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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덤덤 Jul 12. 2020

3.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자.

조금만 더 이따가 갈까?

생장 피에드 포르에 도착한 직후, 꿈에도 그리던 생장에 도착했다는 감격스러움을 느끼기도 전에 일행들을 따라 빠르게 순례자 사무실로 향했다. 덕분에 순례자 사무실이 오픈한 후 빠른 순번으로 크레덴시알(순례자 여권)을 발급받을 수 있었다. 바욘에서 생장으로, 그리고 생장에서 순례길 첫 단계인 크레덴시알을 발급 받을때 까지  '처음'이 주는 긴장감은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도 정확하게 진행되었다. 폭풍이 한차례 몰아친 기분이었다. 한국인 특유의 빨리빨리와 엄청난 정보력 덕에 나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순례의 첫 단계를 무리 없이 끝마친 것이다. 하지만 이 찝찝한 기분은 어디에서 오는거지? 편안함과 어안이 벙벙한 느낌 그 중간 어디쯤에서 헤매고 있을 때, 알베르게(순례자 숙소)를 미리 예약해 놓은 나를 제외한 일행들은 다시 급하게 생장의 무니시팔 알베르게(공립 숙소)를 찾아 나섰다. 나는 드디어 혼자가 되었다.



생장 드 피에 드 포르의 Makila Albergue

 만난 지 겨우 세 시간 남짓 되었지만 엄청난 결속력으로 한 '팀'이 되어버린 일행들은 저녁식사와 장보기, 내일 아침 출발 일정까지 모두 함께 할 작정인 것 같았다. 애진작에 숙소를 예약해 둔 덕에, 혼자 남겨진 아담한 알베르게의 정원에서 내일 오를 피레네 산맥을 안주 삼아 맥주 한잔하며 조용히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아, 마음이 편안해진다.


 매일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하루 종일 방긋방긋 웃는 모습으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이 직업이다 보니 친절한 말투와 사람 좋은 미소 뒤에 서서 사람을 대하는 것에 이골이 났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 참 싫다. 혼자라는 두려움에 억지로 누군가의 일행이 될 바에는 외로움을 택하겠다. 물론 혼자보다는 둘이, 둘 보다는 여럿이 좋은 게 인생사지만 내일은 혼자 출발하겠노라 다짐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가리라!


 








해도 뜨지 않은 깜깜한 새벽, 알베르게에서 제일 먼저 일어났다. 아직은 익숙지 않은 배낭 싸기에 끙끙거리다가 서둘러 출발하자는 생각에 거리로 나왔다. 노란 화살표를 찾아 어색하게 두리번거리는 내 등 뒤로 살갑게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아뿔싸, 아주머니와 아저씨가 너무나 반갑게 손을 흔들며 다가온다.





 아침도 먹지 않고 출발해서는 피레네를 넘을 수 없다며 억지로 내 손에 쥐어준 하얀 빵에 감사한 마음보다는 오늘도 이 길을 혼자서 시작하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불만스러운 기분이 비죽이며 새어 나온다. 조금씩 거리를 두며 앞질러 걷다가 먼저 올라가 보겠다고 인사한 후 속도를 높여 걸었다. 한참을 헤드 랜턴의 불빛에 의존해 어두운 산길을 오르다가 등 뒤로 느껴지는 환한 햇살에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보았을 때 점처럼 작아진 아주머니와 아저씨의 모습에 이제야 겨우 숨을 고른다. 아침 햇살이 비친 조용한 산길을 한 발 한 발 걸어보았다. 꿈에도 그리던 순례길에 올랐다는 것이 지금에서야 실감이 난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첫 일출, Pyrénées Mts.


 

 아주 어려서부터 '알프스 소녀 하이디'를 굉장히 좋아했다. 엄마가 사준 수십 권의 전집 중에 이 책만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읽고 또 읽었을 정도로. 나의 첫 해외여행을 고민의 여지도 없이 알프스 산맥이 있는 스위스로 결정했을 정도로. 피레네 산맥은 그런 나에게 천국과도 같은 곳이었다. 넓은 들판 위에서 뛰노는 아기 양들과 여유로이 풀을 뜯는 소떼들, 그 사이로 맨발의 하이디가 뛰쳐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내 상상 속 그곳의 모습과 닮아있었다. 아니, 그 이상으로 아름다웠다. 심지어는 안개가 자욱이 낀 그날의 날씨 덕분에, 줄지어 올라가는 순례자들의 모습이 안갯속으로 사라지고 나면 이 경이로운 산길에 오롯이 나만 존재하는 듯한 기분이 들곤 했다. 아, 영원히 이 안갯속에 혼자이고 싶다.







  하지만 내 마음과 달리 이 길에서 혼자가 되는 일은 쉽지 않아보인다. 평균적으로 30일, 800km의 이 길을 매 년 30만명에 육박하는 순례자들이 걷는다. 힘겹게 피레네 산맥을 넘은 후 도착한 론세스바예스(Roncesvalles)의 유일한 알베르게에서 역시 체크인을 하려는 순례자들이 빼곡하게 줄을 서 있었다. 삼삼 오오 모여있는 각국의 순례자들 사이로 적지 않은 수의 한국인 순례자들 또한 무리를 지어있다. 한국인 순례자들 사이에서는 지금 순례길은 "숙소 전쟁"이라며 당장 내일의 목적지인 수비리(Zubiri)에 일찍 도착하지 않으면 숙소가 없을 수도 있다는 소문이 무성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혼자이고 싶다고 생각했던 주제에 우선은 숙소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전쟁에 참여하려면 일행이 필요하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건 다음으로 미루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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