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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덤덤 Jul 11. 2020

1. 서울에서의 순례

산티아고 순례길에 갑니다.


 여행을 시작하며 가장 설레는 순간은 비행기표를 끊는 그 순간이 아닐까 생각한다. 2018년 06월 08일 3년간의 연애가 끝이 난지 7일째 되는 날, 몇 년간 망설였던 산티아고 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별 다른 이유는 없었다. 매일 반복되는 일에 지쳤고, 영원할 거라 믿었던 사랑은 끝이 났으며, 매일매일 건조하게 흘러가는 날들이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사실 이 세상에, 요즘의 젊은이들이 살아가는 이 현실에 진짜 행복을 찾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 일일까? 매일 습관처럼 출근을 하고 습관처럼 업무를 보고 습관처럼 퇴근을 하면 시원한 맥주 한잔에 ‘아~ 인생 참 뭐 같다.’ 하고 한숨이나 쉬는 게 내 인생의 전부인 것이 문득 불행하게 느껴진 것이다. 새로운 자극 같은 것이 필요했다. 예를 들면 제주도 한 달 살기, 자전거 국토 종주, 템플 스테이 그것도 아니면 워킹 홀리데이. 사실 이 답답한 상자 속을 벗어나고 싶은 게 가장 큰 욕구였다. 솔직한 심정으로 그만 좀 출근하고 싶고, 그만 좀 스트레스받고 싶고, 백 날 열심히 살아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미래를 위한 삶보다는 지금을, 현재를, 스물여덟의 김민서를 살아가고 싶었다.


 그래서 멍청한 건지 솔직한 건지, 이별한 김에, 이별해서 술 마신 김에 저지른 건지, 비행기 표를 끊었다.


달 뒤, 9월 11일 나는 산티아고 순례길에 가기로 했다.












다음 날 출근을 해서 대표님께 “8월 말 까지만 일 하겠습니다.”라고 통보했다. 어찌 보면 내 강사 인생의 첫 직장이고, 지난 시간 동안 쉴 새 없이 다져온 나의 커리어가 이 한마디로 모두 무너지는 셈이었다. 내가 담당하고 있는 모든 수업들을 정리해야 했다. 당연하게도 나의 급여는 반 토막이 났고, 맡고 있는 업무는 주어진 시간 내로 처리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하지만 이상했다. 내 삶에는 그 전보다 훨씬 큰 뜨거움이 샘솟는 듯했다.


 매일매일을 ‘서울에서의 순례’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하루 평균 7개의 수업을 할 시절, 산티아고까지 90일, 주말을 제외하고 대략 420시간의 수업을 마치면 나는 스페인으로 떠난다. 그 사실만으로 별 다를 것 없이 흘러가던 나의 인생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서울에서의 420km를 멋지게 걸어야지.' 하고 생각했다. 하나의 수업이 끝나면 ‘1km를 걸었다.’라는 생각에 산티아고에 한 뼘 더 가까워진 마음이 들었다. “산티아고에 가야지.”하고 마음먹었을 뿐이데, 내 인생이 벌써부터 달라진 기분이었다. 이 길을 걸어야지 하고 생각한 내가 벌써부터 자랑스러운 느낌이었다.







출발 세 달 전, 여전히 나는 눈을 뜨면 밥도 못 먹고 급하게 출근을 했고, 화장실 갈 시간도 없이 바쁘게 일을 하다가 하루가 다 지날 즈음에야 거리로 나왔다. 친구를 만나기에도,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기에도 너무 늦은 시간. 그 공허함과 외로움을 맥주 한 캔으로 달래곤 했던 숱한 밤들은 이제는 많이 달라졌다. 저녁 열한 시, 시끄럽게 소리 지르며 택시를 잡고 있는 취객들과 지친 하루를 마무리하는 많은 직장인들 사이로 나의 하루는 다시 시작되었다. 정신없이 바빴던 하루에 지칠 법도 한 두 발이 꽁꽁 동여맨 등산화 속에 안착하면 이상하리만큼 힘이 났다.



직장에서 집까지는 대략 10km. 지친 몸으로 지하철을 타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조차 힘이 벅차 택시에 올라 퇴근을 할 때에도 풀리지 않던 피로가, 새벽 한 시가 다 되어갈 때까지 땀 삐질삐질 흘리며 걷는 이 시간에 전부 풀려버리는 것이다. 한강에 반사된 서울의 빛은 만난 적 없는 스페인의 쏟아질 듯한 별이 되고, 바람에 살랑이는 갈대 소리는 꿈에도 그리던 스페인의 메세타로 나를 데려갔다. 쳇바퀴 돌듯 굴러갔던 나의 하루가, 살아야 하니까 꾸역꾸역 살아지던 나의 하루가, 몇년을 미루던 순례길을 결심한 순간 순식간에 활기를 찾은 것 이다. 기분 좋은 간질거림. 참 오랜만에 그저 살아지는 것이 아닌 스스로 살아가고 있다.







'Camino de Santiago' 한 번 가겠다고 마음먹으면 꼭 가게 되는 마법의 길이라고 했다. 참 오랜 시간 마음속에 품어왔던 이 길이 나를 부른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저 마음먹었을 뿐인데, 요즘은 참 자주 심장이 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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