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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담스누피 Sep 09. 2024

약을 먹는다고 대체 뭐가 나아지나요?

처음으로 엄마의 보호자로 병원에 다녀와 깨달은 것

이 글을 작성하고 1년이 다 되어가도록 발행을 누르지 못했다. 무서웠다. 나의 생각들로 사람들에게 질타를 받을까 두려웠다. 나를 아는 사람들이 혹여 글을 읽게 된다면 못된 딸이라 손가락질할까 봐 무서웠다. 그러다 1년 만에 뒤늦게 발행을 누르게 된 첫 번째 이유는 나는 본래 선하지 않은 사람임을 인정하게 되어서고, 두 번째는 혹여나 나와 비슷한 마음일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때문이다. 그런 이들에겐 위로가 되기를 바라며 용기를 내어 발행을 눌러본다.



지난주(지금으로부터는 수개월 전) 아빠의 제안으로 처음으로 엄마 병원 진료에 보호자로 동행했다.


두세 걸음만 겨우 걷는 엄마를 병원에 모시고 가는 일부터가 쉽지 않았다. 아빠보다 더 큰 엄마를 휠체어에 태우고 내리 고를 반복해야 했다. 검사를 받을 때마다 엄마를 기계 위로 들어 올려주어야 했다.


엄마가 들러야 하는 외래진료는 신경외과, 신경과, 류머티즘내과, 암통합센터 총 4군데였고 골밀도 검사, 엑스레이 촬영까지 여러 층을 왔다 갔다 해야 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2시까지 진료를 돌고 정리를 해보니 한 달 뒤엔 신경과 진료가 뇌경색, 뇌전증 진료로 각각 두 번이고 심장내과까지 추가되어 도합 5번의 진료를 받아야 했다.


그날 그렇게 병원투어를 하고 나서 점심을 먹은 나는 종일 오한과 두통에 시달리다 결국 저녁이 다 되어서는 구토를 하고 말았다. 점심을 먹은 지 반나절이 지났는데도 먹은 게 하나도 소화되지 않았다.

이 가정의 유일하게 젊은 보호자로서, 또 살만큼 산 40살 먹은 어른으로써 똑 부러지는 보호자가 되어야 한다는 긴장감, 여러 의사들의 말을 잘 이해하고 기억해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심리적으로 압박이 됐었나 보다.


엄마의 새로운 진단명 “루프스”


엄마는 새로운 병명을 진단받았다. 루프스와 항인지질증후군이라고 했다. 내가 태어나기 전 수시로 유산을 했던 것도, 뇌전증으로 자주 발작을 해왔던 것도, 수시로 몸에 멍이 들었던 것도, 혈소판이 감소하는 것도, 뇌경색이 오는 것도 지난 엄마의 반평생을 괴롭혀왔던 모든 증상이 모두 이 자가면역질환의 영향이라고 했다.


아빠도 그날 처음 알게 됐다. 혈액암 추적관찰 중 혈전이 많이 생겨 협진의뢰를 받은 다른 병원의 암통합센터 의사가 이전 병원에서의 혈액검사 기록을 살피다가 우연히 의심스러운 수치를 발견했고 류머티즘내과에 협진을 요청해 혈액검사를 하고 나서야 루프스 진단을 하게 된 것이었다. 왜 그동안 거쳐갔던 여러 병원의 수많은 의료진들은 알아내지 못했을까 원망이 되진 않았다. 그저 이제라도 발견해 준 의사가 있어 다행이었고 발견해 주어 고마웠다.


3년 전 이미 다른 질병의 협진으로 찾았던 류머티즘 내과에서 루프스가 의심된다는 이야기를 했었지만, 당시 아빠는 처방된 약의 설명만 보고 류머티즘 관절염 정도의 가벼운 질병이라 생각했고, 다른 질병이 더 우선이니 이건 미루자는 생각으로 더 검사하지 않았다며 자책하셨다. 그렇다고 아빠 때문은 아니었다. 그냥 다른 의사들처럼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일 뿐.


신경과 의사는 루프스 때문에 엄마의 뇌기능이 점점 떨어질 것이라 했다. 뇌경색 때문에 혈전치료제를 써야 하지만 혈소판 감소증 때문에 뇌출혈 위험이 있으니 약을 세게 쓸 수 없다고 했다. 면역조절제를 먹으며 혈소판 수치를 주기적으로 모니터링하면서 치료제를 조절해야 하는 수밖에 없었다. 또 뇌파검사로 발작이 일어날 조짐이 있는지도 모니터링해야 한다고 했다.


신경외과에서는 넘어졌을 때 척추뼈를 다쳤지만 수술을 감당할 수 있는 컨디션이 아니기에 엄마는 마약성진통제를 처방해 주며 자연스레 뼈가 붙도록 기다리는 방법 밖엔 없다고 했다. 그래서 엄마가 그렇게 하루종일 잤나 보다.


조금만 이상한 조짐이 있더라도 항상 응급실에 와서 대응할 수 있어야 하니 두 군데로 나눠진 병원을 한 군데로 모는 것이 효율적일 것이라 의사들은 권했다.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치료인 걸까


4명의 의료진을 만나 긴 설명을 들었지만 치료제를 먹으며 더 큰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모니터링하고 관찰할 뿐 이미 나빠진 장기와 치매, 떨어진 신체기능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회복’이 아니라 나빠지는 속도를 늦추는 것 일뿐인 이 치료는 대체 누굴 위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마음속을 파고들었다. 엄마는 스스로 숟가락조차 제대로 들기 어려웠고, 오랜 병치레로 얻은 심한 항문질환으로 배변조차 힘들었다. 질병은 점점 더 늘어나기만 할 뿐 줄어들지 않는데, 매일 독한 약을 먹어야만 하고, 고통스럽고 또 수치스러울 지금의 삶에 무슨 미련이 더 있을까. 엄마에겐 삶의 유지가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집에 갇혀 엄마를 돌보는 일 외에 제대로 된 삶을 누리지 못하는 아빠의 고통만 연장되는 것은 아닐까? 내가 가까이 살면 자주 살피며 도울 수 있지만 집은 너무 멀고, 이사를 하기에는 아이들 교육도 직장도 다 포기해야 했다. 현실적으로 직장을 그만두고 친정으로 이사를 와 엄마와 아이들을 돌본다 한들 수입이 절반으로 줄면 앞으로 교육적인 지원이 필요한 우리 아이들은 어찌해야 하나. 우리 네 식구 먹고 살 길도 막막해지는데.  친정과 아이들 모두를 혼자 책임지기에 내 능력은 역부족이다.


그렇다고 매월 아빠와 내가 몇 백만 원의 높은 입원비를 감당할 능력도 없지만 요양병원에는 절대 안 간다는 엄마를 억지로 입원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저 방문요양보호사가 오는 평일 하루 3시간 만이 아빠의 유일한 숨구멍이다. 나머지 21시간은 오롯이 만 여든 되신 아빠의 몫이었다.


막막했고 답답했다.

엄마의 치료가 우리 가족에게 어떤 의미인 것인지.

약을 하나 더 늘린다고 우리 가족들의 상황이 좀 더 나아질 수 있는 것일지.


비록 그리아니 하실지라도, 감사


그 뒤로 지켜본 엄마의 하루는 1년째 매일 똑같았다.


아침에 일어나 소파에 앉아 멍하게 있다가 아침밥 두 세 숟가락을 먹고는 배부르다 더 안 먹겠다 음식을 거부하며 우리와 씨름을 한다.


결국 남은 밥을 버리고 양치를 하고 약을 먹은 뒤 다시 소파에 누워 서너 시간을 잔다. 자고 일어나면 점심을 먹고 아침과 같은 일상을 보내고 저녁을 먹은 뒤에도 자기 전 항문에 연고를 발라주고 침대에 눕혀주는 것 말고는 똑같았다.


깨어 있는 동안엔 5분, 10분마다 화장실을 가겠다고 했고, 자는 동안에도 마찬가지였다. 밤엔 기저귀를 하는 게 어떻겠냐고 했지만 엄마가 기저귀에는 용변이 나오지 않는다니 밤마다 화장실 가는 시중을 드는 수밖에 없었다.


엄마는 덩치 큰 신생아나 다름없었다. 3킬로 밖에 되지 않는 신생아를 돌보는 것도 힘에 겨워 산후우울증에 걸리곤 하는데 아빠는 50킬로의 신생아를 돌본다. 우울증이 와도 몇 번은 왔을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뒤로 지금까지 주말마다 혼자 친정에 다녀왔다. 1주일에 한 번, 때론 격주로 가서 아빠에게 쉬는 시간을 주었다. 고맙게도 남편은 아버님에 비하면 아들 둘 혼자 보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흔쾌히 나를 보내주었다.


아이들도 할아버지를 돕는 일이라고 하니 엄마가 보고 싶어도 잘 참고 기다려주었다.


모두에게 고마웠다. 남편도 아이들도 내가 엄마 곁에 있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비록 엄마의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고 그저 지금의 상태를 겨우 유지할 뿐이라 하더라도 내가 딸로서 엄마를 조금이나마 돌보며 함께하는 시간을 가질 기회가 생기는 것이 이 치료의 의미라는 것을.


아빠가 엄마를 간병하는 것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무척이나 고되고 힘든 일이긴 하지만 그와 동시에 아빠 스스로 삶을 지켜내는 내적 동기가 된다는 것을.


그러므로 이 모든 어려움조차도 감사할 이유가 된다는 것을.


“혼자서 엄마를 보고 있을 땐 막막하고 우울했는데, 그래도 네가 있으니 별 거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마음이 편해. “


패륜아 같은 이기적인 딸이지만 아빠에게 조금이나마 잠깐이나마 힘이 되어줄 수 있다는 것에도 감사했다.


처음으로 엄마와 병원을 동행한 뒤 찾아온 주일은 마침 추수감사절을 준비하는 주일이었다. 가족이 아픈 것조차 감사할 이유가 된다는 말씀에 엄마와 함께 앉아서 온라인 예배를 드리다가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그렇게 1년, 다시 추수감사절이 찾아오고 있다. 그 사이 많은 일들이 있었고 엄마에겐 여전히 회복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엄마 역시 삶을 포기한 듯 몸무게가 빠졌고 누구보다 건장했던 엄마의 체중은 40kg이 되었다. 이제는 아빠에게도 나에게도 새로운 결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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