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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졔졔 Mar 28. 2022

차라리 닥쳐라

살리지 못하는 말이거든, 단절을 만드는 말이거든

인간은 외롭다. 망망대해보다 더 넓은 우주 속에서 우리는 먼지 같지만, 우리의 외로움은 우리보다 거대하다. 그래서 용케 이 외로움을 잘 숨겨두다가도 어떤 땐 도무지 이 외로움을 주체할 수 없다. 그런 날엔 아무리 독립적인 사람도, 아무리 내향적인 사람도, 그들의 영혼을 지탱해줄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 혼자가 아닌 우리로 연결되어있다는 감각을 찾는다. 아무리 잠시라 한들 서로에 대한 이해를 주고받았다는 느낌을 갈구한다. 너와 나의 닮은 점을 찾으며, 단독자이기보다는 우주 속 먼지로서의 동질감을 찾으려 한다. 공통된 리듬에 같은 방향으로 흔들리고 싶어 한다. 우리는 그래서 서로 눈을 마주치거나, 살의 온기를 나누거나, 숨을 주고받는다. 결코 내가 네가 될 수 없고 네가 내가 될 수 없다는 명백한 사실을 잊기 위해 우리는 서로 공명한다. 서로의 몸을 매개로 나의 마음이 네 마음을 흔들리게 하고, 너의 영혼이 나의 영혼을 진동하도록 만든다. 외로움이 약간이라도 가실 수 있도록.


그리고 그중 내가 가장 자주 쓰는 익숙한 방법은 소리로, 말로 공기를 흔드는 것이다. 말로 내 앞에 마주한 얼굴 옆에 가지런히 위치한 고막에 닿는 공기를 흔든다. 상대방의 말도 내 귓바퀴에 모여 신경을 타고 머리로 들어오곤 훅! 내 마음을 흔든다. 부서지는 웃음소리, 덩달아 부서지는 내 외로움 같은 것들 때문에 끊임없이 나는 이야기를 나눈다. 울먹이는 목소리, 잔뜩 가라앉은 침착한 목소리, 억지로 활발한 척하는 목소리, 내가 내는 소리들이 상대방의 외로움도 비추길 바라면서.


그런데 이런 시도들이 늘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섣불리 위로랍시고 건네는 말들이 외려 상대의 영혼에 생채기를 낼 때도 있고, 문득 툭 던진 다듬어지지 않은 말이 오해를 사는 경우도 있다. 가끔은 '왜요?'라는 한 마디를 하는 것이 아득히 조심스럽게 느껴지는 이유이다. 아예 음성 언어를 쓰는 것이 군더더기가 될 때도 있다. 같이 떠난 여행에서 해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손을 잡고 나란히 걷는 것이 그 자체로 마지막을 뜻하는 온전한 이별의 말이 되기도 하는 것처럼, 장례식에서 아무 일 없다는 듯 편편한 얼굴을 하고 서있는 상주에게 묻는 괜찮으냔 말이 흉물스러운 장식품이 되는 것처럼, 그릉거릉 거리며 자는 고양이의 부풀었다 꺼지는 몸 위에 손을 얹고 그 숨을 손바닥으로 느끼는 순간이 그 자체로 완벽한 것처럼. 침묵은 때로 완벽한 말이고, 완벽한 공명이 되고, 우리의 영혼을 연결 짓는다.


말이 많은 시대이다. 듣지 않아도 될 말들이 쏟아져 나온다.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약자와 공명하는 몸짓들보다는 혐오하는 목소리에 스피커를 대주는 손이 많은 시절이다. 연결하고 외로움을 비추는 말들보다 생채기 내지 못해 안달 난 말들일수록 정확하게 마음을 찢고 거칠게 영혼을 상처 입힌다. 연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만 끊어내는 것은 한순간이라 누군가의 몇 년을, 누군가의 노력을 쉬이 수포로 만든다. 광고를 재생할 대상으로서의 플랫폼에 대한 연결이 아니고선, 서로의 진짜 외로움을 직시하며 만들어지는 연결은 종종 비효율로 간주된다. 세상에서 제일 비효율적이지만 사람을 살리는 연결은, 때론 불온으로, 싹부터 잘라내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인구의 5%를 차지하는 장애인 중에 비장애인인 나는 장애인과 연결된 적이 얼마나 되던가? 20명 중 한 명이어야 하는 그 비율대로인가? 작년 국내에서 살해된 92만 명의 소와 1838만 명의 돼지는 모두 어디에 있었는가? 우리는 살아있는 그들과 영혼을 나눈 적이 있던가? 우리는 유리되어 있다. 누군가는 이 유리를 방조하는 것을 넘어 적극적으로 이 유리와 격리를 옹호한다.


말과 목소리를 연결하고 살리고 외로움을 돌보는 데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면 차라리 닥쳐라. 나는 지하철을 타고 출근해야 하기 때문에 '세금도 안 내는' (그럴리가) '과격한' '병신인' 교통 약자의 영혼에 생채기를 입힐 것이라면, 차라리 닥쳐라. 나는 '단일 민족 국가'의 일등시민이기 때문에 소수인종의 영혼에 생채기를 입힐 것이라면, 차라리 닥쳐라. 나는 만물의 영장이기 때문에 사람에겐 하지 못할 짓을 서슴없이 한 후 #저기압일땐고기앞으로 라는 해시태그를 달고 죽은 생명을 집어 삼킨 걸 자랑할 것이라면, 차라리 닥쳐라. 나는 연애하다 헤어져 죽을 일이 없으니 안전 이별 운운하는 저 '메갈'들은 피해의식으로 똘똘 뭉쳤다며 영혼에 생채기를 입힐 것이라면, 차라리 닥쳐라.


우리는 침묵해야 할 때 말이 너무 많고, 말해야 할 때 지나치게 침묵한다. 마이크를 대주지 않아야 하는 곳에 많은 마이크를 대주고 있고, 정작 마이크가 향해야 할 것에 등 돌리고 있다.


말해야 할 것을 말하지 못하고, 닥쳐야 하는 이들이 닥칠 줄 몰라 우리 모두는 각자의 외로움이 진해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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