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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지윤 Dec 21. 2020

옷차림이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

도준우의 제복과 나의 작업복


작업복의 용도



올해 초 마음을 다져 보겠다고 작업복을 샀다.

번거롭고 번잡스러운걸 질색하는 나는 앞치마도 잘 두르지 않는데 그러면서도, 그걸 알면서도 구태여 작업복을 주문했다.

집에서 집으로 출근을 하는데 아무런 경계가 없으니 마음이 무한하게 나태해진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오늘 우연히 유튜브에서 도준우 피디가 Y시절 특정 제복을 입고 옷차림 (유니폼)이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 이를테면 옷 한 벌이 주는 신뢰도 같은 것을 실험하는 영상을 보게 되었다.


미래 스튜어디스를 꿈꾸는 각각 15명의 실험 참가자들에게 도피디가 투입되어 한 팀 에서는 파일럿의 제복을 입고 다른 한쪽에서는 일상복 (청바지에 남방 차림)을 입고 각각의 피실험자들 에게 특강을 목적으로 이른바 '뻘짓'을 하는 실험이었다.


의외로 국문과를 나와서 음악에도 심취했던 도피디를 나는 꽤나 좋아했는데 무엇보다 그에게 호감이 갔던 이유는 그가 꽤나 그 '뻘짓'이라는 것에 특화된 (외모) 유쾌한 사람 (시사 담당 피디가 맞나 싶은 유머)이라는 것이었다.


어쨌거나 실험의 결과는 예상했던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아 '더' 놀라웠다.


그의 개구진 얼굴이 각 잡힌 파일럿 제복 위에 올려지니 짐짓 잘생기고 위엄 있어 보이기까지 해 또 한 번 놀라웠는데 이 놀라운 후광효과의 결과는 이랬다.


실험의 진행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제복을 입고 특강을 가장한 뻘짓을 시전 하는 도피디의 강의를 듣고 있던 참가자들은 사뭇 진지한 얼굴로 그의 황당한 말과 행동을 무한 신뢰하는 모습을 보였다.


반면 그냥 도준우 차림으로 똑같은 실험에 참여했던 피 실험자들의 반응은 특강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 에서부터 벌써 '뭐지 저 병맛 나는 또라이의 뻘짓은?' 하는 의문이 표정으로 만연하게 들어 났다.


더욱이 놀라웠던 것은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고 그 실험이 무엇인지 이미 모두 알고 그 영상을 보는 나 마저도 그의 옷차림에 따라 그가 잘생기고 근엄해 보였다가 방정스럽고 주책맞아 보였다가 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앞치마 두르는 것도 귀찮아서 맨몸으로 위태위태 엉덩이를 빼고 물감을 섞던 내가 화장실 갈때마다 귀찮음이 배가 되는 점프슈트 작업복을 산 계기였다.


잠옷을 입고 당장이라도 침대에 누우면 낮잠을 잘 수 있고 언제든 누가 부르면 뛰쳐나갈 수 있는 환경에서 스스로 분리되고 격리되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그 마음가짐이라는 것이 잠옷을 입고 붓질을 하면 취미가 되고 작업복을 입고 끄적이면 작품이 될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 작업복의 쓰임은 바로 사기꾼이 타인에게 신뢰를 줄 때 사용했던 도피디의 제복처럼 나 스스로에게 사기를 쳐서라도 어떤 믿음과 확신을 주기 위한 도구인 것이다. (물론 작업복의 쓰임이란 온갖 화학 재료로부터 내 소중한 잠옷과 살갗을 보호하는 것에도 있다)


최근 시사프로그램에서 나는 몇몇 사기꾼 혹은 리플리 증후군에 감염된 한심한 인간들에게 안쓰럽게 당한 여성들의 사연을 접했는데 그들의 특이점은 하나 같이 와잇코트나 파일럿의 제복 등을 소지하고 있었고 어디서 무궁화 모양 배지를 위조하거나 득템 할 수 없었던 변호사나 검사 (사칭자)들은 최소한 고가의 양복을 구매하는 열의라도 보였다는 것이었다.


뭐 실상은 블링블링한 은팔찌와 구치소 방구석, 그리고 그곳에서 맛보는 뜨거운 곰탕이 어울리는 남자였으나 그녀들은 하나 같이 그들의 외피, 즉 와잇코트나 제복, 내지는 고급 양복 따위의 차림새를 꿔뚫어볼 투시능력이 없어 그들이 걸친 옷에 진실을 의심해 볼 기회조차 블락 당한체 속수무책 당할 수 밖에 없었다. 옷차림, 겉모습이야말로 그녀들로 하여금 일말의 의심도 가질 수 없게 만드는 믿음의 수단이 되었던 것이다.


다시말해 우리가 피지컬리 가지고 있는 양쪽의 눈, 시력으로는 누군가가 입고 있는 겉모습을 뚫고 들어갈 재간이 없다는게 함정이라 한다면 함정인데 사실상 나는 그것을 나 스스로에게 이용해 보려고 했다.


그리하여 아침부터 비적비적 쑤시고 꿰차 입은 작업복이 내 눈에 그리고 나 스스로의 마음가짐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고 싶었고 그것 으로라도 나를 채근할 수 있도록 나는 애써 상체와 하체가 분리되지 않는 그 번잡스러운 외피를 이용하기로 했다.




경찰청표 은팔찌와 좁아터진 구치소 레지던스 그 안에서 공짜로 얻어먹는 국밥이 어울리는 남자지만 그가 와잇코트를 소지하거나 나라가 인정하는 제복 혹은 한눈에 봐도 복제품 티가 나는 무궁화 배지를 소지하고 있을시 그의 손목에 차고 있던 A급도 안 되는 바쉐론 콘스탄틴과 그가 분양받은 적도 없는 허구의 강남 수십 평대 아파트 그리고 그가 지불한 돈으로 나누어 먹었던 고급 레스토랑의 애기 손바닥 만한 요리들은 실제로 진실 혹은 진심이 되어 존재했다.


이제 다시 시작해보겠다고 시작한 작업에 구체성이 없던 내 삶에 실제로 나를, 나부터라도 완벽하게 속이고 믿기 위해 선택한 도구가 이 생활하기도 거추장스러운 작업복인 셈이다.


내가 이 작업복을 입고 있는 순간은 내 손목에 채워질 부와 꿈에 그리던 레지던스 그리고 우아하게 먹고사는 풍요가 당장은 아니더라도 실제로 언젠가는 다가올 내 삶이라는 확신을 할 수가 있었다.




대한민국 에버리지 정도의 도준우 피디의 얼굴과 몸매가 제복 안에 들어가 있을 때 타인의 눈과 마음에 그는 평균 이상 잘생기고 능력 있는 진짜 파일럿이 되어 있었고 청바지에 대충 걸친 셔츠 안에서는 그를 아무리 파일럿이라고 소개한들 평균 이하의 외모의 주책맞고 (도리어)의심스럽기까지 한 남자가 되어 있었다.


나는 나 스스로가 되고 싶은 무엇이 되기 위해서라도 오늘 아침 기어이 일어나 실상 활동이 그닥 편치 않은 작업복이라는 외피를 입어본다.




방정맞은 남자가 파일럿이 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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