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각자의 시간을 살아간다.
"어 눈 왔네?"
교회 갈 채비를 하고 나오자마자 나온 한마디. 좀처럼 눈 구경을 하기 힘든 이곳에선 소복이 쌓인 눈을 보면 괜스레 그것만으로 특별한 하루가 된 것 같은 기분을 준다. 자박자박 눈 덮인 길을 걸어 정류장 앞에서자 들뜬 기분을 비웃기라도 하듯 도착시간이 적혀있다. 13분...
'그렇지, 이래야 정상이지'. 독일에 살면서 휴일 배차시간조차 못 외운 내 잘못이려니 하고 비스마르크 광장에는 역 근처로 가는 노선이 있을까 싶어 다리를 건넌다. 만하임이라는 조금 떨어진 도시의 교회를 가기 위해선 하이델베르크 중앙역에서 기차를 타거나 트람을 타야 한다. 아무래도 기차가 빠르지만 트람은 주변 풍경을 보고 생각에 잠기거나 음악을 듣기도 하고 여러모로 작은 여유가 생겨 급한 약속이 아니라면 즐겨 타는데, 다만 이번처럼 의도치 않게 주어지는 여유는 어딘가 언짢단 말이지.. 결국 광장에 도착했지만 별다른 방법은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다리를 건너며 시간을 보낸 탓인지 마스크 넘어 안경에 김이 올라올 때쯤 구석진 뒤편에 앉을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시를 빠져나온 트람은 이내 시골길을 달리는 완행열차로 변모했고 창가에 비치는 모습들은 간만에 내린 눈을 자랑이라도 하듯 스스로를 뽐내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잠시 멈춘 작은 정류장에서 한 승객이 강아지를 데리고 옆자리에 앉았다. 흔들리는 열차 안에서 균형을 잡더니 폭삭 앉아버리고는 옆에 앉은 검은 머리 동양 남자가 신기하다는 듯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이내 지루해졌는지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다.
'하여간 여기 강아지들은 어딘지 모르게 사람 같단 말이야’라고 생각할 때쯤 정류장에 내렸다.
공원을 가로지르며 많은 사람들이 나와 썰매도 타고 눈사람 만들며 즐기는 모습을 보니 코로나도 이 순간만은 사라진 듯 느끼며 교회에 도착했다. 보통은 인터넷으로 예배를 드려야 하지만 (어느새 보통이 되어버렸다) 당분간 합창단으로 예배를 도와야 해서 반가운 마음으로 모인 소수의 사람들과 짧게 인사 후 연습이 진행됐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화음을 만들어 낸다는 게 얼마나 감사하고 즐거운 일이던지! 잠시 뒤 오르간 소리와 함께 본 예배가 시작되었다. 설교 제목은 'Sie haben keinen Wein mehr'
예배를 마친 후 아는 형네에 들렀다. 주일 아침 예배가 끝나면 점심을 먹을 때라 자연스럽게 일요일마다 찾아가게 된다.
"으~음". 형은 인사말을 꼭 이런 추임새로 대신하는데 같이 따라 하면 무언가 교감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마침 인터넷으로 한인교회 예배를 드리고 있던 터라 가방을 풀고 조용히 곁에 앉는다. 예배가 끝나고 전날 재워둔 불고기를 구우며 형에게 물었다. "형 그래서 정했어요? 왜 이번 주에 결정 날 것 같다는 거요"
"아 그거?" 형은 이미 결심했다는 듯 대답했다. "이제 와서 뭘 더 공부를 하겠냐, 4년만 젊었으면 몰라도". "그래도.." 말이 나올 찰나 지난번 승제와 통화 중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인생은 배와 같아서 나이가 들수록 선회를 하려면 크게 돌아야 한다고, 작은 배는 금세 다른 방향으로 돌릴 수 있지만 배가 커질수록 큰 결심이 필요하다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 예전에는 받아들이기 싫었던 말들이 주변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삶은 우리를 마냥 어린아이로 내버려 두지 않음을 느끼자 가볍게 웃어넘기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아쉬웠지만 형의 인생이 잘못된 게 아님을 알기에 아쉬워하지 않기로 했다. 많은 말이 필요치 않은 순간이었다. 배움에는 나이가 없다지만, 그럼에도 좋은 때라는 건 있는가 보다.
그 뒤로 서로의 이야기를 나눈 후 발걸음을 학교로 향했다. 집으로 갈까 했지만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그냥 두어선 안될 것처럼 느껴져서, 그 시간이나 환경조차 갖지 못한 사람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게을러질 여유도, 자격도 없다고 느껴졌다. 결국 주어진 지금 최선을 다해 살 수밖에.
오늘도 연습실에 앉아 이렇게 기도한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