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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졔졔 Dec 31. 2021

해가 바뀌는 게 나는 사실 별 감흥이 없다

나는 그냥 뚜벅뚜벅 살아간다. 2021년처럼

2021/01

이런 글을 남겼다. '바쁘다는 핑계로 흘려보냈던 눈 오던 날을 사진으로 곱씹어보면서 일주일을 정리하는 시간.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만남들을 미루며 언제까지 바쁘냐는 질문들에 언제까지라고 딱 정하지 못하는데, 이게 이제 일을 탓할 수만은 없는, 쉬이 브레이크를 밟지 못하는 나 자신 때문인 것을 안다. 주말에 그래도 하루쯤은 나한테 시간을 줘야지. 언젠가는 그 모든 시간이 오롯이 내 시간이 될 수 있는 용기를 내고 싶다.' 평균 12시에 퇴근하던 시절이다.


2021/02

밤 12시 퇴근이 익숙해졌다. 많은 사업을 거의 혼자 다 따냈다. 근데 계속 무언가를 더 해달라는 사람이 주변에 넘쳤다. 외로웠다.


2021/03

슬픈 줄도 모르고 일만 했다. 괜찮다 괜찮다 주문을 뽕 맞듯 스스로한테 주입했다. 괜찮다고 말하지만 책이 읽고 싶었다. 집 청소도 하고 싶었다. 사랑하는 고양이들을 더 자주 쓰다듬고 눈 마주쳐주고 싶었다. 사랑하는 날라의 두 번째 생일 아침 출근해서, 결국 다음 날 자정을 넘겨서야 퇴근했다.


2021/04

봄 날씨가 너무 좋아서 거짓말같이 용기가 났다. 거짓말같은 나에 대한 평가에 이 모든 상황이 다 거지같다고 생각했다. 나를 조금 더 소중히 대하고 싶어졌다. 퇴사를 결심했다. 이야기하자마자 일주일 안에 출근을 멈췄다. 퇴직금으로 코인을 시작했다. 백수지만 조금씩 먹고살 수 있는 일들이 들어왔다. 처음에는 이전 회사에서, 그 이후에는 이곳저곳에서.


2021/05

코인이 시작하자마자 떡락장이 왔다. 괜찮았다. 넉넉히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 나에게 있기 때문에. 청소를 시작했다. 야근이 쌓인 시간만큼 쌓인 쓰레기도 먼지도 많았다. 오래된 전셋집의 누수로 바닥까지 다 깨부수며 청소의 시간은 늘어졌다. 찬찬히 청소를 끝내는데 꼬박 한 달이 넘게 걸렸다. 우리 집 막내 콩떡이는 한 살이 되었다.


2021/06

쓸데없는 일들을 그저 재밌어서 했다. 고양이 얘기가 나오는 책을 모으기 시작했다. (@books.with.cats) 노션으로 포트폴리오를 만들었다. 해왔던 일을 한 차례 돌아보고 정리했다. 국제개발협력 자격시험 준비를 하고 ODA 자격증을 땄다. 기후변화가 미래의 일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미선이는 아파서 수술을 했고, K장녀인 나는 백수로서 간병의 의무를 다했다. 사실 미선은 아픈 중에도 나를 더 돌보려 했고, 나는 그런 미선이 옆에 있어서 좋았다. 오래간만에 딸이 된 기분을 만끽했다.


2021/07

페스코로 먹기 시작했다. 비건 지향을 곁들인. 착취를 덜하기로 결심한 것뿐이지만 찬찬히 앞으로 나아가거나 정체한다 한들 물러서진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코딩도 배워보자 싶어 파이썬을 배우기 시작했다. 사실 공부를 시작하기 전부터 코딩이 내 길이 아닌 건 처음부터 알았지만 연경 언니를 따라 그냥 '해보자, 해보자' 생각했다. 가위바위보 게임 정도는 만들 줄 알게 되었다. 둘째 고양이 호두도 두 살이 되었다.


2021/08

쓰기 시작했다. 하고 싶은 말이 목 끝, 아니 손 끝에 차올랐는데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쓰지 않았던 긴 침묵의 시간을 찬찬히 깨보기 시작했다.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 약간 기고만장해졌다. 개인사업자도 냈다. 나는 그냥 안지혜인데 자꾸 어디서 온 안지혜냐고 묻는 소리들이 시끄러웠다. 책 읽는 모임에 하나 기웃거렸다. 책 얘기도 하지만 다른 수다도 엄청 떠는 모임으로 변모 중이지만 뭐 어때, 사랑스러운데. 정치도 할까 싶어졌다. 지역 의원이 돼볼까 생각했다. 정치인 하다가 정신병 생길 것 같아 그 길을 가게 되지는 않을 것 같지만 새로운 상상을 해볼 수 있게 한 뉴웨이즈는 내 눈을 열어주었다. 요가 강사나 필라테스 강사가 돼볼까 생각해보게 되었다. 성우가 되면 어떨까도 생각했다. 직업이 없으니 어렸을 때처럼 뭐든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무한한 가능성이 어렸을 때처럼 두렵지만은 않았다. 만 서른두 살이 되고 나서야의 일이었다.


2021/09

같이 일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해주었던 분들이 계셨다. 조금 더 쉬고 싶었는데 지금이 아니면 또다시 시작하지 못할 것 같은 마음도 들어 좋은 제안을 주신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동시에 스타트업 관련 리포트를 써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이 있었다. 해본 적 없는 일이지만 '해보지 뭐' 싶었다. 일로 오션을 통해 방문한 강릉에서 첫 글을 넘겼다. 매달 하나 씩 글을 쓰고 있다. 


2021/10

새로운 회사에 다니기 시작했다. 하루 8시간을 다시 회사라는 공간에서 보내고 있다. 전혀 다른 분야, 전혀 다른 업종, 전혀 다른 사회를 경험하고 있다. 주변에 결혼해서 애 낳고 사는 사람이 이렇게 많아질 줄 몰랐다. 외벌이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충격적이다. 다양한 삶의 모양이 있다.


2021/11

보험설계사 자격을 땄다. 따고도 놀랐네. 이걸로 먹고 살 생각은 안 하지만 졔졔 하면 보험, 보험 하면 졔졔니 잊지 말아 주시길. 고양이랑 보내는 시간이 줄어 다소 서러웠다. 백수가 최고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다. 길을 가다 인생 두 번째 그림을 샀다. 집에 걸어놓고 두고두고 예뻐하고 있다. 세 번째 그림도 머지않은 때에 사고 싶다. 그러려면 일단 벽이 더 필요한데, 가능하려나.


2021/12

브런치 북 공모전을 (당연히) 광탈했다. 하지만 내년엔 더 많이 쓰겠다고 생각한다. 거창한 계획도 없고 거창한 회고도 없이 올해를 마무리 짓는다.


고 하려고 했는데,


돌아보면 모든 과정에서 내 편이 되어준 가족이 있었고 친구들이 있었다. 내 얘긴가? 싶으시면 맞다. 당신에게 감사하다. 손목이 아픈 날은 발로 쓰다듬어줘도 화내지 않는 고양이들이 있었고, 고양이를 먹여 살릴 일용한 양식과 일자리를 준 사람들이 있었다. 가끔 고장이 나긴 했지만 크리티컬 한 고장은 아니었던 몸뚱이도 아직은 쓸만하다. 기쁜 일만 있지는 않았지만 공감할 수 있는 여성 화자들, 콘텐츠들이 풍성해서 견딜만했다. 돌아보면 주어졌던 모든 것에 감사하다. 


나의 신, 나의 하나님의 교대 없는 24시간 근무와 열일하심을 이렇게 각 잡고 돌아봐야만 눈치챈다.


내년에도 절망스러운 일들이 산적하겠지만 그냥 하루하루를 살려한다. 거창한 계획 없이 그냥 그때 그때 하려고. 늘 그랬듯이 잘 울고 잘 웃고 잘 화내겠지만 전보다는 잘할 거라는 나 자신에 대한 신뢰가 있다.


2021년은 어디에 떨어뜨려놔도 뚜벅뚜벅 살아갈 근육을 회복하는,

나 자신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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