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로 살기] 애들 싸움에 끼어들다
지난 주말, 첫째 아이 친구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늘 저녁에 시간 되니? 샤부샤부집 같이 안 갈래?"
그 친구 집에 놀러 가는 날엔 꼭 가는 샤브집이 있다. 대형 키즈존이 있어서 아이들은 땀 흘리며 뛰어놀다가 밥 한 그릇 뚝딱 먹고 가고, 어른들은 여유롭게 샤브를 즐기며 수다를 떨 수 있는 곳이다 보니 지친 육아인들에게는 그야말로 천국 같은 곳이다. 그동안 주말마다 일이 많아 가지 못했는데, 오래간만에 여유롭게 저녁 한 끼를 해결하려고 온 가족이 동행했다.
싸움의 시작
주말 저녁 식사를 기분 좋게 마치고 나가려던 그때, 첫째 아이가 씩씩거리면서 왔다.
“아 진짜!! 기분 나빠. 어떤 애가 내 음경을 밟았어. “
헉. 음경이라니…
아이의 직접적인 단어 선택에 순간 머리가 하얘졌지만 진짜 심각한 상황이었다면 엄살 심한 첫째가 이렇게 멀쩡한 얼굴을 하고 뛰어 오진 않았을 테고……
놀다가 우연히 살짝 부딪혔겠거니 하고 가볍게 넘어가려고 했다.
“아이고 아팠겠네~ 실수로 잘못 부딪힌 거 아닐까? “
“아니야. 같이 배틀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걔가 기분 나쁘다고 내가 누워있을 때 일부러 밟은 거야! “
"나빴네~ 도대체 누구야! 기분 나쁘다고 그런 행동을 하고! 아프고 속상했겠다." 하며 아이 마음을 잘 타이르고 가려했는데, 같이 놀던 아이의 친구가 끼어들었다.
"찼았다! 쟤 에요! 저 파란색 티셔츠 입고 있는 애! 저기서 밥 먹고 있어요!"
아... 괜스레 일이 커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이도 씩씩대며 어디냐고 찾는 걸 보니, 너무 분했나 보다. 8살 남자아이에게 중요 부위를 건드렸으니...
하필이면 6살인 둘째 아이가 태권도 형들 앞에서 팬티를 내렸다는 말을 하는 바람에 아침부터 밥 먹다 말고 아이들을 데리고 엄하게 성교육을 했던 그날이었다. 그러니 아이는 자신의 소중한 곳을 건드렸다는 것에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 같았다.
"엄마! 쟤 맞아!"라고 하며 나를 쳐다보는 아이의 눈빛엔 '엄마는 내편이지? 혼내 줄거지?'라는 기대로 가득했다.
엄마의 개입
아... 결국 내가 제일 어려워하는 순간이 오고야 말았다.
애들 싸움 끼어들기. 그것도 쌩판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남의 아이와의 싸움을 말이다.
아이는 사과를 꼭 받고 싶다고 했고, 그런 아이의 이야기를 들은 아빠 역시 눈빛이 싸늘해졌다.
난 아이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부모로서 무언가 해야 한다는 부담이 생겼다. 적어도 자기 신체를 소중히 다루고 싶었던 마음을 지켜줘야 할 것 같았다. 또 어른 싸움으로 번지지 않기 위해서 아빠보단 엄마가 나서는 것이 적당할 터였다.
불안정하게 요동치는 마음을 부여잡고 가족들과 같이 밥을 먹고 있던 아이에게 다가가 놀라지 않도록 최대한 온화한 목소리를 하고 부드럽게 이야기했다.
"저기.. 친구야 혹시 아까 이 친구 음경을 발로 밟았던 거 사과해 줄 수 있을까? 그때 많이 아팠대."
그때였다. "너도 아까 우리 애 발로 찼잖아. 아저씨가 다 보고 말하는 거야." 내 말을 듣고 같이 밥을 먹고 있던 그 아이의 아빠가 발끈하며 아이에게 따져 물었다. "안 그래도 우리 애도 그 일로 속상해하면서 이야기하던 중이었어요." 아이의 엄마도 난처해하며 말했다.
아차! 키즈존에서 아이들의 놀이를 제대로 살펴보지 않았던 나의 불찰이다.
"무슨 말이야? 너도 친구 발로 찬 적 있어?" 당황한 나는 아이에게 되물었고, 아이는 "아니에요. 그건 같이 배틀 놀이를 한 거였고, 저 애가 하고 싶다고 해서 한 거였어요. 근데 쟤가 일부러 내 음경을 발로 밟은 거라고요."라고 또박또박 이야기했다.
상대 아이의 엄마도 아이와 이야기했다.
"너 음경이 어딘 줄 알아? 거길 발로 찼어? 일부러 한 거야, 실수야?" 상대 아이가 하는 말은 주변 소음에 묻혀서 정확히 들리지 않았지만, 아이의 엄마는 아이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가르쳤고, 다행히도 첫째 아이는 원하던 사과를 받을 수 있었다.
"근데 차니야, 너도 친구를 발로 찬 거에 대해서는 사과하고 가야 할 것 같은데?"
"아니야. 그건 그냥 놀이었어. 그리고 쟤가 먼저 하자고 한 거라고. 자기가 하자고 해서 한 건데 내가 왜 사과를 해?"
아... 아이 입장에서는 틀린 말은 아닌데, 뭐라고 해야 할지 말 문이 턱 막혀버렸다.
아이의 원망과 가족들의 시선이 불편해 빨리 여길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이 용솟음치는 순간이었다.
다시 그 친구에게 물었다. "너네 서로 그렇게 놀자고 한 게 맞니?"
고개를 끄덕이던 그 아이를 보며 또다시 말문이 막혔다.
"그래......, 사과해 줘서 고마워."
난 짧은 인사말과 눈인사로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다.
싸움에 끼어드는 기술
남편은 오는 내내 상대 아이 아빠의 행동이 화가 난다며 투덜거렸지만, 난 내 행동이 어른스럽지 못했다는 생각에 불편했다.
"음경"이라는 단어가 주는 예민함에 휘말리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냥 내가 해결하려고 들지 않고, 화해의 자리를 만들어주는 것에서 그쳤으면 어땠을까.
빨리 마무리 지으려던 마음을 버리고 아이에게 좀 더 자세히 듣고 행동했다면 어땠을까.
밥 먹고 있던 아이에게 대뜸 사과할 수 있냐고 묻기 전에, "식사 중에 죄송하지만..."이라고 가족들에게 먼저 양해를 구했다면 어땠을까.
아이가 서로 합의하에 그렇게 놀기로 한 거라고 대답했을 때도, "그렇게 놀았을 때 너는 괜찮았니?"라고 물어봐 주었다면 어땠을까.
자리를 떠나기 전 "너 용기 있다. 멋지다." 한 마디라도 덧붙여줬더라면 어땠을까.
그날 나는 상대 아이의 엄마가 자신의 아이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거들어준 것이 고마웠다.
반면 나의 행동은 무례하게 한 가족의 즐거운 저녁식사를 훼방 놓은 것만 같았다.
이 날의 사건으로 "엄마는 내 편이다."라는 것을 아이에게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이었지만,
우리 아이는 상대를 존중하는 예의 바른 태도를 나에게서 배우지는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아이와의 갈등 속에서도 난 늘 "당장 사과해", "네가 잘못한 거야"라고 다짜고짜 사과를 강요했고, 사과를 해야 하는 아이의 마음이 어떠한지 묻지도 않고, "진심으로", "제대로 사과할 것"을 강압적으로 요구했다.
내 아이에게 조차 나는 존중과 예의를 갖추지 못했던 '무례한 엄마'였기에 다른 집 아이에게도 나는 친절한 얼굴로 무례한 태도를 보인건지도 모르겠다.
나의 이런 무례함을 우리 아이들이 그대로 학습하면 어쩌지 겁도 났다.
싸움에 기술이 있다면 그건 상대에 대한 존중과 예의를 지키는 것이 아닐까.
아이와의 갈등에서든 애들 싸움에서든 어른이 취해야 할 태도는 대신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예의를 지켜 스스로 갈등을 해결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그날의 나는 좀 덜 미숙한 어른이지 않았을까.
뭐. 나도 아직 그 방법을 터득하지 못한 것이 더 큰 문제라면 문제.
내 아이에게나 다른 아이에게나 한결같이 예의 바른 엄마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