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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간 수집가 Feb 28. 2024

단식이 주는 마음의 자유

<병은 만 가지라도 단식하면 낫는다>, 이우영

자기를 실현하면 남을 위해 자기를 헌신하는 헛수고를 감당하지 않는다. 자기를 모르기 때문에 남의 밭을 갈기 위해 자기 어깨에 누군가가 멍에를 얹은 것을 모르는 것이다. 직장을 다니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다. 멍에는 공간적, 시간적인 구속을 말하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이 남으로 인해 바뀌는 현상을 말한다. 내 마음이 내 의지나 생각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남의 자극에 의한 반응으로 달라지는 걸 구속이라 말하는 것이다. - <병은 만 가지라도 단식하면 낫는다>, 이우영


<병은 만 가지라도 단식하면 낫는다> 이 책은 단식원에 입소하기 위해 서울에서 남해로 가는 버스 안에서 읽었던 책이다. 머리말에 나오는 이 내용을 보고 '자기를 실현한다는 것'이 도대체 단식과 무슨 관련이 있는 걸까 라는 궁금증으로 책을 읽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더 재미있어서 버스안에서 단숨에 읽어버렸다. 


단식원에 입소해보니 다양한 사람들이 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섭식이나 음식, 생활습관, 식습관 등으로 인한 질병도 크지만 대부분이 직장이나 일터, 인간관계 등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중요한 방아쇠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즉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어깨에 타인과 사회가 얹은 멍에를 얹고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는것이다. 자기를 실현하면 그것들에게서 자유로워지고, 단식을 실천하면 그 과정이 좀 더 수월하게 이루어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나를 실현하는 것과 단식이 무슨 관련이 있는지 따라가 보자.


자기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알아야 한다. 자기를 아는 사람은 남의 밭을 갈기 위해 자기 어깨에 누군가의 멍에를 얹지 않는다. 내가 직장에 다녀서 공간적, 시간적으로 구속되어 있다 하더라도 내 마음이 남으로 인해 바뀌는 현상이 일어나지 않으면 나는 '나를 알고, 나를 실현한 상태'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나의 마음은 나의 것이고, 내가 주인이며 내 의지나 생각으로 통제하고 지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의 행동이나 말이 주는 자극에 의한 반응으로 내 마음이 시시각각 달라지고, 거기에 휘둘린다면 나는 결국 타인과 환경에 구속된 상태라 할 수 있다. 


이런 이치를 모르면 모든 부정적 감정의 원인을 남에게서 찾게 된다. 하지만 타인은 나의 감정에 직접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가 나를 아무리 자극해도 나에게 ‘결박당한 반쪽’이 없다면 부정적 감정이 생길 리 만무하다. 타인이 나에게 부정적 감정을 줄 수 있는 이유는 내게 멍에라는 나의 반쪽이 있기 때문이다.

- <병은 만 가지라도 단식하면 낫는다>, 이우영


직장에서 아무리 진상 민폐 동료나 손님을 만나거나 화나는 상황을 만나도 나의 감정이 그로 인해 흔들리지 않는다면 나의 마음은 내가 주인이다. 부정적 감정의 원인을 남에게 돌리지 않는다. 그가 나를 아무리 자극해도 내가 나를 완전히 실현하여 '결박당한 반쪽' 없이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라면 그것에 휘둘리지 않는다. 그에게는 멍에라는 반쪽이 없고, 완전한 자유와 일치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분석심리학자인 칼 융에 의하면, 자기를 실현한 사람은 ‘결박당한 반쪽’이 없어지므로 남이 어떻게 하더라도 자기 안에서 그런 감정이 일어나지 않는다.  
누군가와 교제를 하던 중에 분노와 짜증, 수치심 같은 반응이 일어나면 먼저 이런 반응을 일으킨 자기감정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 그런 다음 그 감정을 솔직히 자신에게 고백하고 응시하면서 하나씩 해소해 나가는 게 중요하다. 물론 ‘결박당한 반쪽’의 감정을 마주하다 보면 정작 자신이 바라던 자기의 이상적인 상象까지 사라지는데, 이는 무의식과 의식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과정이니 안심해도 된다.
무의식과 의식이 합쳐지면 자기라고 내세울 것도 없고 부끄러워할 것도 없는 상태가 되면서 죽은 듯한 평화가 찾아온다. 아무런 의욕도 없고 어떤 감정도 일어나지 않아서 스스로 살아있는지조차 느낄 수 없다. 이를 불교에서는 ‘사중死中’이라 하고, 기독교에서는 ‘회개’라고 한다. 내 몸은 자연의 섭리에 묶여 태어나서 늙고 병들다 죽는 것을 피할 수 없지만, 마음은 성장하면서 나의 반쪽을 풀어 자기를 실현하므로 어떤 섭리에도 얽매이지 않아 자유롭기에 가능하다.


누군가와 사귀거나 교류할 때 분노나 짜증, 화를 느낀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 원인은 상대에게 있지 않다. 그런 반응을 일으킨 나의 감정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찾아야 한다. 부정적인 감정을 회피하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화살표를 상대가 아닌 나에게로 돌려 나 자신을 심층적으로 바라봐야 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의 '결박당한 반쪽'을 발견하고 무의식과 의식이 합쳐지며 고요한 평화가 찾아온다. 아무런 의욕도, 감정도 일어나지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상태. 이 상태는 마치 단식을 하고 있을 때 느끼는 감정과 유사하다. 육체는 자연의 섭리에 따르므로 태어나서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마음은 그렇지 않다. 철저히 나를 보고, 나의 결박당한 반쪽을 찾아, 그것을 풀어 자유롭게 해주면, 즉 자기를 실현하면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자유롭게 세상을 날아다닐 수 있다. 



이 과정에 너무 매몰되면 의욕마저 상실하고 득도한 듯한 착각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금식은 이 과정을 벗어나서 득활得活을 하기 위해 행하는 단식이며, 이를 성령에 의한 죄 사함이나 성령 세례라고 부른다. 사람이 어찌할 수 없는 육체적·본능적 생존 욕구가 감소하면서 자극-반응 이론이 성립하지 않고 식욕, 성욕, 방어본능 등 생존에 필요한 반응도 현저히 줄어든다. 이러한 개인적 성취가 사회적으로 파급되었을 때, 이것이 압제당한 자를 자유하게 한다. 


우리는 육체적, 본능적 생존 욕구를 타고 태어난다. 생명이라면, 살아있는 것이라면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금식, 단식을 하면 그 욕구가 감소하면서 자극에 반응하는 1차원적 단계에서 벗어나게 된다. 식욕, 성욕, 방어본능 등 생존에 필요한 자동적인 반응이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 식욕을 내려놓고 자연의 섭리에 반하는 행동인 금식을 지속할 때 내면의 결박당한 반쪽도 마음의 자동조종장치에서 풀려나게 된다. 사회화 과정에서 학습된 마음의 자동조종장치가 정지되고, 또렷하게 나의 결박된 마음, 각인된 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리고 음식이 사라진 텅빈 신체에는 의욕, 감정, 생존욕구, 본능적 욕구, 식욕, 성욕, 방어본능 등 모든 것이 비워지고, 마지막으로 알맹이만 남은 진짜 자신을 만나게 된다. 그 어떤 결박에도 얽매이지 않고 무한한 자유를 타고나서 제한없이 누렸던 진짜 자신을. 단식은 그 진짜 나를 만나는 소중하고 성스러운 의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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