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1.07
집 밖으로 나간 지 146시간, 그러니까 8,760분, 다른 말로는 525,600초가 넘었다. 오늘은 525,600초의 칩거 생활을 깨는 저녁 약속이 있었다. 한 차례 집에서 나가기 싫어 미룬 약속이었다. 정확히는 나 한 차례, 상대방 한 차례, 총 두 번의 일정이 밀렸던 약속이었다. 만나기 싫은데 억지로 만나야 했던 약속은 아니지만, 서로 날이 춥다던가 기분이 별로라던가 등의 솔직한 이유로 약속을 취소해도 기분 나쁘지 않을 관계여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그런 관계여서 계속 취소하게 될 수도 있을 - 어쩌면 그렇게 약속을 취소할 때마다 안부를 묻는 사이로 몇 년 동안 약속을 취소해도 이상하지 않은 - 사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도 이미 두 번의 약속을 미룬 터라 오늘은 꼭 만나야지 생각했다. 근데 그것도 잠시, 햇살 맛집 우리 집 안방에서 점점 해가 걷히는 것을 느끼자니 점점 더 밖은 나가기가 싫어졌다. 취소를 하려던 참이었다. 좀 머쓱하고 말면 되니까 취소해야지 싶어 카톡을 보냈다.
나: '잘 사니' (어제 마지막으로 연락했음)
친구: 'ㅋㅋ 언제 갈까'
취소하려고 했는데 '언제 갈까'라는 답을 보니 웃는 얼굴에 침 뱉고 한 번 더 뱉는 것 같아졌다. 취소하고 싶었던 마음을 뒤로하고 물을 엎지르자는 심정으로 '7시 어때'로 답했다. 바로 날아온 '오키용'에 오늘은 꼼짝없이 씻고 나가야 하는 날이 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계속 생각했다. '나가기 싫다. 나가기 싫다. 나가기 싫다. 무섭다. 나가기 싫다. 귀찮다. 추울 것 같다. 나가기 싫다. 추울 것 같은데. 씻기 귀찮다. 추우면 어떡하지. 뭐 입고 다녔더라.' 애초에 화장이나 꾸밈은 할 생각도 안 했지만 어제도 안 씻었던 것 같아 정말 씻긴 해야 하는데 싶어 다가오는 약속 시간에 맞춰 꾸역꾸역 욕실로 들어갔다. 나와서 수건으로 머리를 털면서 다시 생각했다. '아, 지금도 늦지 않았는데 취소할까. 이미 나왔으려나. 아닐 것 같은데 취소하고 싶다.' 억지로 옷을 입으면서 생각했다. '옷 어떻게 입는 거였지. 밖은 날씨가 어떻지. 안 나가고 싶다. 으악, 그래도 언제까지고 집에만 있을 수 없고, 요즘 같이 살아가면 평생 집에만 있을 수야 있겠지만, 그걸 꿈꾸자니 전세 만료가 내년 1월이라 늦어도 내년 1월에는 집에서 나가야 하니까 오늘은 오래간만에 집 밖에 나가나 보자 ^_ㅠ 이러다 평생 안 나가고 싶어 질지도 몰라.' 생각하며 주섬주섬 코트까지 주워 입었다. 오래간만에 외출복을 입는 나를 보고 이미 내 외출을 눈치챈 첫째 고양이가 어딜 가냐고 소리지르기 시작했다. 첫째 고양이의 애처로운(?) 울음을 핑계로 다시 한번 주저앉을까 고민했지만 첫째 고양이 엉덩이를 빠르게 열댓 번 팡팡 두드려주며 늦지 않게 다녀오겠다는 약속을 하고선 집을 나섰다.
현관을 나서 공동 출입문으로 가는 계단을 하나하나 걸어내려가며 집 밖으로 안 나간 지 5일밖에 안 되었는데도 나간다는 사실에 왜인지 모르게 어깨가 긴장으로 굳었다. 추울지도 모르니 왼손으로는 단추가 달린 코트 앞 섶을, 오른손으로는 단추 구멍이 달린 코트 앞 섶을 잡아끌어 가슴에 겹치도록 둘러싸고는 다시 두 손을 팔짱 껴 겨드랑이 사이에 꽂아 넣었다. 그렇게 밖을 나섰는데, 어라? 안 춥다? 나오기 전 확인했던 날씨는 영하 4도였는데 생각보다 바람이 많이 불지 않고 춥지 않았다. 며칠간 집에서 나오지 않으며 쌓인 지방 덕이려나. 지나치게 너무 겁먹은 탓이려나. 다행히도 오히려 간만의 겨울밤 바람이 여름밤의 바람처럼 반갑게 느껴졌다.
스스로와의 사투를 마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만난 친구와의 대화 속에서 친구는 현실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예전에 종종 찍고는 하던 사진처럼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고 이야기했다. 예전에 그의 사진이 좋았던 기억을 가진 나는 다시 찍으면 어떻냐고, 아직도 카메라를 가지고 있다면 다시 찍어보라고 툭 이야기를 던졌다. 친구는 안 찍은 지 오래되어서인지 사진도 그렇고 이전엔 쉽게만 잘하던 것들을 못하겠다고, 쉽게 쉽게 무언가를 잘하던 내가 내가 맞나 싶게 낯설다고, 뭔가 시작을 못하겠다고 이야기했다. 뭐든지 일을 잘 벌이는 나이기에 평소라면 쉽게 '작게 이거라도 해봐! 그냥 해봐!'라고 말했을 텐데 오늘은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뭔지 알 것 같아. 오늘 내가 집에서 못 나오겠어서 약속 취소하려고 했던 것처럼?"
"어! 그래 맞아! 그런 것처럼" 친구가 바로 동의를 표했다.
나는 내가 집에서 나오는 것이 무서울 수 있으리라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근데 단 5일 만에 집 밖으로 나오는 것이 어려운 사람이 되어 있었다. 안온하게 볕이 드는 햇빛 맛집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거나 보일러 온도를 잔뜩 올려 가동하고 고양이들과 누워있는 시간이 너무 평화롭고 따뜻해서 그 시간들을 깨는 것이 싫었을까. 나는 뭐가 무서웠을까. 막상 한 걸음을 내디디니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던 내가 순식간에 사라졌는데, 그 한 걸음이 왜 이렇게 어려웠을까. 5일밖에 되지 않은 관성을 깨는 것도 이렇게 힘든 일이었나 싶었던 요 며칠의 경험에서,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말에서의 이 한 걸음이 누군가에게는 얼마나 어려운 것일 수도 있을지를 생각하게 된다.
지금껏 내게 그것이 쉬웠다는 이유로 쉽게 '뭐라도 해봐.' '작게 시작해봐' '생각하지 말고 해봐' 같은 말들을 잘도 주변에 해왔다. 이제는 원래 그게 어려운 사람들도 있고, 잘 시작하던 사람들도 가끔 고장 난 것처럼 그게 안 되는 때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게 잘 안 되는 때가 길어질수록 더더욱 한 발자국을 떼는 것이 어려워진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겠다. 그래서 때로는 해보라는 권유나 응원의 말보다, 친구가 보내왔던 'ㅋㅋ언제 갈까' 같은 카톡을 우리는 서로에게 더 많이 보내야 하는 것 아닐까 생각해본다. 막상 잘 시작하지 못하겠다던 친구가 방에서 나를 끌어내 준 것처럼. 이런 생각이 이제야 들어 오늘 막상 친구에게는 그의 카톡처럼 이야기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
다음번에도 친구가 여전히 망설이고 있다면 '작게 해 봐. 뭐라도 해봐. 그냥 해봐.'라고 말하는 대신에 "ㅋㅋ 카메라 들고 나와봐. 나랑 놀러 가자."는 말을 해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