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쓰는 사람 Feb 12. 2022

나의 곰팡내나는 전셋집 - 영화 <기생충>을 보고


영화 <기생충>의 첫장면은 반지하집 창문으로 보이는 거리 풍경이다. 기택네 가족의 생활공간은 사람들이 걸어다니는 골목길보다 더 낮은곳, 지상과 지하의 중간쯤에 있다. 공짜 와이파이를 찾아 휴대폰을 높이 들고 집안 구석구석을 헤매고 피자 박스를 접어 생활비를 마련하는 이 가족의 삶은 다소 궁상맞게 보인다. 식탁 위에 기어다니는 곱등이, 열어 놓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매캐한 소독연기, 높은 단 위에 자리잡은 변기를 보자 내가 2년 남짓 살았던 전셋집이 떠올랐다.


내가 청보리아파트 407동 905호에 살게 된 건 그 집의 전세가격이 삼천만원이었고 내 여유자금도 딱 삼천만원이었기 때문이다. 지방 소도시라고는 하지만 2019년의 한국에서 삼천만원으로 18평 전셋집을 구할 수 있다는 건 축복이었다. 뚜렷한 직장이 없는 채로 집에서 독립한 나는 한푼이라도 지출을 줄여야했다. 매달 월세를 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경제적인 부담이 한결 덜했다. 그밖에 아파트 외벽에 금이 가고 페인트가 벗겨져 흉물스럽게 보인다거나 상가건물에 작은 슈퍼마켓, 세탁소, 통닭집말곤 아무것도 없다거나,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경사 45도의 언덕길을 등산하듯 올라야 한다는 것쯤은 내게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내 한몸 누울 공간만 있으면 충분했던 것이다.


이 아파트 비상통로의 벽면과 계단은 페인트칠이 안된 회색의 시멘트 상태였다. 계단에 미끄럼방지 패드도 부착돼 있지 않았다. 사방이 회색인 공간은 어쩐지 시립미술관의 현대미술 전시처럼 느껴졌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이 아파트는 시공사의 부도로 공사가 중단된 적이 있고, 공사대금을 못받은 건설업체가 유치권을 행사한답시고 주차장에 울타리를 친 적도 있다고 했다. 실제로 주차장 한켠에는 몇 년 전의 분쟁을 증명이라도 하듯 탱크만한 주황색 아스팔트 롤러차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여기저기 시공이 덜 된 것도 그 때문인 듯 했다.


청보리 집의 현관문은 문틀의 아귀가 정확하게 맡물리지 않아서 문을 닫아도 2센치미터 정도의 틈이 있었다. 이 문을 날림으로 시공한 현장소장은 이 집에 살게 될 사람들이 어떤 일을 겪게 될지 상상이나 해보았을까? 내가 사는 이 년 내내 그 2센티미터의 틈으로 여름에는 습기가, 겨울에는 외풍이 끊임없이 들이닥쳤다. 다이소에서 문풍지를 사다 문틈에 붙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며칠내내 비가 내리는 장마철이면 실내습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방바닥은 분무기로 물을 뿌린 듯이 축축했고 밀봉포장된 김은 봉지를 뜯은지 오분도 되지 않아 3일은 방치한 것처럼 눅눅해졌다.


베란다 문을 열어두면 방 안으로 3주정도 안빨은 양말같은 냄새가 흘러들어왔다. 아파트 공동 우수관에서 올라오는 냄새여서 우리집만 청소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비닐로 우수관 입구를 틀어막고 테이프로 꽁꽁 싸맸지만 효과는 미미했다. 베란다에 빨래를 널 때마다 옷에 냄새가 밸까봐 걱정이 됐다. 비오는 날에 빨래를 널 때면 늘 햄릿처럼 어느쪽도 택하지 못한 채 고민했다. 창문을 열어서 빨래가 눅눅해지게 할 것인가, 창문을 닫고 빨래에 꼬랑내가 배는 걸 감수할 것인가. 이 집에 살고부터는 혹시라도 불쾌한 냄새를 풍길까봐 종종 셔츠깃을 당겨 냄새를 맡아보게 됐다.  


외부개방형 복도와 바로 맞닿아 있는 작은 방은 안방보다 더 춥고 더 습했다. 나는 주로 안방에서 생활하며 작은방에는 옷가지와 책을 담은 종이상자, 잡다한 물건들을 쌓아두었다. 날이 습해지자 작은방의 벽면과 천장에 곰팡이가 피기 시작했다. 시퍼렇고 거무스름한 곰팡이 포자가 번식을 거듭하며 자신의 영역을 넓혀갔다. 아끼는 양장본 책 표지에도 곰팡이가 내려앉았다. 곰팡이가 퍼져가는 걸 보면 조바심이 났다. 이따금씩 물티슈로 작은방과 현관쪽의 곰팡이를 닦았다. 곰팡이가 피었던 자리는 닦아내도 누런 얼룩이 남았고 이주 쯤 뒤에는 내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시커먼 곰팡이들이 와글와글 다시 피어나곤 했다.


한날은 친구의 결혼식이 있어서 작은 방에 있는 부직포 양복가방에서 양복을 꺼냈다. 남색 양복 이곳저곳에 흰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몇 년 전 누나 결혼식때 엄마가 사준 한 벌밖에 없는 양복이었다. 서랍장을 열어보니 남색 니트 위에도, 가죽가방에도 곰팡이 가루가 하얗게 내려앉아 있었다. 신발장의 검은구두에도, 갈색워커에도 새하얀 곰팡이가 밀가루처럼 입혀져 있었다. 왠지 참담하고 막막해져 한동안 망연자실하게 서 있었다. 모든 집은 바닥과 벽과 문과 천장으로 이루어지지만, 저마다의 집이 제공하는 안락함에는 차이가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좋은 집에 사는 사람은 추위와 더위, 습기와 냄새에 상대적으로 더 많이 노출된다. 허술한 집에 사는 사람이 정상적인 일상을 유지하려면 남들보다 더 많은 주의와 노력을 기울여야만 한다.


그럼에도 나는 청보리에 사는동안 이곳에 크게 불만을 가지진 않았다. 문틀과 들어맞는 현관문, 썩은내 없는 베란다, 곰팡이와 웃풍이 없는 방을 바라긴 했지만 그것이 내게 절실한 문제는 아니었다. 기본적인 먹고 자는 문제가 해결된다면 인간의 행복은 그가 삶에서 추구하는 의미와 맺고 있는 관계에 달려있다고 믿었다. 청보리는 의미와 관계라는 두 조건을 충족하기에 충분한 곳이었다.


이곳은 이년 동안 나의 보금자리였다. 근처에 천성산 등산로가 있어 산책하기에 좋았고 관리비도 저렴했다. 이곳의 벽과 바닥과 천장 덕에 추위와 더위를 피할 수 있었다. 이따금씩 친구들을 초대해 직접 요리한 음식으로 식사도 대접했다. 이곳에 사는 동안 내 생애 처음으로 책 한권을 쓸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이곳이 내게 소중했던 건 주변의 선하고 지혜로운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누군가가 역세권의 6억짜리 집에 공짜로 살게 해주었더라도 나는 물티슈로 곰팡이를 닦아내며 살아야 하는 이 집을 선택했을 것이다. 나에게 집은 단순한 부동산이 아니라 추구하는 삶의 방식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포괄하는 것이었다.


#가난하지만불행하지않은, #아플때마다글을썼다, #정나무


작가의 이전글 한여름, 교차로의 횡단보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