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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는 사람 Feb 17. 2022

반지하와 대저택 그리고 제 3의 길, 영화 <기생충>


집의 본래 목적은 주거를 위한 것이다. 씻고, 잠자고, 지친 몸과 마음을 회복하는 곳이다. 요즘에는 부동산의 가격등락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많지만 그 집에서 살고 싶은 삶에 대해 얘기하는 사람은 드물다. 집을 냉장고나 세탁기처럼 하나의 상품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한 사람이 아파트를 수백채 보유한 경우도 있다고 한다. 생텍쥐베리의 <어린왕자>에는 어린이가 장밋빛 벽돌집에 대해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하던 어른이 10만 프랑짜리 집이라고 하자 대단한 집이라며 감탄하는 장면이 있다. 사람들은 자신이 언젠가 어린왕자를 읽으며 ‘이런 어른이 되지 말아야지’라고 다짐한 걸 잊은 것 같다. 요즘에는 이런 이야기를 꺼내면 세상물정에 어두운 사람, 시대에 뒤쳐진 사람 취급을 받는다. 돈만 바라보고 뛰어가는 사람들이 주변에 워낙 많아서 가만히 있다간 나 혼자만 낙오자가 되어버릴 것만 같은 불안감이 든다.


2021년에는 빚투(빚내서 투자한다),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아 산다)이란 말이 유행이었다. 집값이 단기간에 폭등하면서 이삼십대 젊은이들 사이에 영영 자기집을 못가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팽배해졌고 무리하게 대출받아 집을 장만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나도 덩달아 초조해져 전세금에 대출을 보태 집을 사려고 햇살론을 알아보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빚투와 영끌이라는 말이 현실의 반영이라기보다 황금만능주의의 강요처럼 느껴졌다. 빚내서 투자하고 영혼을 끌어모아 사지 않으면 뒤쳐지고 불행해질 것이라는 은근한 협박처럼 들렸다. 빚투와 영끌이란 말 뒤에는 값비싼 부동산을 소유하는 게 행복의 필요조건이라는 전제가 있다. 우리는 ‘돈=행복’이라는 전제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하지만 인간의 행복이 과연 부동산에만 달려있을까? 값비싼 부동산을 가질 수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에 도달할 수 없는 걸까? 우리가 간절한 마음으로 가꿔온 삶은 부동산 소유여부에 따라 결정되는 그런 허망한 것일까? 


나는 ‘돈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돈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돈 때문에 머리를 부여잡고 고민해본 적이 없거나, 돈걱정을 안해도 되는 삶의 여건을 갖춘 사람이다. 생활비가 부족해 곤란을 겪은 일을 몇 차례 글로 쓴 적이 있지만 나는 사실 가난한 사람이 아니다. 독립하려 했을 때 선뜻 전세금 3000만원을 지원해줄 수 있는 엄마를 둔 청년이 몇이나 되겠는가. 나는 진정한 가난을 경험해본 적이 없다. 먹을 게 없어 끼니를 거른 적도, 잘 곳이 없어 노숙을 해 본 적도 없다. 내게는 생계가 곤란해졌을 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부모와 친구들이 있었다. 누가 부동산으로 한달새 몇억을 벌었다더라, 누구는 서울의 집 한채 팔아서 지방에 아파트 열 몇채를 샀다더라 하는 말이 오가는 시대에도, 우리사회에는 기초생활수급비의 절반을 쪽방 월세로 내거나 영하10도의 날씨에 역사 한켠에서 박스를 깔고 주무시는 분들이 여전히 많다. 돈은 사회적계급, 주거, 식사, 건강, 안전, 치안, 심리적 안정 등 삶의 필수적인 부분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 중요한 문제다. 최소한의 돈이 없으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유지할 수 없다. 그럼에도불구하고 ‘돈이 전부’라고 말할 때 인간이란 존재는 얼마나 하찮은 것이 되는가. 


영화 <기생충>에는 한밤중에 대저택에서 빠져나온 기택 가족이 반지하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이 있다.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한참이나 내리막길을 걸었지만 갈 길은 여전히 멀다. 대저택과 반지하의 까마득한 높이차는 가진 자와 못가진 자가 얼마나 동떨어진 곳에 사는가를 실감케 한다. 많은 이들이 이 장면을 보며 가슴아파했던 건 홀딱 젖은채 하염없이 걷는 기택가족의 모습에 자신의 처지를 투영했기 때문일 것이다. 기택가족의 비참과 고통이 나와 내 이웃의 과거이자 현재이며, 이 상황이 미래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절망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의 말미에 기우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어 대저택을 사는 꿈을 꾸는 건 이 이야기의 당연한 귀결이다. 기우에게 대저택을 살 수 있게 된다는 건 지하벙커에 갇혀있는 아버지를 구하는 것임과 동시에 그토록 치욕적이고 불편했던 가난을 벗어나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영화를 보았던 관객들 중 많은 이들은 기우의 꿈을 자신의 것으로 가져갔을지도 모르겠다.


객관식 문제를 눈앞에 둔 사람은 보기중 한가지를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때로 답은 시험지 바깥에 있을 수 있다. 시험지를 책상위에 둔 채 교실밖으로 걸어나가는 게 더 나은 선택일 수 있다. 나는 반지하나 대저택중 하나를 택하지 않아도 충만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반지하와 대저택이라는 구도 자체가 ‘비참한 반지하’와 ‘호화로운 대저택’ 이외의 삶을 꿈꾸지 못하게 하는지도 모른다. 기우의 꿈은 이루어질 확률이 적을뿐더러 성공과 실패 모두 자신의 가족에게만 귀속된다. 소수의 대저택과 수많은 반지하로 이루어진 세상을 무기력하게 받아들이는 꿈이다. 어쩌면 ‘내’가 선택한다는 출발부터가 잘못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애초부터 ‘우리’가 제 3의 길을 택해야 하는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어떤 사람들이 모여사는 마을을 상상한다. 이 사람들은 VIP에게만 소개한다는 대저택을 욕망하지 않는다. 명문대 학벌과 고급 승용차도 욕망하지 않는다. 이들은 대저택의 호사스런 생활보다 이웃들과 어울리는 소소한 일상이 더 가치있다고 믿는다. 가족끼리 먹는 산해진미보다 이웃들과 함께 먹는 소박한 식사를 택한다. 이들이 경제적 어려움보다 더 경계하는 것은 재산과 사회적 지위에 따라 사람을 등급화할수 있다고 믿는 뒤틀리고 병든 마음이다. 이들은 모여살면 행복할거란 막연한 기대로 마을에 사는 게 아니다. 이들은 타인과 어울려 지내는 일이 때론 갈등과 오해를 수반하며 혼자라면 겪지 않았어도 될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일임을 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이들이 함께 살기를 택한 건 사람은 혼자서는 자신의 작은 선의조차 간수해가기 어려운 존재임을 알아서이다. 서로의 불완전함을 인정하며 갈등과 오해를 풀어가는 과정속에 배움과 성장이 있다고 믿어서이다. 더 많은 돈, 더 큰 권력을 욕망하길 부추기는 세상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서로를 지켜줄 수 있는 관계망을 만드는 것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믿어서이다. 이들은 돈보다는 서로가 쌓아온 시간을 믿는다. 이들은 궁극적으로 자신과 가족을 지켜줄 안전망은 눈물과 웃음과 진심을 나누며 살아온 마을의 평범한 사람들일 거라고 믿는다. 우리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이런 시공간과 관계를 만들어보려 하고 있다. 혼자서는 결코 꿀 수 없는 꿈을 꾸고 있다.


#가난하지만불행하지않은, #아플때마다글을썼다, #정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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