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하루 비움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씨방 Jan 09. 2021

비운만큼 가벼워졌을까

60여 개를 비우고 나서

하루에 하나씩 물건을 비우기로 했다.

내 물건이 어디 있는지, 심지어 있는지조차 몰랐다. 정말 내 것이 맞나 의문이 들었다. 하나씩 찾아내고 들여다보고 비우다 보면 명료해질 것 같았다. 2020년 10월 말부터 말까지 60여 개의 물건을 비웠다. 추억이 깃든 물건도 있었고 깃들다 만 것도 있었다. 버리기 전에는 '꼭 필요한가' '다시 펼쳐볼 것 같나' 질문했다. 우물쭈물하며 답하지 못했는데 버리지 못한 물건도 있다. 심지어 필사 노트는 버렸다가 다시 주웠다.


물건 60여 개를 비운다고 해서 생활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는다. 작게는 달라졌다.


반경 1m 이내에 물건이 자리한다.

중고등학교 때 쓴 연습장과 더는 안 읽을 책도 비웠다. 친구들에게 빌린 책은 다른 곳에 보관해놨다. 시작은 책꽂이다. 출판사별로 시집을 꽂아놓고, 소설이며 이론서는 분야별로 모아놨다. 책 외에 블루투스 스피커, 와인 조명, 오일도 있기는 했지만 '손이 잘 닿는 곳에 일부러' 둔 것이다. 책꽂이를 정돈하니, 자연스레 책상에 어지러이 두었던 책도 정리됐다. 나에게 널따란 책상이 생겼다.


여행에서 사 온 물건을 쓴다.

내 왼쪽에는 책꽂이, 오른쪽에는 작은 삼단짜리 장이 있다. 원래는 삼단 모두 책이 들어 있었다. 이제 첫 번째 칸에는  카세트 플레이어와 씨디 플레이어, 휴대용 배터리 충전기를 비롯해 각종 카드와 통장이 들어있다. 세 번째 칸에는 형부가 사다준 쾌변 약이라든지 병원에서 몇 박스 처방받은 인공눈물 같이 당장 쓰진 않지만 언젠가는 필요한 물건을 담았다. 두 번째 칸에는 여행지에서 샀거나 선물 받은 물건이 있다. 어떤 날은 카이로 병따개로 병맥주를 따 마시고, 또 어떤 날은 부다페스트 병따개를 사용한다. 특히 포르투에서 사 온 코르크 코스트를 자주 사용한다. 비우기 전에는 '어느 한편에 있는' 물건들에 불과했다. 물건에도 시제가 있다. 반경 1m 이내의 물건들은 현재형이다.


새로운 물건을 발견한다.

내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다. 위에 언급한 카세트 플레이어와 씨디 플레이어가 마음에 든다. 특히 여행지에서 산 씨디가 있는데, 씨디룸이 없어 곤란해하던 찰나 씨디 플레이어를 발견했다. 올해 포르투에서 사 온 레이스 천도 찾았다. 포르투에서 산 파란 식탁보 하나가 더 있는데, 한참 찾다 지인에게 빌려준 걸 기억했다. 내가 떼간 책도 돌려줘야 하는데, 참 만나야 할 사람 많다. <하루 비움>을 시작하며 내심 기대한 게 있다. 노란색 가방과 파란색 앞치마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결국 못 찾은게 아니라 아직 못 찾은 것으로 여겨야겠다.


말을 잘못했다. 팔을 뻗어 내가 원하는 물건을 바로 집을 수 있고, 다는 아니지만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고 있다. 작은 변화가 아니구나.


뭐 비우는 만큼 채운다. 오늘은 담금주 만들기 키트와 스타벅스 가방을 받았다. 텀블벅에서 홀린 듯 편지 프로젝트를 밀었다. 비우고 채우고 다시 비우다 보면 소비에 꽤 진심인 어른이 돼있지 않을까. 기대해보며, 후기 마침.



매거진의 이전글 20123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