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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는 사람 Feb 20. 2021

어제에서 내일로 건너가는 방법- 사랑의 블랙홀

삼라만상은 시간과 얽혀서 존재한다. 사람들의 머리 안에는 시간의 파편이 떠돈다. 미래에 대한 계획, 추억, 살아온 날과 살아갈 나날의 저울질, 어떻게하면 겪어왔던 일들을 잘 갈무리할수 있을까, 어떤 선택이 보다 충만하고 의미있는 미래를 가져다줄까., 일과 휴식의 비율은 어느 정도가 적당할까, 사람들과 어울리는데 시간을 얼마나 할애해야 할까, 자투리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지? 인생을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시간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야 한다. 


 누구보다 절실하게 시간의 의미를 물어야 하는 한 사내가 있다. 오만하고 냉소적인 기상캐스터 필 코너(빌 머레이 분)는 성촉절 축제를 보도하기 위해 방송국 동료 리타, 래리와 함께 펑춰토니로 간다. 숙소에서 하룻밤을 보낸 필은 사람들을 깔보는 듯한 거만한 태도로 일관하며 성의없이 촬영을 마친다. 원래 일정은 당일에 방송국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었지만 갑작스런 폭설로 도로가 막혀 묵었던 숙소에 하루 머물게 된다. 다음날 아침부터 필의 비극이 시작된다. 침대에서 눈을 뜬 그에게 ‘내일’이 아니라 ‘어제’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여섯시의 라디오 알람에선 어제와 똑같은 방송멘트가 녹음기처럼 흘러나오고 사람들은 어제처럼 축제장소로 몰려간다. 어제 다가왔던 보험외판원이 또 접근하고, 폭설이 내려 어제처럼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그다음날도, 일주일 후에도, 똑같은 성촉절의 하루가 거짓말처럼 반복된다. 그는 하루라는 시간의 굴레에 갇힌 것이다.



영화의 기본 얼개는 같은 상황을 클래식 음악처럼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하는 것이다. 필은 하루라는 시간과 펑춰토니라는 공간에서 겪을 수 있는 모든 상황을 경험한다. 그는 어제 했던 실수를 도돌이표처럼 되풀이한다. 어제 빠졌던 물웅덩이에 신발을 적시고 찬물세례에 기겁했던 걸 잊은채 또 샤워기를 튼다. 그의 어리석음에 웃음짓다 내 마음 한구석에 묵직한 돌덩이를 느낀다. 나또한 살면서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했던 적이 수십번 있었으니까. 웃음 뒤의 통찰, 이게 이 영화의 강점이다. 재치있는 코미디 각본 배후엔 시간에 대한 깊이있는 인식이 깔려 있다.



머리가 이상해진거라 생각해 신경정신과을 방문했지만 뇌와 정신에는 문제가 없었다. 체념하고 벗어나길 포기한 필이 처음으로 취한 행동방식은 쾌락에 몰두하는 것이었다. 크림케이크와 설탕쿠키를 식탁에 쌓아놓고 게걸스럽게 먹어대거나 골초처럼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신다. 오직 잠자리를 즐기기 위한 목적 하나로 이성을 유혹한다. 그의 시간에는 인과응보가 없으므로 술에 취한 채 경찰차와 추격전을 벌이며 철로를 질주하는 일도 서슴없이 한다. 그가 순간의 향락에 빠져든 이유는 반복되는 삶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권태가 극에 달했을 때, 차를 달려 절벽으로 질주하거나 고층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린 이유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반복되는 삶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고 있다.


그가 동네 술집에서 술꾼들과 나눈 잡담 한토막은 이 영화의 핵심을 넌지시 알려 준다.

필 코너: 만약에 말입니다. 한 장소에 갇힌 채로 매일이 똑같아서 어떤 일도 소용 없어진다면 어쩌겠어요?
술꾼: 내가 지금 그래요.





오늘은 분명 몇 달 전과 다른 날이다. 수개월의 시간이 흘렀으니까. 하지만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에게 오늘은 몇 달 전과 별반 다르지 않다. 매번 약속시간에 늦고, 잠자리에 누워 새벽까지 스마트폰을 만지고, 소중한 이를 함부러 대한다. 내일도, 몇 달 뒤도 오늘과 비슷할 것이다. 삶에 만족한다면 별다른 문제가 없다. 문제는 권태롭고 괴로운 삶에 진저리치면서도 그 상황에 머물러 있는 경우이다. 같은 하루가 끝없이 반복되는, 필의 상황은 특수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보편적이다. 불만족스런 일상을 챗바퀴 돌리듯 살아가는 수많은 이들은 어쩌면 필처럼 동일한 하루를 끝없이 되풀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감독은 시간의 틈바구니에 갇힌 주인공을 통해 무기력한 일상의 블랙홀에 빠진 사람들에게 말을 건다.


필은 짜릿함을 추구하며 범죄를 저지르고 쾌락에 탐닉했다. 하지만 색다른 경험들도 결국은 반복되는 일상의 테두리 안으로 들어왔다. 무턱대고 새로운 자극을 추구하는 건 해답이 될 수 없었다. 의미가 담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숱한 자살시도가 실패한 후에야 그는 죽음으로도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반복되는 하루를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을 깨달은 것이다. 주어진 건 매일이 같은 무수한 하루뿐이다. 그렇다면 매일의 하루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의미를 찾아내야 한다. 하루단위로 발버둥쳐보는게 전부지만 그것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다. 하루단위의 작은 의미와 성취를 쌓아보려는 노력, 그걸 시작한 순간부터 필의 하루는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그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삶을 살아보기로 했다. 시간을 탕진하는대신 누적시켜보기로 한 것이다. 똑같은 하루를 되풀이하는 필이지만 그의 내부엔 어제까지의 과거가 쌓여 있다. 노력으로 특정한 능력을 몸에 익히는 게 시간을 축적하는 하나의 방법이란 걸 알게된 필은 더 이상 한순간의 쾌락에 생을 쓰지 않는다. 그는 매일 꾸준하게 피아노를 연습한다. 다양한 종류의 양서를 읽고 얼음조각을 배운다. 지속적인 시간투자로 능력이 향상되는 경험은 반복되는 삶에서 의미를 느낄수 있게 했다.


 펑춰토니에서 수많은 나날을 보냈기에 특정 시간에 어딘가에서 누구에게 어떤일이 생기는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필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선행을 베푼다. 나무에서 떨어지는 아이를 구하고 할머니들이 탑승한 차의 구멍난 타이어를 갈아준다. 목에 음식물이 걸려 호흡곤란에 빠진 신사를 도와주고 한파의 거리를 배회하다 쓰러진 부랑자에게 응급호흡을 시도한다. 영화는 몇번밖에 보여주지 않았지만 그는 수십수백번, 떨어지는 아이를 받고 부랑자를 살리려 했을 것이다. 그는 이타적인 행위는 똑같이 반복되더라도 의미있단 걸 깨달은 게 아닐까. 어려운 누군가를 돕는다는 건 타인의 아픔을 생각하는 일이다. 반복적으로 타인의 아픔을 헤아리고 보듬으려는 시도를 하면서, 황량한 내면이 조금씩 따스한 공간으로 변하는 걸 그는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똑같은 선행을 멈출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너무나도 철저하게 현재의 생활을 신봉하고 살면서 변화의 가능성을 부인하고

있다. "이 길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어." 하고 우리는 말한다. 그러나 원의 중심에서

몇 개라도 반경을 그을수 있듯이 길은 얼마든지 있다.

소로우의 <월든>중에서

누구나 어느정도는 되풀이되는 일상을 살아가야 한다. 때로 일상은 오랫동안 신어왔던 양말처럼 누추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이 영화가 알려주는 건 반복되는 일상은 삶의 기본 전제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건 보잘 것 없는 일상이다. 하지만 별볼일 없는 일상은 동시에 우리가 가진 시간자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필의 다채로운 하루가 보여주는 건 '이렇게 살 수밖에 없어'라는 무기력과 맞설 수 있다면 일상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고 키워갈 수 있다는 것이다. 높은 경지에 오른 수도승들에겐 하루가 일생같고 일생이 하루같다고 한다. 변화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사소한 하루와 평범한 일상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매일의 작은 노력, 고질적인 악습 등 꾸준하고 지속적으로 행해지는 사소한 일들의 커다란 위력을 기억해야 한다. 물방울이 떨어져 대야를 가득 메우듯 평범하고 작은 일상이 모여 종내에는 엄청난 무게감을 가지는 생이 되기 때문이다.





종반의 필 코너는 처음의 그와 다른 사람같다. 능란하게 피아노를 연주하고, 전문가 수준으로 얼음조각을 한다. 뉴스보도를 할 때는 그간 쌓아온 교양이 빛을 발한다. 눈에 띠게 달라진 건 타인을 대하는 태도다. 그는 더 이상 타인을 폄하하고 깔보지 않는다. 동료의 짐을 함께 들어주고 만나는 이들에 소탈한 미소를 건낸다. 갖은 수법을 써도 유혹할 수 없었던 리타가 필을 진심으로 좋아하게 된 건 필의 인격이 내부에서 근본적으로 변화했기 때문이다. 필이 수많은 하루를 쌓아 견실한 역량과 훌륭한 성품을 갖춘 사람이 됐을 때 그에겐 비로소 ‘내일’이 찾아왔다. 고대했던 내일을 맞이한 필은 경력과 출세를 위해 도시로 돌아가지 않고 펑춰토니에서 리타와 함께 살아가기로 한다. 그는 진정한 삶은 특정한 때와 특별한 장소에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서있는 자리에서, 스스로 만들어가야함을 알게된 게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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