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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심 Sep 26. 2019

#41. 제 바지 좀 주세요

 살면서 이런 일에 말려들 줄 알았겠는가. 나는 당혹스럽고 난감한 마음을 최대한 겉으로 드러내려 노력하고 있었다. 감지 않아 잠버릇이 그대로 드러난 눌린 머리, 퀭한 눈, 무릎에 큰 보호대를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늘어난 트레이닝복, 곧 명이 끊어질 듯 달랑거리는 삼선 슬리퍼, 굽은 등에 애처롭게 매달려 있는 백팩. 트레이닝복 주머니 근처를 맴도는 떨리는 손까지.

 

 저들 누구도 내 마음을 보려 하지 않는다. 이렇게나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고 있는데 말이다. 그들은 백화점 수선실 전신 거울 앞에 서있는 여학생을 주시했다. 오직 그 학생의 아버지만이 자신의 질문에 어서 대답하라는 듯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바지를 찾으러 왔을 뿐이었다. 동네 백화점에서 구매한 슬랙스 바지 수선을 맡긴 뒤 여기저기 구경하고 다니다 30분 뒤 찾으러 왔을 때는 이런 상황이 벌어질 줄 꿈에도 몰랐다. 생각을 해야 꿈에도 나오지 않나.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일을 꿈꿀 수 있을까. 나의 궁금함은 여기서 마치도록 하자.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수선실에는 총 8명의 사람이 위치하고 있었다. 2명은 수선 작업 중이었으니 제외하자. 나머지 6명은 이렇다. 새로 구매한 듯한 바지를 입고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중학교 여학생 1명, 학생의 어머니 1명, 아버지 1명, 여동생 1명, 수선사 아주머니 1명 그리고 나.


 즐거운 마음으로 수선이 끝난 바지를 찾기 위해 수선실 문을 열었을 때 100분 토론이 진행되는 중이었다. 전신 거울 앞에 서 있는 학생은 방금 구입한 바지 기장을 발목 위까지 줄이고 싶어 했다. 학생의 아버지는 누가 그렇게까지 바지를 줄여 입냐며 한탄했고, 어머니는 더 이상 이 주제로 끼고 싶지 않다는 듯 체념한 표정이었으며 동생은 잔뜩 인상을 쓴 채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다. 수선사는 학생이 원하는 대로 바지를 줄여도 좋겠다는 쪽이었지만, 학생의 아버지는 강경했다. 이런 상황에 갑자기 내가 등장한 것이다. 나는 왜 그렇게까지 30분을 꼭 지켰을까. 늦는다고 해서 바지가 스스로 걸어가진 않을 텐데 말이다.

 수선실 안을 가득 채운 사람들과 그들의 분위기를 피해 나는 조심스레 작업 중인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제 바지 좀 찾으러 왔는데요.”

 “저쪽에 서있는 사람한테 말씀하세요.”


 그가 가리킨 곳은 한창 끝장토론을 벌이고 있는 한복판. 학생의 아버지와 얘기 중인 수선사였다. 암담했다. 이런 상황에서 끼어들기 애매했다. 전신 거울 앞에 서있는 학생의 표정과 물을 있는 힘껏 빨아들인 듯 축 처진 어깨를 보면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저 표정을 보라. 내 바지 따위는 문제가 아니다.

 십 분 넘게 기다려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나도 한계에 다다랐다. 학생의 아버지와 열띤 토론 중인 수선사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제 바지 좀 주세요.”


 토론장에 토론 주제 당사자가 갑자기 등장한 듯, 영화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에서 간달프가 로한의 기마대를 이끌고 햇빛을 받으며 달려오듯, '해리포터' 마법사의 돌에서 론이 자신을 희생하기 위해 체스 경기에서 나이트를 적진 한복판으로 움직이듯 그들이 나를 바라본 건 아니고 나 스스로가 그들의 눈빛을 그렇게 느꼈다. 영웅이 된 기분이 아니라 그들이 서로의 의견에 매몰되어 있는 와중에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내가 느닷없이 짠 등장한 기분이랄까.


 “저 오빠한테 한 번 물어봐라. 어? 누가 그렇게 바지를 짧게 줄여 입어? 비싼 돈 주고 사서 그렇게까지 자를 거면 뭐하러 긴 바지를 샀어?”


 나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누군가 떠밀어 맞은 사람처럼 타의에 의해 이 토론에 끼게 되었다. 학생의 아버지는 쉬지 않고 말했다.


 “찰리 채플린 알아? 꼭 찰리 채플린 같다야. 옛날 영화에 나오는 사람처럼. 누가 그렇게 입어.”


 그는 섀도복싱을 하듯 보이지 않는 사람과 지속적으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옆에 서있던 수선사는 당황해하는 나를 불러 바지를 찾아 주었다. 너무도 고마워 손을 부여잡고 엉엉 울 뻔했다. 수선사에게 슬랙스 바지를 건네받을 때 하필이면 학생의 아버지가 내 바지를 봤다. 슬랙스. 지금 저 학생이 입고 있는 바지와 같은 검정 슬랙스.


 “저 오빠도 같은 거네. 저기, 요즘 원래 이렇게들 짧게 입어요? 얘한테 말 좀 해줘요.”


 나는 내 이어폰이 왜 주머니에 들어 있는가 하며 절망했지만, 질문을 받은 이상 무시할 수 없었다. 용기를 낼 시간이었다. 저 학생이 원하는 방식으로 입었으면 했다. 내가 아는 만큼 얘기했다. 요즘 유행하는 기장을 짧게 자르는 크롭 슬랙스와 기장을 길게 해서 신발을 덮는 와이드 슬랙스 등을. 중간중간 아버지가 좋아할 만한 단어들을 섞었다. 기장을 짧게 하면 단정함. 학생에게 어울림. 멋짐. 스타일 좋음. 길면 불량해 보임. 그에 맞는 신발을 또 사야 함(물론 이건 모두 헛소리다). 자신만의 절대 규칙과 절대 규율을 가진 어른들의 경우 본인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익숙한 단어들과 내가 주장하고 싶은 익숙하지 않은 단어들을 쓸데없이 섞어 쓰면 불편해하면서도 반박하지 않는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이구나 한다. 물론, 늘 통하는 건 아니다.


 수선사와 학생이 뭐라 뭐라 말을 시작했다. 나는 학생 아버지의 떨떠름한 표정을 뒤로한 채 기장을 줄인 내 바지를 들고 수선실을 나왔다. 할 몫은 다했다. 원래 내 몫이었는지 의문이지만.



 집에 와서 기장을 줄인 바지를 입어보는데 그 학생이 원하는 대로 바지를 줄였을까 궁금했다. 내심 신경 쓰였다. 앞으로 바지만이 아닐 테니까. 슬랙스 기장을 짧게 자르는 일 정도는 우습게 되어버릴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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