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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돼지터리언국 총리 Aug 09. 2020

<나는 기러기다> 2화 줄어든 니트

<나는 기러기다> 2화. 줄어든 니트

    기러기 생활 2일차.
    이제 시작이라 이따금 집에 적막이 흐를 때면 이질감을 느낄 뿐이지 외로움이나 고독 같은 심리적 변화는 거의 없다.
    그보다는 청소와 빨래 같은 집안일과 끼니를 챙기는 표면적인 변화가 생활의 궤적을 흔들어 놓는다.
    음식은 내 한 몸 챙길 정도는 충분히 하는 편이기 때문에 큰 걱정이 없다. 가장 좌충우돌하는 것은 역시 집안일이다.
    
    우리 집은 내가 홀벌이를 하고, 록수가 애들 육아와 집안일을 담당했다. 요리와 설거지를 한다거나 애들 목욕을 시키는 일을 하긴 했지만, 사실상 가사 일 대부분은 록수가 맡았다.
    내 일 자체가 저녁 자리도 많고, 바깥 활동도 많은 터라 더 그랬다.
    기러기 생활을 결정하고 나서 가사 일에 대해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록수와 애들이 가끔 한국에 한두 달씩 가 있던 때도 있었고, 해외에 길게 가 있던 적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나름 잘 헤쳐 나갔다.
    
    또 어려서부터 오랫동안 혼자 살았기 때문에 기본적인 가사는 꽤 숙달돼 있다.
    애들을 공항에 데려다주고 오는 길에 내 독거 생활의 역사를 한번 더듬어 봤다.
    고1 17살부터 학교 기숙사에서 살았고, 재수 때는 고시원 생활을 했다.
    대학에 가서는 자취와 기숙사 생활을 번갈아 가며 했었고, 첫 직장을 얻었을 때는 주말 부부를 해서 그때도 주로 혼자 지냈다.
    지금 회사로 이직하고 나서 고향인 전주로 내려가 가족과 지냈으니까 10여 년은 족히 혼자 살았다.
    그래서였을까 차 안에서 회고를 마치고 집안일에 대한 화려한 자신감이 내 몸을 감싸 안았다.
    
    내 오만한 생각과 달리 집안일의 세계는 상전벽해(桑田碧海)였다.
    가장 큰 문제는 가전제품이었다.
    일단 내가 아는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가전제품은 냉장고와 세탁기가 전부였다.
    집안일에 손을 놓은 지 10년 만에 가정집은 최첨단 사이버 매트릭스 우주공학 초끈 이론으로 무장한 가전제품에 점령당했다.
    막연히 규방사우(閨房四友) 정도나 생각하던 나는 매우 당황했다.
    이미 숙달된 록수는 사용 설명서를 죄다 버린 후였고, 중국 제품도 섞여 있어서 유튜브에서 찾아보기도 어려웠다.

    그중 제일 힘들었던 것은 건조기라는 불리는 물건이었다.
    우리 집에서 사용하는 건조기는 파나소닉 NH45-19T라는 모델이다. 드럼 세탁기처럼 생겨서 온도 강약 버튼과 타이머만 달랑 앞쪽에 달려 있다. 이렇게 단순하게 생긴 주제에 뭐 이것저것 챙겨야 할 게 많았다.
    겁 없이 시험 삼아 빨래를 한번 말려 보려다 먼지 거름망을 청소하지 않고 수 차례 돌리는 바람에 전기세만 옴팡지게 들었다. 알고 보니 먼지 거름망이 꽉 차 있으면 건조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두 번째 나를 골치 아프게 한 것은 로봇 청소기다.
    혼자 있다 보면 집을 자주 비워 바닥에 먼지가 쌓이게 되는데 이게 효과가 좋다고 들었다.
    문제는 로봇 청소기를 돌리려면 바닥에 있는 장애물을 깨끗이 치워야 한다. 콘센트 전선이라든지 애들 장난감 팽이, 가방끈, 식탁 의자 등은 특히 주의를 해야 한다. 문턱에 라도 잘못 걸리면 또 에러가 나서 그 자리에 멈춰 선다.
    말이 로봇 '청소기'지 상전이나 다름없는 이놈과 씨름을 하다 보면 '이럴 거면 그냥 청소기를 돌리고 말지'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신문물이 다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주방 가전 중에 마음에 쏙 드는 물건이 하나 있다. 계란 찜기라는 녀석인데 요놈은 아주 신통방통하다. 원하는 계란 익힘 정도에 따라 계량컵에 물을 재서 스테인리스로 된 가열 판에 물을 채우고, 위에 망을 걸친 뒤 원하는 만큼 3개고 4개고 계란을 올려 뚜껑을 덮고 전원을 켜면 딱 맞게 삶아준다. 전원도 물이 증발하면 자동으로 차단돼 알람을 맞출 필요도 없다. 깜빡 잊고 불을 끄는 시간을 지나쳐 원치 않는 완숙 계란을 먹는 일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글을 쓰다 문득 먼지 거름망을 청소하고 돌렸던 빨래가 생각나 건조기로 달려가 봤다.
    아. 완전 낭패다.
    너무 건조기 조작에 신경을 쓴 나머지 빨래 종류를 살피지 못했다. 내가 제일 아끼는 검은색 니트가 아동복만 하게 줄어 숨진 채 발견됐다.
    역시 구관이 명관이라고 그냥 하던 대로 빨래 건조대에 널어 말려야겠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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