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결핵항산균 치료
응급실로 들어가기전에 이십대 후반의 여의사가 병세에 대해 물어보았다. 평소에 간염약을 복용하고 있고, 객혈 양이 많아서 오게 됐다고 답했다. 사실 오늘만 해도 세면대가 온통 시뻘게질 정도로 피를 게워냈고 토한 피가 두 컵 분량은 족히 넘었지만 한 컵 정도만 토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객혈양이 지나치게 많으면 피가 기도로 역류했는지 살피려고 기관지 내시경 검사를 하는데 그것만은 안하고 싶었다. 1년 전쯤 기관지 내시경 검사를 한 적이 있었다. 식도에 마취약을 뿌리면 혀와 목구멍이 뜻대로 안움직이고 침조차 삼키기 어려워진다. 길다란 관을 기도로 삽입해 한참을 휘젓는데 식도에 관이 닿을 때마다 숨이 막히고 구토감이 나서 정보기관에서 고문을 받는 것 같았다. ("가만히 계세요~ 발버둥치면 더 오래 걸립니다~") 이따금씩 내게 차분해보인다는 사람들이 있는데, 내가 기관지내시경 검사를 받으며 발버둥치는 모습을 못 봐서 그런 것이다.
크록스 슬리퍼를 신은 의사와 간호사들이 응급실 안을 바쁘게 오간다. 세면도구와 생활용품으로 빵빵해진 백팩을 껴안고 수액으로 지혈제를 맞으며 다른 환자들과 병실 한켠의 대기의자에 앉아 간호사의 지시를 기다린다.머리에 흰 붕대를 칭칭 둘러맨 아저씨, 아픈 부인과 함께 온 남편, 휠체어에 앉아있는 할아버지와 뒤에 서있는 따님으로 보이는 여성... 이 사람들은 어떤 일로 설 연휴를 앞두고 응급실에 오게 된 걸까? 링겔에 붙은 환자스티커를 힐끔힐끔 보니 6,70세가 넘은 분들이 대부분이라 나는 이곳을 들락거리기엔 아직 이르단 생각이 든다.
영상촬영을 한 후 한참 지나서 의사에게 결과를 들었다. X-레이 폐사진이 희뿌옇게 나오는 건 폐에 염증이 퍼져서라고 한다. CT촬영 결과 왼쪽폐와 오른쪽 폐에 주먹만한 구멍이 하나씩 나 있다고 했다. '폐에 구멍이 뚫렸다고? 그게 가능한 일인가?' 사진상으로 분명히 보이는데도 구멍이 뚫렸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질 않는다. 마치 의학잡지에서 예후가 나쁜 환자의 사례를 읽은 것만 같다.
응급실에서 청바지 차림으로 하룻밤을 보낸 후 입원 병동의 5인실로 갔다. 옆 침대 아저씨는 떡진 머리를 베개에 파묻고 옆구리를 드러낸 채 자고 있었다.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개인물품을 사물함에 정리했다. 간호사와 면담후 키와 몸무게를 쟀다. 50키로 초반대의 몸무게를 젊은 여성에게 보인다는 게 창피하다. 객혈로 입원했기 때문에 가래를 가래통에 모으며 수시로 출혈 상태를 확인해야 했다.
입원실 복도 중앙에는 소파와 탁자가 있는 휴게실이 있었다. 휴게실 창밖으로 파란 하늘과 산, 횡단보도와 상점들, 높다란 아파트들이 보였다. '저런 아파트는 몇 억씩 하겠지? 다른 사람들은 돈을 얼마나 많이 벌길래 저렇게 비싼 걸 사버릴 수 있는 걸까? 나는 툭하면 몸이 아파 골골대고, 혼자 생계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나는 그만한 돈을 벌 만한 체력과 기력이 없다. 내가 저런 아파트를 살 만한 경제력, 사회적 지위를 가질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십 수년째 몸이 아픈 걸로 시달리고 있다. 한때는 사회생활을 아예 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아팠고, 몸 상태가 좀 나아진 후에도 간염, 허리통증, 소화불량, 피부염에 수시로 시달렸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보려는데 자꾸 몸이 아프고 인생에서 변변한 성과를 못 내고 있다.
때로는 내가 특수한 감옥에 갇힌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국제올림피아드 수준의 수학 문제를 풀어야 나갈 수 있는 감방에 갇혀있다. 뭐가 미분이고 뭐가 적분인지 구별조차 못하는 나로서는 짐작조차 안되는 문제다. 아무리 애써봐도 문제는 풀리지 않고 나는 감옥에서 옴싹달싹 못한 채 목숨만 부지하고 있다. 인생의 시간은 나의 곤란함과 염원은 아랑곳않고 성큼성큼 흘러가고 있다. 이전의 문제도 풀지 못한 상황에서 새로운 문제가 더해진다.
어쩌면 신은 애초에 내 능력을 넘어선 상황으로 나를 내던진 게 아닐까? 나는 인생을 산다기보다 그저 견디고 있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내부의 풀리지 않는 문제와 드잡이를 해왔다. 진이 빠질 만큼 단단하고 풀리지 않는 매듭같은 문제. 내가 내 안에 어떤 고통을 담고 살아왔는지 다른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사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살아온 삶은 어떤 의미였는지 파악하는게 필요하다. 해결의 실마리는 충돌되고 모순되고 제멋대로 뻗쳐나가 엉켜버리는 내 마음을 이해하는데 있을 것이다.
나는 몇년 전부터 심리상담가인 H씨에게 인생상담을 받아왔다. H씨를 알게 된 건 그가 진행하는 심리상담방송을 통해서였다. 사람들이 인간관계, 진로고민, 성격문제 등으로 사연을 보내면 그는 자신만의 노하우로 그것을 상담해주었다. H씨가 들려준 이야기는 내가 이제껏 책과 방송에서 접해왔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는 사람들이 어려운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는 건 당사자가 문제라고 믿는 게 실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며, 문제가 무엇인지 제대로 규정하기만 하면 답도 스스로 찾을 수 있다고 했다. 나는 그의 방송을 여러 번 들으며 내 문제를 이전과 다른 관점으로 볼 수 있었고, 정체돼 있던 상황에서 벗어나는 경험을 했다. 이전과 다르게 살고 싶었던 나는 그를 직접 만나서 더 실제적인 조언을 들어보겠다고 마음먹었다.
나는 이전까지도 살아온 시간을 돌아보며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파악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왔다. H씨와 처음으로 만나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오늘 들은 얘기는 혼자서는 아무리 오래 자기성찰을 해도 파악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사각지대에 있는, 내 눈으로 볼 수 없는 나의 모습을 알려주었고, 그 정보는 나에 대한 이해를 확장시켜주었다. 그는 내 생각과 행동의 경향성이 무엇인지, 내가 가지고 있던 현실과 동떨어진 믿음이 무엇인지 알게 해 주었다. 그의 조언이 무의미한 방황의 시간을 대폭 줄여줄거란 예감이 들었다. 나는 첫 상담 이후에 매해 한번씩 그와 상담을 해왔다.
원래 이맘때쯤 H씨와 상담하기로 돼 있었는데 갑작스럽게 입원을 하게 되어 전화로 상담을 하기로 했다. 점심시간이 지나 한산한 환자 보호자 탕비실에서 그와 통화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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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원을 하셨다고요?
피를 많이 토해서 입원을 했고요. 원래 비결핵항산균 폐질환이 있었는데 악화된 것 같아요. 치료약이 독해서 왠만하면 안 먹으려고 미루다 며칠 전부터 먹고 있어요.
지금 비결핵항산균에 감염돼서 상태가 안좋아졌다고 생각하는 거죠? 비결핵항산균이라고 하면 결핵은 아닌데 산에 저항성이 있는 균이란 뜻인데 우리 주변에 항산균은 많거든요. 결핵균과 비슷하긴 한데 어떤 균인지 명확하게 모르겠으니까, 따로 이름을 안 붙이고 비결핵항산균이란 이름을 붙인 게 아닐까요?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실제 치료할 때도 결핵약을 써요. 결핵약에 비결핵항산균도 반응을 해서 그런가봐요. 제 생각엔 아직 이 병에 대한 연구가 깊게 안 이뤄져서 그나마 효과를 보이는 결핵약을 쓰는 것 같아요. 몇 년 동안 약을 먹어도 재발할 가능성이 있대요.
비결핵항산균인데 결핵약을 쓴다, 그것도 웃기는 거거든요. 결핵이 늑대고 비결핵항산균이 개라면 늑대는 사람을 해치니까 죽인다지만 개는 멍멍 짖기는 해도 별 탈이 없으니 놔둬도 되잖아요? 이건 개도 늑대랑 같은 개과니까 다 죽이자는 거랑 똑같잖아요. 본인이 객혈이나 기침을 하는 건 몸 상태가 안좋아졌단 걸 뜻하는 거지, 그게 반드시 비결핵항산균때문이라고 볼 수는 없거든요. 객혈하고 오한들고 살은 빠지는데 검사해보니 결핵균은 안 나왔고, 의사들은 이 증상이 균 때문이라고 보는 입장이니까 비결핵항산균이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건 아닐까요?
우석씨가 지금 피도 토하고 기침도 나고 몸에 힘도 없긴 한데요. 겁먹지 말고 걷다가 쓰러질 각오를 하고 죽기살기로 매일 두 시간씩 산을 오르면, 한달 후 쯤엔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비결핵항산균이 확 퍼져서 병이 더 심해질까요, 아니면 균이 꼼짝 못하고 가만 있을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저도 면역력이 올라가서 약을 안 먹고도 증상이 좋아지길 바랐는데, 점점 안 좋아지더라고요.
그 증상이라는 자체가 폐 상태가 안좋고 폐에 염증이 있단 걸 말해주는 거지, 비결핵항산균때문은 아닐 수도 있거든요. 어쨌든 우석씨가 몸이 안 좋다고 집에만 있는 게 아니라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내 몸의 증상과 부딪쳐보자, 이런 마음을 가지고 매일 운동을 하면 어떻게 될까요? 너무 힘들어서 정신을 잃거나 길에서 픽 쓰러지는 일이 발생할까요? 안 발생할까요?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제가 예전에 체중이 42킬로 나갈때도 밖에 나가서 운동을 했는데 한번도 쓰러진 적은 없었거든요. 저는 비결핵항산균에 감염됐고 병이 진행되고 있으니 이제 자연치유는 어렵고, 약을 쓰는 것 밖에 방법이 없다고 믿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운동을 해도 좋아질지 확신이 없다고 답한 것 같아요.
그렇죠. 그렇죠. 내 말이 그 말이예요. 이제는 증상에 대한 자기 마음을 조금 읽으실 수 있게 된 것 같네요. 본인은 비결핵항산균때문에 정상생활을 못하고 있다는 아주 강한 믿음을 표현했던 거죠. 지금 상황은 본인이 병에 걸렸다고 믿으니 아프게 되는 '믿는대로 이뤄지소서'란 상황인데, 우석씨는 몸상태가 워낙 안좋았기 때문에 어떤 병이 생겨도 어색할 게 없는 상황이거든요.
약 안먹고 운동으로 좋아질 수만 있다면 무조건 운동하죠. 운동으로 병을 극복한다는 게 왠지 열혈스포츠만화에 나오는 얘기 같기도 하고... 재미있을 것 같은데요?
요즘 날씨가 춥지만 옷 두껍게 입고 마스크 쓰고 산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땀 푹 흘리고 집에 와서 샤워하고 따뜻한 데 앉아있으면 참 좋은 건강법이 되거든요. 저는 의사가 아니니까 약을 먹어라 먹지마라 말은 못하겠지만 제 생각엔 이게 약 먹는 것보다 훨씬 안전한 치료법일 것 같은데요?
...
불과 한시간의 상담으로 병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뒤집혔다. 병원의 의사들은 비결핵항산균 폐질환이 진행되고 있으며 약을 쓰지 않으면 상태가 점점 악화될거라 보았다. H씨는 내가 겪는 신체증상이 비결핵항산균때문이 아닐 수 있으며 약 없이 운동으로 몸을 다스려갈 수 있을 거라 말했다. 이제 약을 먹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니 생각지도 못했던 길이 보였다.
비결핵항산균은 다른 수많은 균들처럼 우리 주변에 일상적으로 존재하는 균이고 객혈, 가래, 기침등과 별 연관이 없을지도 몰랐다. 결핵약은 오장육부를 상하게 할 뿐 아니라 긴 시간 복용해도 재발가능성이 30%나 된다. 그렇다면 과연 결핵약을 먹는 게 치료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견디고 또 견디며 2년간 그 독한 결핵약을 먹다가, 비결핵항산균폐질환이 재발했을 때 또 2년간 약을 먹어낼 자신이 없었다. 만약에 약 없이 이 병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제 아무리 힘든 운동이라해도 방긋방긋 웃으면서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당시에 H씨의 말을 온전히 이해하고 완전한 확신을 가졌던 건 아니었다. 상담을 통해 병과 신체와 몸의 관계에 대해 집요하게 탐구해온 H씨에 대한 믿음이 있었고, 약을 안먹고 병을 나을 가능성이 있다면 충분히 해 볼 만한 시도라는 생각에 내린 결정이었다. 100% 주인의식을 가지고 내린 결정은 아니었다.
그렇다. 나는 병원에 입원중이면서 의사의 입장, 더불어 비결핵항산균에 대한 의학계의 입장과 완전히 반대방향으로 걸어가려 하고 있었다. 의사들은 나 같은 환자를 보면 의사 말을 안 듣는다고 혼쭐을 내거나 죽으려면 뭔 짓을 못하냐며 한숨을 푹푹 쉴 것이다. 착한 의사라면 어떻게든 약을 먹게 하려고 간곡하게 설득할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중요한 것은 의사의 말을 따르는 게 아니라 몸이 나아서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이었다.
간호사가 물어볼 때마다 결핵약을 복용하고 있다고 했지만 상담 이후로 단 한알의 약도 먹지 않았다. 당직의사는 출혈의 위험이 있으니 침상에서 가만히 안정을 취하기를 당부했지만 나는 눈치를 살피며 병실을 빠져나와 1층으로 내려갔다. 길다란 타원형태의 1층 로비는 수납창구가 중앙에 있었고 주변으로 편의점, 커피전문점, 은행, 의료기기판매점, 구내식당이 삥 둘러져 있었는데 너비가 작은 초등학교 운동장 정도는 됐다. 나는 수액이 매달린 링겔거치대를 드르륵드르륵 밀고다니며 병원로비에서 걷기 운동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