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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졔졔 Jan 04. 2022

지혜를 모아서, 더 지혜 클럽

2021.01.03

새해 첫 출근은 집에서 했다. 재택으로 근무하던 중 본부 단톡방이 울렸다.


김땡땡: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일하게 될 헬렌입니다."

레고(최뫄뫄): "환영합니다. 레고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미키(윤뭐뭐): "반갑습니다!"


그 밑으로 줄줄이 사람들의 환영 인사가 달렸다. 한바탕 줌 미팅을 마친 터라 조금 늦게 메시지를 확인하고선 나도 한 마디 거들었다.


졔졔: "어서 오세요 반갑습니다. @김땡땡 님 !"


그때 한 동료가 개인 메시지를 보냈다.


티엠아이(김말많): "졔졔, 졔졔가 갑자기 너무 한글 이름 언급하면서 실명 불러서 깜짝 놀랐잖아요! 김!땡!땡! 님이라니. 근데 태그였구나!"


우리 회사는 (구현 여부와는 별개로) 수평적인 조직 문화를 지향하며 실명 대신 닉네임을 쓴다. 근데 또 일 하다 보면 막상 실명이 필요한 때도 있으니 메신저 아이디는 '닉네임(실명)' 형태로 설정해서 쓰고 있다. 그런데 오늘 출근한 헬렌의 경우 아직 사내 메신저 세팅이 실명으로만 되어 있었던 탓에 내가 새로운 동료를 태그 한 것이 갑자기 너무 실명 토크를 한 것 같은 상황이 된 것이었다.


개인 메시지를 보낸 동료(이하 김말많씨)가 덧붙였다.


김말많: "근데 그거 알아요?! 오늘 오신 김땡땡님, 옆 팀 팀장님인 박땡땡님이랑 이름 같아요. 신기하진 않죠?"


졔졔: 땡땡(이라는 이름)? 지혜보다 흔하겠서여...^^... 내 친구 여자 친구도 지혜고 나랑 친한 친구도 지혜고 나를 싫어하던 애도 지혜고 다른 회사 대표님도 지혜고...


(그렇다 나는 지혜다)


김말많: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오 그런데 저는 지혜라는 사람 없네요 연락처에...


아, 그러하다. 김말많 씨는 나보다 5살 어린 아주 약간 뒷 시대의 사람인 것이다. 이 말을 듣는데, 여기서 조금 흔한 이름의 대명사인 지혜라는 이름의 화력이 예전만 못한 것에 마음이 살짝 상했다. 너무 흔해서 브랜딩이 안 되는 지혜라는 이름의 그나마 브랜딩 할만한 점은 엄청나게 흔하다는 것인데, 이제는 엄청나게 흔하지도 않은 애매한 이름이 되어간다는 점이 야속했다. 지혜라는 이름이 엄청나게 흔한 이름인 것을 자랑하는 포인트 자체를 일종의 프라이드로 삼아 '이게 뫄 그 당시 젤루 힙한 이름이었다!' 같은 걸 당당하게 가슴 펴고 얘기하는 게 흔하디 흔한 이름을 가지고 사람들과 농을 치는 방식이었는데!


물론 이미 한 차례 큰 위기가 있었다. <82년생 김지영>이 나왔을 때도 이야기와 별개로 지영이 지혜의 '엄청나게 흔한 이름'을 대신했다는 것이 아쉬웠다. '80년대 가장 흔한 이름은 지영이 아니라 지혜인데, <82년생 김지혜>야 말로 소설 속 김지영이 겪는 여성으로서의 보편적 일화들을 더 잘 담아내는 정말이지 더 흔한 이름일 텐데!' 이렇게 흔한 이름 대왕의 자리를 빼앗기다니! 왕좌를 빼앗기고 그냥 이제 옛날 이름이 되어버린 나의 이름이여. 셀프 브랜딩의 시대에 정말이지 1도 되지 않는 그 이름 지혜여. 이제 점점 역사 속 이름이 되어가는구나.


80년대를 보라. 90년대에도 그 흔함을 잃지 않았던 지혜를 보라.


이런 쓸데없는 생각들이 연달아 일어나던 차에 (일할 때는 원래 다 그런 거 아닌가?) 갑자기 오늘 입사한 김땡땡씨가 회사에서 딴 땡땡을 발견한처럼 나도 회사에 지혜가 더 없는지 검색해보고 싶었다. 사내 인사 시스템을 열어 떨리는 마음으로 지혜를 검색했다. 


ㅠ_ㅠ!!!!!!!!!!!!! (감격)


나 외에 한 명의 지혜가 더 검색되었다. 아니, 이렇게 반가울 데가! 어렸을 때는 지혜라는 이름이 너무 흔해서 늘 새로운 지혜를 만나면 '하... 또 지혜인가...' 싶어 왠지 모르게 내 삶에 불쑥 끼어드는 새로운 지혜들을 피하고 싶어 했었다. 내 삶에 유일한 지혜는 나뿐이었으면 했다. 그런데 다양한 연령대가 섞인 회사라는 공간에서 한 물 간 유행이 된 이름을 가진 또 다른 이를 발견했다는 것이 너무도 반갑게 느껴졌다. 이런 날이 올 줄 몰랐다. 게다가 완벽하게 새로 발견된 이 딴 지혜는 90년대 초반생이다. 지혜가 넘쳐나던 시기를 함께 추억할 수 있는 자이다!


앞선 김말많 씨와의 대화를 채 종료하지 않고 흥분해서 떨리는 마음으로 검색된 딴지혜님에게 메세지를 보냈다.


졔졔: 안녕하세요, 저는 얼렁뚱땅 팀의 졔졔라고 합니다.

딴지혜: 아 네 안녕하세요!

졔졔: 다른 게 아니라... 일을 하다가 문득 생각했어요. 이 세상에 지혜들이 진짜 대박 많은데 이 회사에는 나 혼자일까?

딴지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딴지혜: 앜ㅋㅋㅋㅋ

딴지혜: 저 근데 별명 쪠쪤데.... 졔졔 보고 좀 놀랐어욬ㅋㅋㅋㅋㅋㅋㅋㅋㅋ

졔졔: 제가 지금 딴지혜님을 발견해서 좀 기분이 좋은데 시간 되실 때 점심 식사해요

딴지혜: 좋아요! 저도 들어온 지 얼마 안돼서 반갑네요!


이름이 같지 않았다면 따로 만나려 하지 않았을 직장 동료가 생겼다. 점심을 먹는 날이 어떨지 아홉 번째 소개팅을 앞둔 사람처럼 약간 떨린다. (대강 엄청 떨리지는 않지만 그래도 조금은 설레고 그렇단 소리)


박서련 작가의 소설 <더 셜리 클럽>이 문득 생각난다. 오스트레일리아의 한 물 간, (주로) 할머니들의 여자 이름인 셜리들이 모여 만든 호주 각지의 셜리 모임, 더 셜리 클럽. 이름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느슨한 연대를 느끼는 동시대 여자들의 모임. 


스콘을 잘 만드는 셜리 페이튼, 스키를 즐기는 순두부를 닮은 셜리 모튼, 치즈를 사랑하는 셜리 벨머린, 우리의 셜리가 울 때 자수 손수건을 챙겨주는 셜리 마르테이즈, 울루루에서 숙박을 운영하는 셜리 넬슨. 그들은 누구세요? 셜리예요. 나도 셜리랍니다. 농담을 주고받으며 재미와 음식과 우정을 나눈다. 더 셜리 클럽이 우리의 셜리를 돕는 이유는 오직 셜리가 셜리이기 때문이다.

(온라인 서점 알라딘의 소설 MD 김효선의 책 소개 중 한 구절)


온 세상의 지혜들을 불러보고 싶다. 80~90년대에 태어나 지영을 언니로 두거나 지은을 동생으로 뒀을 수도 있을 동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얼굴이 궁금하다. (여성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높은 확률로 여성일 것 같다.) 예전엔 흔한 이름이라 싫기만 했던, 어느 순간엔 흔한 이름이라는 것이 농담이 되었던, 셀프 브랜딩 관점에서는 정말 하나도 도움되지 않는 지혜라는 널리고 널린 이름이 이제는 나를 위해 일할 때도 되었다. 세상의 좋은 지혜들을 만나고 싶다. 학연, 지연이 아닌 이름연을 만들 수 있을까?


만약 당신이 지혜라면, 오늘 내가 딴지혜님에게 그러하였듯 슬쩍 옆구리를 찔러 친한 척을 해주면 좋겠다. 어떻게 사는지 안부도 전해주면 좋겠다. 아이는 잘 자라고 있는지, 남편은 잘 때 코를 골지 않는지, 여자 친구가 있다면 얼마나 예쁜지, 혼자 씩씩하게 살아가고 있다면 밥은 잘 챙겨 먹는지, 직장은 다닐만한지, 퇴사를 하고선 불안하진 않은지, 아픈 곳은 없는지 궁금하다. 지혜들이 전해주는 안부가 있다면 아직 봄이 오려면 먼 1월의 세 번째 날에 (글을 쓰다 보니 네 번째 날이 되었군?) 마음이 따수워지는 고마운 선물이 될 것 같다.


김지혜, 이지혜, 박지혜, 최지혜, 정지혜, 강지혜, 조지혜, 윤지혜, 장지혜, 임지혜, 한지혜, 오지혜, 서지혜, 신지혜, 권지혜, 황지혜, 안지혜, 송지혜, 전지혜, 홍지혜, 유지혜, 고지혜, 문지혜, 양지혜, 손지혜, 배지혜, 백지혜, 허지혜, 남지혜, 심지혜, 노지혜, 하지혜, 곽지혜, 성지혜, 차지혜, 주지혜, 우지혜, 구지혜, 민지혜, 나지혜, 진지혜, 엄지혜, 채지혜, 원지혜, 천지혜, 방지혜, 공지혜, 현지혜, 함지혜, 변지혜, 염지혜, 여지혜, 추지혜, 도지혜, 석지혜, 선지혜, 설지혜, 마지혜, 길지혜, 연지혜, 위지혜, 표지혜, 명지혜, 기지혜, 반지혜, 왕지혜, 옥지혜, 맹지혜, 제지혜, 모지혜, 남궁지혜, 탁지혜, 국지혜, 여지혜, 어지혜, 선우지혜, ... , 

그리고 여기 적지 못한 세상의 온갖 지혜들,

지금 잘 지내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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