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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은진 Dec 25. 2019

아빠의 일기장

  

창고 방에 꽂혀있는 책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낡은 양장 다이어리를 발견했다. 첫 장을 펼치니 제일 먼저 보이는 건 1976이라는 글자.      


‘설마... 이건?’ 빠르게 뒷장을 넘기니 익숙한 필체로 짧은 일기가 적혀있었다. 

아빠의 일기장이었다.      


아빠는 오빠와 내가 어릴 때부터 매번 이야기해왔다. 고등학교 때부터 문예반으로 활동했으며 글을 쓰는 게 취미였다고. 그리고 오빠와 나의 이름은 아빠가 쓴 소설에 나오는 남녀 주인공 이름이라고 말이다. 물론 그 소설은 가족 중 아무도 본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아빠의 그 말은 허풍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빠의 일기장이, 그것도 고등학교 때부터 결혼 전까지의 이야기가 담긴 일기장이 우연히 발견된 것이다! 창고 방에서 살금살금 몰래 일기장을 감춰와 방에서 몰래 읽어 내려갔는데, 정말 깜짝 놀랐다. 사실 별거 아닌 이야기일 수 있지만, 글에 적혀있는 아빠의 어릴 적 마음이 내가 느꼈지만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이었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나니 비가 부슬부슬 온다. 기분이 좋지 못하다. 아직까지는 학교생활에 익숙하질 못하다고 느낀다. 1972, 3.16      


오늘은 아침부터 마음이 뜨는 것 같다. 괜스레 기분이 좋다. 누구와 말을 하고 싶은 심정이다. 항상 이 상태를 유지했으면 한다. 나는 내성적이므로 말을 잘 안한다. 그리 명랑하지 못하다. 누구 말대로 수양이 덜 된 모양이다. 1972.3.25     


글을 하나하나 읽어가면서 이유는 모르겠지만 막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중간에 계속 멈췄다. 그리고 눈물이 나서 당황했다. 읽을수록 눈물이 나서 제대로 끝까지 읽지 못했다. 내가 모르는 아빠의 인생을 마주한다는 상황에 울컥했던 것 같다.      


어릴 적 기억부터 되짚어 생각해보니 나와 아빠는 정말 꾸준한 앙숙이지만, 정말 필요한 순간에 내가 듣고 싶었던 칭찬과 위로를 해주었던 기억이 있다. 아마 그래서 아빠와 사이가 멀어질 뻔한 위기에도 그 끈이 서로를 이어주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마 아빠는 나의 성격이 자신과 비슷하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해 줄 수 있었겠구나 싶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 중 하나인 <힘 빼기의 기술>에서도 조금은 비슷한 상황이 나온다. 자식을 낳은 후 5년 동안 쓴 육아일기를 이제 막 수능을 마친 작가에게 건넸던 엄마의 이야기.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감동도 받았지만, 속으로는 무척 부러웠다. 이 육아일기를 읽으며 삶의 위기마다 다시 힘을 낼 수 있게 하는 것, 오랫동안 자신을 보듬어주는 사람이 있었음을 생각할 수 있게 하는 매개체가 있다는 것이.      


그래서 뒤늦게 나에게 도착한 아빠의 일기장이 꽤나 반가웠다. 정말 뜻밖의 선물 같은 느낌이랄까. 아빠의 인생을 몰래 훔쳐보며 인생의 고비마다 힘을 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꽤 두꺼워서 다 읽는데 까지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조금씩 아껴 읽고 싶다. 아마 내가 가장 즐겨 읽을 책이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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