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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여 Nov 21. 2022

지극히 슬픈 위안


당신을 가여이 여기는 이 마음은 동정이라기엔 어설프게 투영된 내 모습을, 선명하게 다가서는 흐릿한 이해를 무시할 수 없는 인정이다. 그는 안다. 하나의 얼굴로 세상의 표정을 담는 그는, 나를 안다. 내 마음이 아닌 다른 사람의 마음으로 사는 것이 어떤 건지, 당신이 날 안다. 그런 당신을 나도 알 것만 같아서, 거절당한 발길조차 돌릴 수 없어진다.


“그 누구도 얘기하지 않으면 알지 못했던 걸 내 말투와 표정만 보고도 아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 위안이 얼마나 컸는지. ‘아무도 모르는 게 아니다, 당신은 나를 안다.’ 그런데 그 사실이 너무 슬퍼서 이해받고 싶지 않아졌어요. 당신이 날 모르면 참 좋을 텐데.”


“이해받는 것이 늘 기쁜 일은 아니죠. 내 그늘을 알아보는 사람은 그 그늘 아래 있어본 사람뿐이니까요.”


빗줄기가 모인 곳에, 이해의 눈물이 모인 곳에 우산을 쓰고 서있는 기분은 더 이상 비를 피하고 싶다는 짜증을 부르지 않는다. 당신의 그늘을 한 겹 외면하고 있는 듯 울쩍해진다. 날 덮고 있는 우산의 부질없음에 흠뻑 젖은 운동화로 반항한다.


“그런 사람을 잃는 건 어떤 기분이에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순화된 표현으로는 그 질문에 답할 수 없었다.


“그 사람을 잃는 순간에… 지금의 나는 죽어요. 아니, 지금까지의 나는 죽어요. 새로운 껍데기가 그 자리에 태어나죠, 그마저도 모두가 몰라요. 난 이전과 같은 삶을 살 수 없고, 다른 누군가가 되어 있어요. 그 이전의 나를 찾을 수 있는 방법도 잃고요.”


“존재의 미아가 되는 셈이네요.”


“애초부터 나는 이런 껍데기인데 그 내면의 무언가를 읽을 수 있는 특별한 존재가 있었던 거죠. 존재는 원래 그 자체부터가 미아예요. 내가 나를 찾다 보면 마치 손에 들고 있는 핸드폰을 사방팔방 찾으러 다니는 것처럼 무용해요. 애초에 존재에 대한 질문을 하는 게 우스울지도 몰라요. 존재에는 이유가 없거든요, 그저 존재하는 거죠.”


“연유가 없이 당도한 두 존재 사이에 이해라. 뭔가 이해가… 엄청난 일이 되는 것 같아요. 그냥 일상을 살면서도 대단하다고 느끼는데, 영화적인 무언가가 되어버린 느낌.”


받은 이해에 또 다른 이해를 돌려주고자 발버둥 쳤던 존재의 나약함이 새삼 먼 거리의 스크린에서 보던 눈치 없는 조연 같았다. 늘 그랬다. 누군가를 위해, 특히 당신을 위해 좋은 사람이고 싶다는 생각이었지, 나 자신을 위해 좋은 사람이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 그래서 조연의 자리가 언제나 늘 내 자리인 것처럼 편안했다. 당신 곁에는 뭐든 좋은 것만 있어야 하니, 그 곁에 머물고 싶은 나는 늘 ‘바보 같고’, ‘좋은 사람’이어야 했다. 그런 나의 발버둥이 얼마나 기껍고 버거웠을까.


“지금에 와서야 이해가 돼요. 상대방은 마음의 여력이 없는데, 빈자리를 어떻게든 메워주려는 이 애정이 얼마나… 스스로를 더 부질없는 존재로 느끼게 하는지. ‘나는 그런 사람이 아냐.’라는 벽이 생길 수밖에 없어요.”


“직접 겪어보기 전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는거죠. 그걸 경험해버리고 나면 느껴지는 허탈과 공허는 무엇에도 비할 수 없죠.”


“그래서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존경해요. 경험 없이도 모든 삶을 살아본 사람들, 고통과 환희를 동시에 이해하는 사람들.”


“그런 소여 씨의 마음을 어쩌면 이미 이해하고 있을 거예요, 그 사람. 내가 들은 바로는 왠지 그래요.”


다시 한번 투명한 햇빛에 발가벗겨진 느낌이었다. 왠지 모르게 늘 나를 아는 사람이 있다. 그렇게 나를 가여이 여기고 있을 이해에 기대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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