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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졔졔 Apr 18. 2022

대단히 사소한 코로나 시절 이야기

동거인 확진, 상상 코로나, 그리고 찌개 두부

지지난 수요일 밤, 일에 지쳐 침대에 몸을 던져 누운 동거인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미세 먼지를 하루 종일 걸러낸 공기 청정기가 말을 한다면 저런 목소리는 아닐까 싶은 공기 반 가래 반같은 소리였다. '너... 혹시?'라는 생각을 잠깐 했지만 머리만 대면 자는 나인지라, 잠이 생각을 덮는 데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여느 때처럼 잠든 줄도 모른 채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 내 꿀잠을 뚫고 다급한 공기 청정기가 나를 깨웠다.


"여보랭구, 여보랭구! 나 야응서응이야아으."


잠결에 들려온 동거인의 대사는 뇌로 전달되는 데에 약간의 지연이 있었지만 늘어진 말을 꾹 눌러 말 사이의 시간을 빼자 그의 말의 의미가 정확하게 와닿았다.


"양성?"


다들 한 번 씩 걸리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되었대도 증상이나 후유증이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인지라 여전히 죽음에 까지 이르는 사람들을 만드는 코로나19에 대한 말이었다. 그 말을 어제저녁 순두부찌개에 각자의 수저를 사정없이 섞어 먹던 동거인이 마스크도 끼지 않은 채 하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짜증이 치밀었다.


"... 뭐???? 양성???? 그런데 왜 마스크도 안 끼고 깨워!"


누군들 좋아하겠느냐만 나는 아픈 걸 정말 지독하게 싫어한다. 아픈 것 자체도 괴롭지만, 계획했던 일정이 다 틀어지는 것이나, 틀어지는 일정들을 대신해 양해와 사과를 구하는 과정, 몸 상태가 조금만 나아져도 이젠 좀 괜찮냐며 득달같이 달려드는 일정 부채 상환 시기는 더더욱 끔찍하다. 몸이 아프면 정신력으로 버티면 된다지만 코로나를 피해 다니느라 이미 거지가 된 체력 때문에 (핑계 맞다) 하루하루를 그나마 정신력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에 얹어 더 끌어올 정신력 같은 게 있을 리도 만무하다. 근데 지금 동거인이 마스크도 안 끼고 나한테 가십을 전하듯 본인의 양성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대환장.


"이 자식이? 야! 너 당장 마스크 안 껴?"


나를 신경 쓰지 않는 듯한 태도에 부아가 치밀었다. 거실로 나가자 한층 더 가관이었다. 밀봉되지 않은 두 줄이 선명한 키트가 식탁 위에 그대로 놓여있었다. 당장 키트를 밀봉하라고 동거인에게 한 차례 더 잔소리를 퍼부었다. 동거인은 자가 키트를 포장하더니, 밀봉된 두 줄 자가 키트와 함께 그 길로 병원에 가서 확진 판정을 받아왔다. 나는 그동안 시시콜콜한 얘길 나누곤 하는 친구들과의 단톡방에서 동거인의 확진 소식을 전하며, 대체! 왜! 동거인은! 양성 판정을 받았으면! 조신하게 마스크를 착용하고! 방역에 좀 더 신경 쓰며! 스스로 격리 공간을 마련하고! 격리 공간에 들어가서! 센스 있게! 양성 소식을 알리는 카톡을 보내 놓을 수는 없는지! 평소에 내가 일어나는 시간보다도 뭐 좋은 소식이라고! 일찍 깨워! 더 피곤하게 하는지! 를 성토했다.


집이 그나마 투룸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동거인의 옷, 당근마켓에서 받아 온 오래된 전자 피아노, 캣휠, 그리고 고양이 모래가 잔뜩 채워진 화장실 세 개가 놓인 방을 동거인의 격리처로 쓰기로 했다. 온 거실이 모래밭이 될 테지만, 동거인의 거처 마련을 위해 고양이 화장실 셋을 거실에 빼두었다. 그렇게 한 평 정도 될만한 공간이 마련되자 나는 지체도 미련도 없이 동거인을 가두고 우리 집 방역당국의 역할을 도맡았다. 동거인을 가둬놓고도 아침에 마스크도 끼지 않고, 두 줄 뜬 키트도 아무렇게나 내두고 점심에 넣어준 배달 용기 쓰레기를 밀반출(?)하려다가 걸린 동거인에 대한 짜증이 멈추질 않았다.  짜증으로 씩씩대는데, 구청으로부터 카톡이 도착했다. 나도 PCR을 해보라는 내용이었다. 바로 선별 검사소로 향했다. 이제 걸릴 사람들은 한 번 씩 다 걸렸거나 격리 중인지 선별 검사소는 휑했다. 줄을 설 필요도 없었다. 도착하자마자 콧구멍을 내보이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다행히 (아직은) 음성이라는 문자를 받았다. 같이 양성이라면 나란히 드러누울 수 있었겠지만, 밖에서 돌보는 역할이 주어졌다. 그 후 일주일 간은 모두가 상상할 수 있을 광경들의 연속이었다. 배달 음식을 시키고 방에 넣어주고, 물을 떠 다 달라면 떠다 주고, 아픈 곳은 없는지 종종 카톡으로 체크하고, 화장실은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동거인이 화장실에 오가는 때마다 소독제를 미친 듯이 뿌려대는 일의 반복. 의외로 가장 괴로운 것은 격리처에 난입하려는 고양이 셋이었다. 영역 동물인 고양이들은 본인들의 영역에 민감하다. 그런데 그들에게 중요한 영역의 일부를 댕강 빼앗기자 이들은 닫힌 방 문 앞에 셋이 쪼르륵 앉아 문을 열라며 시위의 목소리를 드높였다.


"야ㅏㅏㅏㅏㅏㅏㅏ옹!!!!!!!!!!!!!!!!!!! (열어ㅓㅓㅓㅓㅓㅓㅓㅓ!!!!!!!!!!!!)"


셋이 단체로 합창을 하는 탓에 견딜 수 없이 괴로운 나머지, 나는 우리 집 방역당국의 권력으로 행차 요구를 하는 고양이들에게 격리 공간과 바깥 공간 사이의 통행권을 내주었다. 고양이들은 격리 공간에서 나올 때마다 소독제 샤워를 해야 했지만 백신을 맞고, 마스크를 끼고, QR을 찍고서라도 맛집엔 가야 하는 인간들과 다를 바 없이, 고양이들은 방역을 당하고(?)서라도 기꺼이 격리처를 드나들었다.


당장 문 열라고 소리치는 날라, 호두, 콩떡이. 호두가 이번에 화가 제일 많이 났다.


그런 광경이 일상이 될 때쯤 동거인의 격리 마지막 날이 다가왔다. 처음엔 짜증스러웠던 동거인의 격리는 어느샌가 은근히 즐거운 일이 되어있었다. 동거인의 증상이 심하지 않아서 마음이 크게 불편하지 않다 보니 좋은 점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잘 때 옆에서 코 고는 사람으로부터의 해방! 일하기 좋은 책상 공간의 독점! 씻고 나와 나체로 완전히 몸 말리는 호사! 아아, 정말로 이 모든 것은 오늘부로 끝인 건가요... 아쉬운 마음에 정말 격리를 해제해도 되는 것인지 인터넷을 뒤졌다. 격리 기간 이후에도 전염성이 남아있을 수 있다는 글들이 보였다.


'그래, 이거야!'


동거인 격리 해제 6시간 전, 만약 내가 음성이라면 격리까진 아니더라도 동거인과 하루 이틀 정도 각방 쓰는 분리 생활을 연장하리라는 기대를 살짝 품고 자가 검사 키트를 꺼냈다. 동거인이 본인의 양성을 확인한 바로 그 식탁에 앉아, 뻥을 조금 보태서 경건한 마음으로, 검체 채취 면봉을 뜯어 목구멍을 한 번 찌르고 그 면봉을 다시 양 쪽 콧구멍에 넣어 휘저었다. 다시 면봉을 용액 통에 넣곤 휘저은 후 뚜껑을 닫고 타로 카드 뽑을 때의 긴장되는 마음으로 키트에 침과 콧물과 검사 용액이 뒤섞인 액체를 톡, 톡, 톡 떨어뜨렸다. 검진 키트가 액체로 젖어가는 몇 초 간 내 대수롭지 않은 기대와 왜인지 모르는 불안도 번져갔다.


그리고 선명한 두 줄이 떴다.


?


젠장!!!!!!!!!!!!!!!!!!!!!!!!!!!!


걸릴 사람 다 걸린 지금 이 모먼트에? 두 줄? 코로나에 안 걸리려고 그 난리를 쳤던 지난 세월, 이를테면 하루에 500걸음 이상 걷지 않고 집에만 콕 박혀있던 것이나, 고양이를 소독하던 것이나, 격리된 인간을 수발들던 모든 부질없는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격리 해제까지 몇 시간 남지 않은 동거인이 있는 방문을 향해 소리쳐 외쳤다.


"야! 대대 (대충 동거인을 부르는 말)! 나도! 양성이야! 으허허으어엌."

"여보랭구? 여보랭구 양성이야? ㅎ_ㅎ"


자기 자신의 코로나 양성 소식을 전할 때처럼 동거인은 해사한 표정으로 일주일 만에 마스크를 끼지 않은 채 내 눈앞에 등장했다. (좋냐 이 새끼야?) 왜인지 기분 좋아 보이는 동거인과 달리 나는 잔뜩 허탈했다. 이 통탄과 비애를 위로받고 싶은 마음과 약간의 관심받고 싶은 마음을 더해 인스타그램의 스토리와 가족 단톡방에 두 줄이 선명한 자가 키트 사진을 올렸다. 그리곤 피식 새어 나오는 실없는 웃음과 함께 청소기를 돌리고, 엉엉 우는 소리를 흉내 내며 고양이를 끌어안고, 체념한 듯 책상을 정리했다. 그러다 갑자기 목 아픈 기분과 두통이 몰려와 '아, 이제 시작인가...' 하는 생각을 하는 머리를 침대 위에 뉘었다. '아... 이것이 그 말로만 듣던 코로나인가... 목이 아프네...'


인스타에 올렸던 서러운 마음


까무룩 잠이 들려하는데 동거인이 다급히 나를 부르더니 핸드폰을 확인해보라고 말했다. 무슨 일인지 묻자, 나의 엄마와 동생이 동거인에게 보이스톡을 각각 두 통 씩 걸었다며 나와 연락이 안 돼서 본인에게 연락을 한 것 같다고 답했다. 엄마는 이미 코로나 감염 및 완치 전력을 보유했고, 호되게 앓았다. 엄마가 따로 사는 딸내미의 코로나 소식을 듣곤 걱정이 되었나 보다 짐작하곤, '아이고 어쩌니'를 열 번을 반복할 엄마보단 차분할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동생은 생각지도 못한 얘길 했다.


"언니, 아빠가 지금 언니한테 가고 있어. 자기 코로나 걸렸을 때 먹던 약 남은 거 가져다준다고 단톡에서 언니 두 줄 뜬 거 보자마자 냅다 뛰어 나간 모양이야. 갑자기 아빠가 들이닥치면 언니가 놀랄까 봐 알려주려고 전화했는데, 안 받아서, 혹시나 싶어 언니 동거인한테 연락했었지. 아니 뭐, 고양이도 그렇구 코로나도 그렇구 언니 집 안까지 들어가려고 하진 않겠지만 혹시나 해서."


아빠가 오고 있다. 도봉구에서 은평구로, 북한산을 사이에 끼고 데칼코마니처럼 닮아있는 동네 사이를, 터널 두 개를 지나오고 있다. 운전이라면 젊을 때도 싫다 말하고, 요즘은 눈도 침침하고 손가락도 아파 더더욱 운전은 싫다던 아빠가, 밤길 운전이라면 귀찮은 걸로는 최고로 치는 아빠가 덜컹거리는 스타렉스를 끌고 나한테 오고 있다. 과년한 처녀 딸이 (섹스를 하는 줄은 알고 있어도) 동거를 하고 있다곤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는 아빠가 집으로 오고 있다! 딸의 코로나 바이러스 진앙지가 같이 사는 남자일 거라곤 생각도 못한 채로. 비상이다!


동생 말처럼 아빠는 나와 같이 사는 고양이들에 대한 알러지로 집 안까지 들어오려 하진 않을 터다. 그렇지만 긴장을 놓을 수는 없다. 사태의 정확한 파악을 위해 이번엔 아빠한테 전화했다. 아빠가 전화를 받는다. 심상한 말투로 운을 뗄 준비를 하고 말했다.


"아빠~ 아빠 나한테 오고 있다며~ 뭐하러 그래~ 괜히 코로나 또 걸릴라. 약도 내일 내가 받으면 되는데 굳이 뭘 먼 길을 와~"

"아니야, 괜찮아. 나는 걸렸다가 나은지 얼마 안 됐으니까 마스크 끼고 집 밖으로 잠깐만 내려와. 곧 도착해."


게으름이 일상의 기본 값이 된 터라 집 밖으로 나가는 건 1층이 아니라 현관문 앞도 싫지만, 꾸물거리는 속도에 성격 급한 아빠가 현관까지 올라오는 건 더 싫은 일이다. 입고 있던 반팔에 동거인의 바람막이를 내 것인 양 뒤집어쓰고 마스크를 꾹 눌러쓰곤 종종 거리며 계단을 내려갔다. 건물 밖을 나서자 낮과 달리 아직은 서늘한 봄 밤의 공기가 먼저 나를 맞는다. 곧 눈에 비상등을 켠 채 서있는 뒤통수가 찌그러진 익숙한 번호판의 스타렉스가 보였다. 운전자석의 문이 열리고 아빠가 내렸다. 일 잘하고 팔 힘 좋은 배스킨라빈스 알바가 한 스쿱 야무지게 퍼낸 것 같이 깊이 퀭한 눈을 한 아빠가. 얼마 남지 않은 머리칼이 갓 태어난 아기의 머리카락보다 더 가늘어진 것 같은 아빠. 한 때는 나한테도 엄마한테도 짜증이나 화를 낸 일이 잦았다는 증거로 얼굴 곳곳의 주름이 선연히 남아있는 얼굴의 아빠. 나보다 더 마르고 아파 보이는, 예전에 입던 바지가 많이 커져 바지춤을 추켜 올리는 늙은 남자.


아빠도 날 발견하고 다가왔다. 비밀작전을 수행하는 것 같은 말투로 목 아프니 내겐 한 마디도 하지 말란 얘길 먼저 꺼냈다. 본인 말에 대한 대답은 고갯짓으로 충분하단 말과 함께 아빠는 비닐봉지 두 개에 함께 가지고 온 것을 주섬주섬 꺼내놓았다.


"자. 이건 아빠가 먹던 약이야. 너 지금 목 아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는? 머리도 아파? (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더 증상이 안 좋아지기 전에 아빠가 먹던 약이니까 일단 이거 먹어. 알았지? (나의 끄덕임) 자, 이건 아빠 확진 때 받았던 체온계. 이걸로 꼬박꼬박 열 재라고. 혹시 모르니까. 그리고 이거 봐봐. 그리고 이건 엄마도 확진되었어도 못 받았던 건데, 이건 뭐냐면 손가락 들어봐. (나는 시키는 대로 오른쪽 검지를 들었다.) 이 사이에 손가락을 꽂고 (on) 버튼을 누르면 산소 포화도를 측정하는 거라고 이게. 숨 쉬기 어렵거나 하면 한 번 체크해보고. 95 밑으로 내려가면 병원에 가던가 해야 돼. 알겠지?"


마지막 질문인가 싶어 나는 다시 한번 시키는 대로 고개를 끄덕이고 다 알았다는 표시를 했다. 아빠는 이제 가려나, 동거인이 있는 집에 들이닥치진 않으려나 여전히 마음 한편에 선 노란 비상등이 켜져 있는 내 조급한 마음도 모르고, 아빠는 두 번째 비닐봉지를 열어 보였다.


"그리고 여기 봐봐. 이건 삶은 달걀인데 지금 빈 속에 약 먹으면 안 되니까 이거 지금 먹으라고. 이거 먹고 약 먹어. 이건 요구르트인데, 비피더스. 근데 이거 그냥 먹으면 차가워서 목에 좋지 않으니까 먹고 싶으면 실온에 잠깐 꺼내 뒀다가 먹고. 요구르트도 그렇고 너 찬 거 절대 먹지 마라. 알았지? 커피 특히 마시지 말고. 목이 건조하면 안 되니까. 자, 그리고 이건 두부인데 이거 부쳐먹어. 이거 부쳐먹고 달걀 먹고 약 먹으라고. 약 먹고 자라고. 알았지? 아빠 말 명심하고."


나는 두 번째 봉투를 열어 이것저것 보여주는 아빠에게, 첫 번째 봉투 속 물건들을 설명하는 아빠한테와는 달리 할 말이 아주 많았다.


'아... 아빠 나 비건 지향이라니까. 굳이 달걀을 먹지 않는다구... 요구르트도 굳이 먹지 않는다고. 이거 유제품인 건 둘째치고 당이 너무 많이 들어있어서 안 먹는데... 아빠... 그리고 두부도... 부쳐 먹긴 뭘 부쳐먹어. 찌개용 두부라고 쓰여있고만... 그리고 커피... 커피 어떻게 안 마셔... 나 그런 삶 못 산지 오래됐어...'


하지만 생각만 했다. 열심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굳이 말을 보태서 아빠의 이 깜짝 이벤트를 연장할 필요는 없지. 게다가 내 앞에 찌개용 두부와 삶은 달걀과 비피더스 한 줄을 담은 봉투를 열어 보이고 있는 이 아저씨의 풍채가 너무도 연약하고 가냘파 보여서 이 약한 아저씨의 마음에 상처가 될 말을 굳이 덧붙이고 싶진 않았다. 건강검진 결과가 이상해서 낮에 조직검사를 받고 왔다는 나이 든 남자. 그 몸을 끌고 40분을 운전해오고 다시 40분을 운전해 돌아갈 늙은 아비의 마음을 부정하는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집에서 당장 챙겨 가지고 나올 수 있는 건 닥치는 대로 쑤셔 넣어 챙겨 온 것 같은 두 비닐봉지 속 짐들과 여전히 깜박거리는 스타렉스의 비상등, 한 때는 내게 폭력을 휘두르던 굽고 마른 어깨가 귀엽고 애잔해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는 마음이 가득 차서 그저 걱정하지 말라고 고개를 연신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올 때도 제멋대로였던 아빠는 갈 때도 제멋대로 이제 간다며 또 쿨하게 떠났다. 집에 올라와선 아빠 앞에서 고갯짓으로 잔뜩 늘어놨던 거짓말이 무색하게 아빠가 챙겨 온 것들을 냉장고에 그대로 넣어 두었다. 하지만 아빠가 들고 비닐봉지는 웃기고 귀엽고 슬프고 충만하게 기뻐 주변에 잔뜩 자랑했다. 그리곤 아빠와 내가 서로 미워하고 얼마나 서로 싫어했는지 아는 사람들이라면 어리둥절할 사랑의 모습에 대해, 비건을 지향하는 딸에게 삶은 달걀을 쥐어주는 모양의 사랑에 대해 곱씹으며 약만 먹고 까무룩 잠이 들었다.


내꺼야 임마. 우리 아빠가 나 갖다 준 거거든?


다음 날, 아빠가 준 약을 먹은 덕인지 몸은 크게 아프지 않았다. 하지만 목에 있는 약간의 불편감, 동반되는 무기력감과 컨디션 난조는 여전해 양성 확진을 받으면 회사에 이야기하고 조금 쉬리라 생각하며, 병원으로 향해 일찍 결과가 나오는 신속항원 검사를 했다. 자가 키트가 두 줄이라 왔다는 말에 양성이면 보통 양성이 맞는데 어쩌냐는 말과 함께 안타까워 보이는 눈썹 모양을 하며, 간호사는 결과가 나오면 바로 이야기 해줄테니 3-40분을 기다리라 말했다. 20분 정도 지날 무렵, 생각보다 빨리 간호사가 내 이름을 불렀다.


"졔졔님!"

"네."

"음성입니다."

"아... 네??????"


전날 밤의 난리가 무색하게도 나는 음성이었다. 머쓱함은 순식간에 나를 휩쌌지만 자가 진단 키트의 위양성으로 발현된 상상 코로나 증상을 순식간에 사라지게 하는 한 마디였다. 음성이라니. 내 코로나는 그렇게 하루 만에 없어졌다.


집에 돌아오니 냉장고 속엔 여전히 찌개 두부가 남아 있었다. 격리 기간 내내 문 밖으로 기침 소리를 내보내던 우리 집 동거인도, 더 이상 공기 청정기 같은 목소리가 아닌 원래의 목소리로 돌아와 있었다. 그날 저녁, 아빠 발(發) 찌개 두부를 넣은 김치찌개를 (동거인이) 끓여 (내가) 먹었다. 김치찌개는 맛있었다. 찌개용 두부는 따뜻하고 적당히 단단하고 적당히 부드러웠다. 두부를 오물오물 씹으며, 뜨끈한 국물을 삼키며, 대단히 로맨틱하거나 대단히 드라마틱하진 않은, 그러나 대단히 소중한 사람들의 대단히 귀중한 사랑과 보살핌이 내 주변에 있구나 생각했다. 어쩌면 자가 키트 결과가 이상했던 게 아니라 이 별 거 아닌 기적 같은 사랑들 때문에 하룻밤 새 코로나가 싹 다 나은 건 아닐까 믿고 싶어졌다.








여전히 코로나와 후유증으로 고생하고 계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쾌차를 기도하며, 저처럼 여전히 음성이신 분들이 계시다면 쭈-욱 건강만 하시라고 은평구 음성왕의 기운을 보내 드립니다. 모두 건강하세요.


은평구의 음성왕 졔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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