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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민 Sep 23. 2024

백발의 낭만

읽다. 사설시조


[청구영언]진본#507

백발에 서방질하는 년이 젊은 서방 만나겠다고

흰머리 검게 염색해서 높은 고개 허위허위 넘어가다가 때 아닌 소나기에

염색물이 빠져 흰 저고리 까매지고 검은 머리 다 하얘졌네.

그러네. 늙은이 소망이 이뤄질지 말지.


>>요즘 시대에 백발이라면 70은 족히 넘은 나이가 될 텐데. 어르신은 뭐가 아쉬워서 젊은 남자를 원할까. 70이면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어 쉬고 싶을 텐데. 그때도 가슴 뛰는 사랑을 느끼고 싶을까 하는 여러 가지 생각이 겹쳤다. 어르신은 자신의 외롭고 힘든 감정을 이해해 주는 누군가를 원했던 것은 아닐까. 


 인생의 황혼기. 그녀의 사랑은 어느 날 갑자기 마음에 들이닥친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자식들이 해줄 수 없는 부분일 것이다. 자식들과의 의례적인 관계와 무료하고도 소외된 일상은 그녀를 힘들게 했을 것이다. 일상을 공유하여 마치 네 것이 내 것이고 내 것이 네 것이 된 남편과의 동거에도 존중과 사랑이 필요한듯하다. 백발까지 살았다면 단순한 사랑이 아니라, 또 다른 의미의 사랑일 것이다. 안타깝게도 육체는 정신을 따라가지 못한다. 어찌 보면 사랑도 고집스럽고 억척같을 것이다.


 늙은 남자가 젊은 여자와 함께 있는 장면은 누구나 연상하면서도 늙은 여자가 젊은 남자에게 성적 감정을 느끼는 것에는 왠지 낯선 사회적인 시선이 있다. 그렇다고 노년의 사랑이 무조건 성적 행위와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가까운 예로 우리 엄마는 68세이다. 그녀는 6살 연하의 남자친구가 있다. 자식들이 모두 커서 각자의 삶을 살아갈 때 두 사람은 여행을 다니고 서로가 아쉬운 부분들을 소소하게 채워나간다. 양가 가족들 소개는 생략하고 두 분이서 좋으면 그만이다. 각자의 외로움을 채워주고 필요라는 단어가 거슬리지 않게 필요에 의해 보는 것을 인정하며 만난다. 자식의 입장에서는 꽤 흥미로운 경험이고 엄마를 볼 때 대단한 능력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국 사회에서 백발의 여성이라 함은 왠지 가정에 헌신하며 가족의 화합을 위해 희생한 자유롭지 못한 ‘어머니’가 떠오른다. 하지만 예전부터 ‘엄마도 엄마이기 전에 여자’라는 광고 효과 덕분에 시선이 달라진 부분도 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실제의 여성들은 아마도 역사를 반복하거나 또는 역행하여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해 나간다. 또한 꿈을 포기하지 않으며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으리라.


 인간은 어찌 보면 '영원한 삶' 보다 '영원한 젊음'을 더 원한다. 노인의 모습이 되어도 마음 안에 있는 욕망은 늙지 않는다. 그것은 남자든 여자든 마찬가지다. 오히려 어린아이처럼 자신의 욕망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수 있다. 공자는 마흔이 넘으면 어떤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는 ‘불혹’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욕망은 나이 드는 것과는 무관하게 존재하고, 오히려 채워지지 않는 것에 대한 결핍감은 살아온 세월만큼 강하게 자리 잡는지도 모른다. 


 앞서 본 사설시조에서처럼 비록 나이 든 여성의 사랑과 욕망을 이야기하면서도 그것에 대해 돌을 던지거나 서툴게 미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마지막 부분에는 싱긋이 웃으며 응원하는듯한 마음을 전하고 있다. 흰머리를 검게 염색하느라 얼마나 공을 들였겠으며 높은 고갯길을 휘청 거리는 걸음으로 얼마나 힘주며 걸었을까. 소나기에 염색물이 빠지고 저고리에 물이 들었어도 마음만은 청춘이니, 늙은이란 호칭을 빼고 그녀의 소망이 이뤄지길 감히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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