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9시. 오래간만에 수업이 오후 3시부터 있어 조금 늦은 아침식사로 하루를 시작했다.
집에서 보내주신 말린 귤껍질에 온수를 부으니 향이 퍼져 방을 채우기 시작하고 8,415km의 거리는 이내 의미를 잃는다.
귤 향내 품은 그리움을 마시며 간만에 덮어두었던 책을 편다('앱을 킨다'가 정확하겠다).
이승우 작가의 '사랑의 생애'라는 소설인데 우연히 접한 이 책의 첫 장 글귀가 나를 사로잡아버렸다.
"사람이 사랑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사람이 빠질 사랑의 웅덩이가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사랑이 사람 속으로 들어온다. 사랑이 들어와 사는 것이다. 숙주가 기생체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기생체가 숙주를 선택하는 이치이다. 물론 기생체의 선택을 유도하는, 기생체의 마음에 들 만한 숙주의 조건과 환경에 대해 언급할 수는 있다. 그렇더라도 그 선택이 숙주의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숙주는 자기 몸 안으로 기생체가 들어올 때는 물론 몸 밖으로 빠져나가는 순간까지 어떤 주체적인 역할도 하지 않거나 못한다. 숙주는 기생체가 욕망하고 주문하는 것을 욕망하고 주문한다. 자기 욕망이고 자기 주문인 것처럼 욕망하고 주문한다.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전에는 하지 않거나 할 거라고 상상할 수 없었던 말과 행동을 사랑의 숙주가 된 다음에 하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세상에 떠도는 말대로, 사랑하면 용감해지거나 너그러워지거나 치사해진다. 유치해지거나 우울해지거나 의젓해진다. 어떤 식으로든 변화인가가 생긴다. 몸 안에 사랑이 살기 시작한 이상 아무 변화도 생기지 않는 경우는 없다. 그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 다른 사람과 다를 뿐 아니라 사랑하기 전의 자기와도 같지 않다. 같을 수 없다. 사랑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당신이 사랑할 만한 사람인가 아닌가, 사랑해도 되는 사람인가 아닌가는, 사랑의 초기에 반드시 찾아오는 피할 수 없는 질문이지만, 연연해할 일은 아니다. 숙주로서의 조건이 있기는 하지만, 그 조건을 자격으로 간주하는 것은 착각이다. 그 조건이 기생체를 불렀다고 단정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믿음은 없다. 어떤 경우에도 숙주가 기생체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사랑할 만한 자격을 갖춰서가 아니라 사랑이 당신 속으로 들어올 때 당신은 불가피하게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 자격을 갖추고 있어서 사랑이 당신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당신 속으로 들어와서 당신에게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다. 사랑이 들어오기 전에는 누구나 사랑할 자격을 가지고 있지 않다. 사랑했거나 사랑하고 있는 어떤 사람도 사랑할 만한 자격을 가지고 있어서 사랑했거나 사랑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은총이나 구원이 그런 것처럼 사랑은 자격의 문제와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지금, 당신도 나에게 찾아와 자격을 부여해 준다는 맥락에서 당신 또한 사랑의 그것과 결을 같이 한다.
시간은 흘러 어느덧 2시, 간단히 나갈 준비를 하고 길을 나선다. 거리는 한산하고 날씨는 맑으니 레슨 가는 길이 가볍다.
괴텔만 선생님은 즉흥연주를 알려주시는데 몇 가지의 즉흥연주를 준비해 가면 선생님께서 바로 어떤 이유로 어느 부분에서 어떻게 고쳐야 할지를 알려주신다. 사실 레슨을 받다 보면 대부분 그 자리에서 새로 만들어내느라 이게 아니라며 끙끙대는 날 보면서 하시는 말씀 "정답은 없어. 건반 앞에 앉는 순간 너는 수백만 가지의 길 앞에 서 있는 거고 난 그 길 중 몇 가지를 제시할 뿐이야. 마치 인생처럼. 자, 다시 한번 해보자. 속도는 중요하지 않아. 천천히 하면서 네가 완벽히 인지했느냐가 중요한 거야".
선생님과의 수업은 종종 음악으로 시작해 인생으로 끝난다.
한 시간 남짓의 수업이 끝나고 선생님의 차를 타고 Peterskirche로 향한다. 학교 수업 중 하이델베르크대학교의 신학 학부와 연계하는 수업이 있는데 그 방식이 퍽 흥미롭다. 신학생 두 명과 우리 학교 학생 한 명이 한 팀이 되어 한 번의 예배를 진행하게 되는데 예배 형식은 완전한 자유. 물론 전례상 행해야 되는 예전은 포함되어야 하지만 정해진 순서도, 양식도 없다. 이 자유로운 형식 속에서 학생들은 어떻게 하면 회중들에게 보다 효과적으로 설교를 전할지 또 음악은 어떤 곡으로 어디에 배치해야 좋을지를 고민하고 발표한다. 학생들은 회중으로서 예배를 드리고 예배가 끝나면 한 시간 동안 질문과 답변을 오고 가며 어떤 부분이 좋았는지, 개선할 점은 무엇인지를 고민한다. 교수의 개입은 없다. 물론 진행자로서 토의를 진행하기는 하지만 그저 흐름에 방해가 되지 않게만 중재하고 학생들이 답하기 어려운 부분에 조언만 전할 뿐 간섭은 하지 않는다. 사실 이런 방식이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한국에서의 그것과는 모습이 사뭇 다르다. 학점을 따기 위해 억지로 모여 복사와 붙여넣기로 얼룩진 결과물을 제출하는 것을 팀플로 정의되는 한국과는 다르게 이곳은 너무나 개인적이고, 자발적이며 창의적이다. 사실 학문적인 성취보다 취업시장의 전초문으로 이용되는 대학 속에서 공부하는 학생들과의 비교는 오히려 그들에게 너무 잔인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대한 사회 속에 개인은 한없이 작은 존재일지 몰라도, 그 존재가 모여 사회가 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렇기에 사회를 비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이해하고 그럼에도 개인으로서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고민하고 행동하는 것이 내가, 또 다음 세대가 해야 할 일이자 의무이겠지.
그렇기에 독일이라는 곳은 명백히 유토피아도 이상향도 아니지만, 나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던져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