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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필 Jan 11. 2020

연구의 자격?

차별적인 시선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석사과정 때였다. 선배들과 술을 마시다 술 취한 선배가 "서연고 밑으로는 인문학 할 필요 없어. 인문학은 원래 귀족 학문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 선배의 이야기대로면 이 자리에 있는 사람 대부분이 대학원 생활을 할 필요도 없었다. 당혹스러운 주장이었고, 기분도 좋지 않았다. 술 김에 나온 치기어린 말이겠지만 어떻게 이런 말을 하나 싶었다.


하지만 그 선배의 문제는 아니었다. 필자의 옛 담임선생은 대학원 진학 계획이라는 필자에게 "XX대학 나온 교수를 학생들이 인정해주겠냐"며 현실적인 판단을 하라는 충고를 남겼다. 대학에서 만난 동기들, 그리고 후배들은 스스로 '실패자'로 정의내렸다. 중고교 6년 간 우리를 괴롭히던 서열이 그대로 신분이 되어 삶에 넘어설 수 없는 울타리를 친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여 꿈을 접었을수도 있고, 누군가의 꿈을 꺾었을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상황이 문제라는 생각조차 가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니 필자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서 있는 곳이 다르면 보이는 것도 다르다'는 말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중산층 연구자와 노동계층 출신 연구자가 보는 것은 다르다. 남성 연구자와 여성 연구자가 보는 것은 다르다. 자유주의 성향의 연구자와 사회주의 성향의 연구자가 보는 것 또한 다르다. 수도권과 지방의 시각 또한 다르다. 여성사를 쓰더라도 남성 연구자와 여성 연구자의 차이는 분명하고, 상류층 여성과 노동계급 여성의 눈으로 본 여성사 또한 다를 것이다.


우리는 차별을 거부하는 동시에 차이를 긍정해야한다. 차이는 학계에 다양성을 준다. 서로 다른 주체가 토론하고, 견제하며, 균형을 이루는 것은 어느 사회에나 필요한 것이고, 학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서연고'가 아닌 학교에서도 학문이 계속되어야하는 이유다. '될 놈만 밀어줘도 된다'는 논리에는 "'될 놈'은 누가 정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야한다. 한 편으로 우리는 끊임 없이 반문해야한다. 우리가 거부하고자 하는 프레임을 우리가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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