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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는 사람 Feb 20. 2021

안다고 생각했는데 잘 모르겠어-영화 <케빈에 대하여>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모호함과 부조리와 이해하기 힘든 상황을 만난다. 보통의 경우 사람들이 일일이 그런 모순된 상황을 이해해내려 애쓰지 않는 이유는 그 일이 무척 귀찮은 일일 뿐더러 그렇게 하지 않아도 살아가는데 큰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특정한 상황에 빠져서 고통 받거나 그 상황을 이해하지 않고는 진창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고 여길 때만 무언가를 진정으로 이해하려 노력한다. 이것은 게으름의 문제가 아닌 인간의 본성이다.


에바가 갑작스럽게 받은 질문은 이것이다. "왜 16살 내 아들이 아버지와 여동생과 수백 명의 학교 친구들을 화살로 쏴 죽였을까?"

이 소설은 이 알 수 없고 고통스런 질문을 풀어내려는 에바의 몸부림을 보여준다. 그녀는 케빈을 임신한 후부터의 인생을 통째로 복습하고 되새김해야만 했다. 이 질문에 응답하지 않으면 삶의 어떤 국면으로도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그녀는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녀에게 케빈의 임신은 갑자기 당한 교통사고 같은 것이었다. 세계 곳곳을 여행하는 모험가였던 그녀는 임신으로 인해 이전의 삶을 빼앗겼다. 부풀어 오른 배를 가진 자신의 모습을 끔찍해하는 그녀에게 뱃속의 아기는 달가운 존재일 수 없다. 케빈은 젖먹이 때 깨어있는 내내 큰 소리로 울어서 에바를 괴롭게 한다. 에바는 아기의 끈질긴 울음이 지겹고 괴로운 나머지 소음으로 가득한 공사현장에 한참을 서 있었던 적이 있다. 인간은 애정을 주고받는 감각에 매우 민감하며 어린 아기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낀 케빈은 계속되는 울음으로 관심을 요구했지만 에바는 케빈이 보낸 신호에 피로 섞인 짜증과 무관심으로 일관한다.


케빈은 보통의 반항아보다 훨씬 엄마에게 적대적인 아이로 성장했다. 영민한 케빈은 아버지와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엄마의 신경을 긁는다. 아버지에게 보인 친밀감의 표시는 진정한 유대감이라기 보단 엄마의 질투를 유발하기 위한 책략에 가깝다. 케빈은 에바가 자신에게 어떤 말과 행동을 요구하는지 정확하게 파악해서 엄마의 요구방향으로 움직이길 지독하게 거부한다. 에바는 특정 행동을 요구한 후 케빈이 자신을 만족시킬 때만 웃는 낯을 보여준다. 사실 케빈이 바랬던 건 행동여부와 관계없이 엄마가 자신의 존재를 인정해주는 것이었다.


 엄마가 동생 실리아를 가진 후 사랑을 얻으려는 케빈의 갈망은 더욱 심하게 좌절된다. 실리아는 자신과 다르게 엄마의 사랑을 자연스럽게 받고 있단 사실을 케빈은 알고 있다. 마음 속 깊이 동생을 질투했던 케빈이 잔인한 말과 심한 장난으로 동생을 괴롭힐 때 에바는 실리아를 보호하려 케빈에게 명백하게 적대감을 드러낸다. 케빈은 고의적으로 동생의 눈을 멀게하는 사고를 만들어내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듯 위악을 가장하여 엄마에게 반항한다.


청소년이 되었을 때 케빈이 에바에게 넌지시 했던 말은 케빈의 속마음을 정확하게 드러내고 있다.

"사람들은 티비에서 뭘 보는 걸까? 나같은 사람을 봐. 범생이처럼 나왔으면 사람들이 채널을 돌렸을 것 같지 않아?"

범생이가 되기보단 차라리 엄마를 지독하게 괴롭히는 방식으로 관심을 끌려 했던 그가 진정 두려워했던 일은 일그러진 형태의 관심마저도 받을 수 없게 되는 상황이었다.


수렁으로 빠져드는 에바와 케빈의 관계를 지켜보던 아빠 프랭클린은 아내와 이혼해 양육권을 나눠 갖기로 결정하는데 이 소식을 엿들은 케빈은 충격에 빠진다. 케빈이 가장 두려워했던 상황은 엄마와의 연결고리가 완전히 끊어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케빈은 할 수 있는 한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엄마에게 복수하기로 마음먹는다. 회사에서 갑작스런 연락을 받고 케빈의 학교로 갔을 때 에바는 케빈의 화살에 맞아 피범벅이 되어 고통스러워하는 수많은 학생들을 본다. 미칠듯이 혼란스런 마음으로 집에 도착했을 때 화살에 꿰뚫린 채 흥건한 피 위에 엎드려 있는 남편과 딸을 발견한다.


사건 이후에 에바가 보여주는 태도는 보통의 가해자 부모와는 다르다. 그녀는 자신에게 소송을 건 피해자 학부모들에게 항소하지 않고 그들의 요구를 그대로 따르면서 집과 직장과 재산을 모두 잃는다. 그녀는 아들이 수백명을 대량학살한 지역사회에서 도망가지 않는다. 집과 차에 빨간색 페인트로 테러를 당하고 마주친 피해자 부모에게 폭행당하고 새로 얻은 직장에서 심한 모욕을 받으면서도 그것이 아들의 죄에 대해 자신이 응당 치러야 할 대가인 양 죄의식을 곱씹으며 살아간다. 빨간색 페인트를 벗겨내고 또 벗겨내는 에바의 모습은 자신의 과거에 대한 속죄를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빨강으로 대표되는 자신을 힘겹게 벗겨내는 것 같기도 하다.


 타인을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먼저 자신을 무너뜨려야 한다. 이제껏 내가 상대를 잘못 인식했다는 것과 관계에 대한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완고한 자신의 생각을 허물고 끈질긴 아집을 꺾고 타인의 입장을 생각해야만 한다. 본질적으로 자기중심적인 인간에게 이 일은 굉장한 고통을 수반하기에 일상적인 나날에서 이러한 의지를 내기는 쉽지 않다. 우리가 타인을 이해하려 노력하게 되는 순간은 타인이라는 질문이 우리가 삶이라 믿어왔던 것을 타격하고 균열을 낼 때이다. 눈앞의 상대를 이해해내지 못하고는 온전한 형태의 삶을 살아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다.


에바에겐 언제나 자신만이 중요했고 그녀의 마음속엔 자신의 열정과 욕구만이 가득했다. 그녀는 자신만의 시각으로 케빈을 재단했고 자신의 틀에 케빈을 억지로 맞춰 넣고 싶어했다. 그녀의 마음속에 케빈을 이해하기 위한 공간은 없었다. 삶이라고 부를만한 것들이 자신에게서 모조리 뜯겨나간 이후에야 에바는 케빈이란 질문을 이해해내야만 함을 느꼈다. 케빈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생의 다음 걸음을 내딛을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고 스스로를 온전히 이해해내지 못하면 케빈을 이해하는 일은 영원히 숙제로 남으리란 것 또한 알게 되었다. 아마 에바는 ‘케빈 이해하기’에 실패한다면 보다 쉬운 해결책인 자살조차 그녀에게 무의미함을 알았을 것이다.


케빈이 수감되고 시간이 꽤 지났을 때 감호소를 방문한 에바는 케빈에게 묻는다.

"2년째야. 생각할 시간 많았을 테니... 이제는 말해줘. 왜 그랬니?

케빈은 대답한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어."


케빈은 엄마에 대한 자신의 증오가 사랑의 뒷면임을 몰랐을 것이다. 엄마에 대한 극심한 증오 뒷면에 그보다 훨씬 큰 크기의 사랑받길 바라는 욕구가 있었단 걸 몰랐을 것이다. 케빈이 성장하는 내내 보였던 엄마에 대한 비상식적이며 도를 넘어선 분노표출은 사실 자신을 알아주길 바랐던 아이의 절실한 몸부림이었다. 케빈은 엄마에게 소중한 모든 것을 앗아가는 일이 그녀에 대한 완전한 복수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건 엄마에게 보냈던 최후의 간절한 구조신호였던 셈이다.


비극은 에바가 케빈을 사랑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케빈이 난폭하고 무례하고 파괴적인 아이라서 사랑할 수 없었던 게 아니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한다는 일반적인 통념과 달리 에바는 케빈을 사랑할 수 없었다. 에바라고 사랑하고 싶지 않았겠는가. 단지 에바는 그 일을 할 수 없었을 뿐이다. 생의 모든 걸 엄마에게 의존하며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사랑받지 못했던 만큼 더욱 사랑을 갈망했을 아이와 본래적으로 자식을 사랑할 수 없었던 엄마의 불행한 만남이었다.


 에바는 처음으로 케빈을 진정으로 이해하려는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케빈이 입었던 티셔츠를 입어보고 즐겨 들었던 음악을 듣고 자신이 읽어주었던 '로빈후드' 책을 만져본다. 면회가 끝나기 전 에바는 케빈을 온몸으로 힘껏 끌어안아 본다. 에바의 동작과 표정은 긴장되고 경직되어 있다. 하지만 그녀의 포옹은 있는 그대로의 케빈을 인정하고 이해하려는 그녀 나름의 안간힘처럼 보인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변하는 순간이 있다면 그것은 안간힘을 쓰며 노력할 때이다. 느리고 고통스러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케빈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의 의미를 문득 알게되는 기적이 에바에게 일어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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