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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형 은행원 Oct 09. 2021

어쩌면 그건 이상(理想)의 결핍

네가 지금 혼란스럽고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꽤 머리가 복잡했던 날이었다. 가볍게 책이나 한두권 읽으려고 도서관에 갔다. 그런데 마땅히 책이 골라지지 않았다. 책들 사이에서 헤매다 우연히 타샤의 정원이라는 책을 마주하였다.


나는 책상에 앉아 책을 읽었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까지 2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이미 정원을 꿈꾸기 시작했다.




어떤 미래는 과거처럼 기억된다. 나는 미래에 내가 정원에서 사용할 삽 자루의 감촉과 꽃 잎을 쓰다듬을때 느껴지는 매끄러운 마찰, 정원을 걸을때 바짓단을 적시는 이슬의 감촉을 마치 어제의 일처럼 기억한다.


이른 아침이면 나는 삽과 양동이와 가위를 들고 집 밖으로 나설 것이다. 엉겅퀴와 가시덤불을 모아 태우고, 작은 개천과 연못을 만들 것이다. 그 주위로 산책로를 만들 것이고 길을 따라 온갖 화초를 심을 것이다. 봄, 여름, 가을에 걸쳐 꽃을 피우고 향기를 뿜어내고 나비와 벌을 불러들이는 꽃을 눈이 닿는 모든 곳에 심을 것이다. 울타리를 치고 닭들을 풀어 놓을 것이다. 내가 어디를 가든 나를 졸졸 따라다닐 강아지를 한 마리 키울 것이다. 그리고 정원 한 귀퉁이에 내가 먹을 만큼 당근과 감자와 고추를 심을 거다.


가끔 필요한 물건이 생기면 근처 고물상으로 갈 것이다. 그곳에서 쓸만한 물건을 찾은 다음 집으로 돌아올 것이고 낑낑 거리며 그것의 녹을 벗기고 구멍을 메울 것이다. 버려진 물건들에 다시 생명을 불어넣을 때마다 나는 우쭐해져서 오랫동안 그것들을 바라볼 것이다. 내 손에 의해 새로 살아난 물건들 모두가 각자의 위치에서 나와 함께 정원을 가꿔 나갈 것이다.


첫해에 나의 정원은 볼품이 없을 것이다. 기껏 심어 놓은 구근은 꽃피우지 못한 채 썩어버리고, 이곳저곳에 꽃보다 잡초가 더 많이 우거져 있을 것이다. 작곡 식물은 제대로 자라지를 않아서 마트까지 먹을 것을 사러 나가야 할 일이 꽤 많이 있을 것이다. 내가 왜 이런 병신 같은 선택을 해서 사서 고생을 하는 것인지 후회를 하는 날도 꽤 많이 있을 것이다.


그다음 해도 별로 다를 것 없을 것이다. 그다음해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나고 문득 정원을 둘러보았을 때 정원의 곳곳에 햇살이 가득하고, 꽃들은 바람에 흔들거리고, 개가 발치에서 뛰어다니는 그런 완벽한 순간을 경험할 것이다. 이런 순간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자주 찾아오게 될 것인데, 그때면 나는 무엇도 괴롭지 않고, 후회되지 않으며, 무엇인가를 더 원하지도 않게 될 것이다.


그런 순간에 나는 너를 초대할 것이다. 길리엄이란 이름을 붙인 닭을 한 마리 잡아서(미안하다. 내 뱃속에서 영면하길), 고추와 감자, 미나리와 함께 뭉근하게 끓일 것이다. 함께 닭 매운탕을 먹고 차를 마신 다음 정원을 거닐 것이다.


나는 말할 것이다. “저 헛간이 길리엄의 집이었어. 집이라기보단 제국에 가까웠지. 길리엄은 황제였으니까. 나는 길리엄의 제국에서 만들어진 달걀로 매일 계란 후라이를 해서 먹어. 그리고 닭똥은 모아서 거름으로 써. 닭똥은 거름에 좋거든. 이 정원에 길리엄의 흔적이 깃들지 않은 생명은 단 하나도 없지. 그렇게 생각하면 길리엄이 우리 배 속에 있는게 아니라 우리가 길리엄의 배 속에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라고. 너는 이해할 것이다.


우리는 길리엄을 애도하고 나무 밑 그늘에 함께 앉아 함께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음악을 들을 것이다. 오래전 우리가 함께 그랬듯이. 그리고 네가 떠날 때 나는 커다란 바구니에 길리엄의 혈통이 담긴 달걀과 감자, 꽃을 한가득 담아 안겨줄 것이다. 그리고 네가 없는 새벽이면 나는 아주 멀리까지 산책을 할 것이다. 다친 생명이 있다면 데려다 치료해 줄 것이고, 그 밖에 내가 할 수 있는 선한 일이 있다면 수고를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겨울이 오면 잠들어있는 정원을 바라보며 오래도록 편지를 쓸 것이다. 내가 보고 듣고 느낀 모든 것에 관해 이야기하는 그런 시시콜콜한 편지를 쓸 거다. 어쩌면 아마도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삶이나 돌을 쌓고 정원을 가꾸는 방법에 관한 유튜브 채널을 운영할지도 모른다. 나는 마음이 이끄는 모든 것에 충분한 시간과 정성을 쏟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이상(理想)의 결핍


나는 하염없이 정원에 대해 생각을 하곤 해. 그리고 정원에 대해 생각을 할 때면 마음이 차분해지지. 내가 살아가면서 느끼는 모든 불안과 질투와 혼란이 아득히 멀리 떨어져 있다는 느낌마저 들어. 나는 결국 정원으로 돌아갈 것이고, 그리고 오랫동안 정원을 가꾸며 살아가게 될 거야. 그렇기 때문에 정원을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정원 안의 존재와 정원 밖의 존재로 세상이 명확하게 정리되지.


내가 지금 속해있는 세상의 위계나 질서는 정원의 기준에서 바라보면 조금도 중요하지 않아. 늦든 빠르든 나는 지금 속한 세상을 떠나게 될 것이고. 그것들은 정원에 아무런 자리를 차지하지 못할 테니까. 정원에서 중요한 것은 고요한 시간과 손발의 힘, 미적인 균형감각, 식물 생태에 대한 복합적인 호기심 뿐이야. 그리고 글을 쓸 연필과 종이만 있으면 충분하지. 정원에서 나는 이미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지.


그래서 네게 이야기 하고싶어. 네가 지금 혼란스럽고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어쩌면 그것은 네게 이상(理想)이라는, 어쩌면 조금 더 진부해져 버린 단어이기는 하지만 꿈이라는 너만의 정원을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조금만 생각해보면 기억해 낼 수 있을 거야. 정원이 하나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가 한때 정원사였어. 우리는 꿈을 꾸고, 씨앗을 뿌리고, 정원을 집어삼키려 하는 숲에 맞서 싸웠지. 산에서 내려온 짐승이 화초를 파헤친 날에도 남아있는 구근을 간직했어. 그리고 이듬해에는 반쯤 뜯어먹힌 구근에서 다시 싹을 틔우기도 했지. 그곳에서 우리는 강인했고 아름다웠어.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어도 불행하지 않았지.


그러나 어느 순간 우리는 정원을 떠나 낯선 숲속에서 헤매고 있어. 정원의 바깥에서 우리는 나약해져. 길을 잃고 초라해지고 질투에 휩싸이지. 두려움에 떨며 우리는 가진 것의 숫자가 작으면 행복해질 수 없다고 믿게 돼지.


숲속에는 아무것도 없어. 정원으로 돌아가. 네가 오래전 잠들던 그곳으로. 설령 정원이 예전의 아름다움을 찾아볼 수 없는 폐허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다시 정원으로 돌아가야 해. 정원에는 네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는 수많은 존재들이 있어. 그것들을 위해 씨를 뿌려야지. 녹슨 장비를 정비하고, 엉겅퀴를 걷어내고, 연못의 물을 새로 채우다보면 하루하루가 너무 짧게 느껴질거야. 운이 좋다면 어쩌면 오래전에 네가 심어두고 잊어버렸던 수국이 아직까지 살아남아 정원 한구석에서 빛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르지.


손에 굳은살이 배기고, 피부는 타서 쓰라리고, 허리와 다리 아프지 않은 곳이 없을 테지. 그러나 밤이면 오랫동안 이루지 못했던 깊은 잠에 빠질 거야. 꿈속에서도 너는 앞으로 피어날 꽃들에 관한 생각에 설렐 거야. 지금 네가 두려워하는 모든 것들은 정원 안에서 잠든 네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할 거야. 너는 정원사니까. 이곳에서 너는 점점 더 아름답고, 강인한 사람이 될 거야.


그리고 그런 순간에 네가 너의 정원에 나를 초대해 주기를 바래. 길리엄의 달걀과 천 겹의 수국을 큰 바구니에 담아 들고 굽이굽이 길을 지나 네게로 갈게.




오랜만에 너에게 편지를 쓴다. 이곳에서 글을 쓰며 나는 내가 다시 정원으로 돌아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생각해보면 오랫동안 나는 종이 위에 단어라는 씨앗을 뿌리고 있었던 것인지 몰라. 대부분의 경우 의미 없는 낙서에 지나지 않지만 때로는 때로는 나조차 감탄해서 바라보게 되는 그런 생각과 문장이 종이 위에 펼쳐지기도 하지. 그럴 때 나는 누구도 틔어보지 못한 천 겹의 수국을 피워낸 정원사처럼 가슴이 으쓱해져. 그리고 그 순간 나는 강인해지지.


네게 편지를 쓰며 즐거웠어. 네가 다시 정원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을 수 있기를,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강인해질 수 있기를 바랄게.




오랜만에 브런치에 글을 쓰니 참 좋네요. 앞으로는 "다 잘될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라는 주제로 글을 쓰고자 합니다. 이 부질없어 보이는 위로의 메시지에 최대한의 설득력과 호소력을 담아는게 제 목표예요. 앞으로 써나갈 편지글 들에 많이 응원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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