.
MBC 창사 60주년 특집으로 구성된 ‘다큐플렉스: 전원일기 2021’은 그 길고 긴 역사를 가진 프로그램, 전원일기를 다루었다. 4회 분량의 다큐멘터리는 전원일기의 주 배경이 되는 ‘양촌리’ 사람들과 당시의 제작진을 한데 불러 모았다.
그런 다큐를 보기 전 내게 걱정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있었다. ‘국민’ 드라마 타이틀을 거머쥔 전원일기 같은 작품을 다루는 데에 있어서 다큐가 작품을 미화하거나 허황한 장점만을 나열할 가능성이 그것이었다. 작품이 가진 타이틀과 기록들을 미루어 보았을 때, 그러한 선택들이 어쩌면 쉽고 안전한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다큐플렉스는 그런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조금은 어렵고 돌아가는 길이었대도, 예상과 기대와는 다르더라도, 방송은 다른 길을 택했다. 그렇다면 다큐플렉스가 주목하고 시사한 것은 무엇이었나.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놔두지.”
“(연기자는) 자꾸 지워버려야 한다는데 이제 과거 속으로 나를 인도해주시니까 좀 얼떨떨합니다.”
“의미도 있고 좋은데 뭘 굳이 또 옛날 지나간 사람들이 그럴 필요가 있나.”
배우들은 입을 모은 듯 이처럼 말했다. 그들은 사람과 작품, 그러니까 과거의 인연들을 재회하는 것에 반색하면서도 약간의 망설임을 내보였다. 그들의 태도는 다큐에까지 영향이 닿았다. 다큐는 과거를 윤색하기보다 위의 말처럼 지나간 것을 지나간 대로 놔두며 중용을 선택한 모습이었다.
정국이 혼란스럽고 군부독재의 공포가 느껴지던 1980년대, 현실과 거리가 먼 전원의 삶이 떠올랐고, 한 농부의 목가적 삶을 다루는 전원일기가 탄생했다. 사회적인 맥락에서 드라마가 사람들에게 어떤 ‘무공해’한 의의를 지녔는지를 언급하면서 다큐는 작품의 가치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전원일기 ‘전화’ 편에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양촌리 사람들이 마을 큰집에 전화기를 처음 들인다. 다들 신이 나서 타지에 있는 가족들에게 연락을 돌리지만, 극 중 김혜자 님이 연기한 ‘은심’만은 그럴 만한 연고가 없다. 전화에 들떠있는 사람들에 괜히 심란해진 그는 밤중에, 그리운 돌아가신 어머니를 바꿔 달라며 수화기를 든다. 배우들은 이 장면으로 비롯한 당대의 감정과 인기를 추억한다. 김정수 작가는 ‘전화’ 편의 에피소드에 대해, 실제로 김혜자 님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였고, 그에게 위로를 주고 싶은 마음에 이야기를 만들었다고 전했다. 각자의 자리에서 글을 쓰고 연기하고 연출했던 그들이 전하는 진심이 시청자들에게 통하게 된 이유였음을 깨닫게 되는 대목이었다.
방송은 이와 동시에 전원일기의 이면적 어려움과 비판 지점을 노출하는 데에도 서슴없었다. 전원일기는 많은 명성을 얻었으나, 결론적으로 끝을 맞이했다. 긴 방영 기간 동안 작가와 연출가가 수십 번 바뀌었고, 그 속에서 김혜자 님은 극 중에서 자신을 죽여달라고 부탁하는 등 배우들 또한 타성에 젖었던 시간을 경험했음을 밝혔다.
전원일기의 끝엔 작품의 시대착오적인 지점에 대한 지적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농촌의 모습도 빠르게 변했고, 드라마가 그려낸 농촌의 모습이 구식이라는 언급도 있었다. 이후에도 방송은 문화평론가의 입을 빌려 드라마의 가부장적인 모습을 지적하며, 전원일기가 한 가정에서 그것을 수용하며 ‘힘들게 고생하면서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일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하기도 했다.
다큐에서 이 모든 것은 그저 출연진들의 대화 혹은 인터뷰를 중심으로 재현되었고, 양촌리 사람들의 근황을 전함에 초점을 맞추었다. 방송에서 사용한 ‘전원일기의 처음이자 마지막 동창회’라는 표현처럼 그들은 서로를 반갑게 그리고 애틋하게 마주했다.
그곳엔 극 중 맡았던 부부 역할을 시작으로 실제 부부가 된 이들도 있다. 마치 가족처럼 아직도 연락을 주고받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서로 그리고 자신을 위해 차마 안부조차 전하지 못했던 미안한 마음도 존재한다. 함께한 이들이 있듯,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 오랜만에 서로를 마주한 사람들은 비슷하면서도 달라져 있었다. 다큐가 지나간 것을 지나간 대로 바라볼 수 있던 이유는 이것에 있는 것이 아닐까. 과거를 지나온 ‘지금’의 사람들, 그리고 그 희로애락과 재회의 마음. 그것을 담담히 포착해내는 것.
다큐플렉스는 ‘전원일기’라는 이름에서 ‘일기’에 주목한 것이 아닐까. 우리는 굳이 일기의 문장들을 다시 분해하고 미화하거나 수정하지 않는다. 그저 오래전 일기에 숨긴 오래된 문장들을 꺼내어 지극히 현재의 관점으로 모종의 감정을 느낄 뿐이다. 그곳엔 시간이 지난 옛 인연과 조금은 바래진 마음이 있고, 우리는 지금을 살아가니까. 그들의 평범한 일상의 대화는 다분히 현실적이고 시간이 지난 일기처럼 다가왔다. 전원일기의 인연들은 다시 만나 서로의 소식을 묻고는 울고 웃으며 떠들었다. 마치 오래된 일기처럼. <다큐플렉스: 전원일기 2021>이라는 일기장으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